[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이슬비편: 이슬비의 시점(1)-
Maintain 2015-05-13 9
힘들 때 의지할 곳,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것도 그걸 눈앞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갑자기 잃어버린 경우라면 더욱 더.
전쟁고아, 라는 말은 내 나잇대의 애들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 아이들도 차원전쟁을 겪긴 했지만, 나처럼 거기서 부모님을 잃은 경우는 흔치 않을 테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처음에는 별로 실감이 나진 않았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니까. 유니온 산하의 관리기관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그저 주변의 어른들이 하셨던 '부모님은 지금 먼 데로 가셔서, 나중에 돌아오실 거야' 라는 말이 진짜인 줄만 알았었다.
생각해 보면, 아직 그때의 나는 많이 웃고, 또 울기도 많이 울었던 평범한 아이였던 것 같다. 내 보육을 담당하셨던 선생님께 우유가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창피함과 함께 쓴웃음이 나온다. 그때 선생님 말씀을 따라 우유를 많이 먹었으면 지금보다 키도 좀 더 컸을지도 모르고, 아마 가ㅅ...휴, 그만두자. 좌절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난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버렸다. 부모님이 차원종들의 손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같이 알아버렸고.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 것은. 덕분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났고, 거기다 위상력이 발현되면서 클로저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면서, 결국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친구가 아니었다. 클로저로서, 내 부모님을 죽인 차원종들을 반드시 섬멸시키고 말겠다. 그 신념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위상력 모의평가를 받았을 때, 남들보다 위상력 잠재력 및 구현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말이 그때만큼 뼈저리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약해빠져서,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수야 있겠냐고. 스스로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고, 아마 그때 마지막으로 울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남들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서, 두 시간 더 늦게 잔다. 그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천해 왔고, 그 동안에는 클로저로서 해야 할 일들-위상력 사용법 훈련과 작전 수행에 필요한 체력 단련을 꾸준히 했다. 그 노력의 결과였던 걸까, 마지막 모의평가에서는, 남들보다 더 우수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 내 머리색은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과 확연히 차이나는 분홍색. 위상력 과다 사용의 부작용 중 하나가 머리색의 변화라는 게 클로저 교육용 교재에 있는데, 그 산 증인이 바로 나다. 그래서 사실 지금도 밖에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이 머리색은, 내게 어쩌면 훈장과도 같은 존재니까. 내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는.
그렇게 차원종들과 싸울 힘도 충분히 얻었고 의욕도 충만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부재는 내게 큰 상처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나는 부모님과 관련된 행사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다른 애들이 학예회에 나가서 부모님 앞에서 열심히 자기가 연습한 것들을 보여주는 동안 나는 시설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고, 운동회 때엔 다들 모여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던 동안 홀로 식당에 가서 김밥을 사 먹고 있었다.
외롭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TV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다. 물론 그 드라마는 흔히들 말하는 '막장드라마' 아니면 '아침드라마'가 대부분이었지만, 적어도 그런 드라마들은 끝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니까. 마치 어렸을 때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 속 공주님들처럼.
그런 식으로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검은양이라는 팀의 리더가 되었다. 그리고 세하와 유리를 만났고, 나중에 제이 아저씨와 테인이가 들어왔다.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반목하는 때도 있었고 리더로서 작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좌절했던 때도 있었지만, 서로를 믿고 열심히 싸운 결과 차원종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모든 게 끝나고 유정 언니가 나를 안아주셨을 땐, 나도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차원종과의 전쟁이 끝나고 나니,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몰려왔다. 일상을 되찾은 사람들. 그리고 엄마 아빠와 같이 손을 잡고 놀러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억눌러 왓던 그 허무함. 그 그리움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억누르려고 노력하고 있던 차에, 타이밍 좋게도 학교에서 학부모 면담에 관한 유인물을 나눠줬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한참 마음이 약해져 있던 때에 그 유인물까지 받으니, 아무리 노력하려 해도 약해진 마음을 쉽게 달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유정 언니한테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 하루 결석하기로 했다. 아마 유정 언니도 많이 놀랐겠지.
거기다 무슨 장난인지, 잠깐 들린 놀이터에선 즐겁게 흙장난을 치며 놀고 있던 모녀를 보고 말았다. 내가 저렇게 엄마랑 같이 놀았던 게 언제였더라. 저렇게 흙장난을 치고 나면, 집에 돌아가서 엄마랑 같이 씻고 아빠를 기다렸고 아빠는 집에 돌아와서 날 안아주시곤 했었는데. 이젠 그런 건 꿈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일찍 잠들기로 했다. 꿈속에서나마 엄마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 하지만, 그 꿈을 꾸기도 전에 유정 언니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내일 학부모 면담에 일일 보호자가 올 거라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면담을 받으라고 말이다.
일일 보호자? 그게 누구지? 내게 보호자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텐데? 그나마 유정 언니하고 제이 아저씨가 있긴 하지만, 유정 언니는 바쁘고 제이 아저씨도 딱히 와 주실 이유가 없잖아. 뭐...아마도 유니온에서 파견한 요원 중 하나겠지. 그런 사람, 별로 필요없는데. 살짝 기분이 나빠져서 잠자리에 들었고, 그 때문인지 꿈도 꾸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게 다가온 면담일. 대체 누가 내 보호자로 오는 걸까. 그래도 오신 수고가 있으니, 최대한 예의바르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등교했다. 물론 같이 등교하며 얘기를 나눌 친구는 없었다. 오는 길에 유리와 세하를 만나 인사한 게 전부. 아, 한 명 더 있구나. 얘기는 안 했지만, 교실로 가는 길에 정미하고도 만나 고개를 서로 끄덕여서 인사했으니까. 그 후에 교실로 들어가, 어제 못다 정리한 노트를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을까. 왠지 교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귀를 기울이니, 들뜬 여자아이들의 목소리. 마치 유명인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그런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실을 둘러보니, 여자애들 대부분이 상기된 표정으로 복도를 보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유명 연예인이라도 우리 학교에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금방 쓰러지지나 않을까 싶은 피곤한 인상의,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이 인상깊은 남자아이. 구로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석봉이라는 남자아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 석봉이라는 남자아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열이라도 도진 건 아니겠지. 생각해 보면, 석봉이는 그때도 그렇게까지 말을 잘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끈기있게 기다려 줘야겠지. 그렇게 해서 몇 분을 기다리니, 겨우 말을 꺼냈다. 교실 밖에, 제이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제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이 아저씨라고? 그 분이 왜? 설마...그 일일 보호자가 바로 제이 아저씨였다는 말이야? 당혹감과 함께, 기가 찼다. 그 책임감 없고 빈둥거리기만 하는 아저씨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석봉이가 먼저 나가고 나서 나도 석봉이를 따라 나섰고, 복도로 나가자 등을 돌린 한 남자가 보였다.
훤칠한 키에, 보기 좋게 근육이 붙어 있는 다부진 몸매. 그리고 그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익숙한 뒷모습. ...왜 여자애들이 그렇게 들떴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저 모습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지. 나조차도, 솔직히 말해서 탄성이라도 낼 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기가 막히기 시작했다. 진짜 제이 아저씨잖아? 유정 언니나 제이 아저씨나,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 아저씨의 등을 건드렸다.
"...어쩐 일이세요?"
제이 아저씨는 뒤는 돌아봤지만, 사방을 둘러보기만 할 뿐 내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 아저씨,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야. 틀림없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밑이에요, 밑"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는 제이 아저씨. 얼마 전에 검게 염색한 머리는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고, 평소 임무 수행할 때의 그 너저분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눈매는 살짝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만은 진지하고, 또 다정하게 보였다.
"하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구나 대장. 좋은 아침이야."
아저씨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 능글맞은 웃음을 보고 있으니, 놀림받은 기분이 드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왜 아저씨가 여기 계신 거죠? 오늘 면담 때문에 누가 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그게 아저씨였어요? 세상에..."
내 말에, 아저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인걸, 대장.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는, 가끔씩 보여주는 그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시며 아저씨는 말씀하셧다.
"오늘 하루만은, 대장의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해 주겠어. 절대 대장에게 폐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 믿어 달라고. 알겠지?"
그런 표정으로 말씀하시니, 왠지 모르게 신용이 갔다. 이런 표정을 지은 아저씨가 절대로 허튼 짓은 안 한다는 건, 같이 임무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니까.
"자신만만하시네요. 그럼 한 번 믿어 볼게요."
"고마워 대장. 한 번 대장을 위해 최선을 다 해 보도록 하지."
"알겠어요. 하지만 유감이네요. 면담하려면 아직 시간 한참 남았는데."
내 말에, 당황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는 아저씨.
"그래? 몇 시부턴데?"
"아직 아침 1교시도 시작 안했는데요. 아마 점심은 먹고 할 거에요. 안됐네요. 너무 일찍 오셔서."
"그렇군...이거, 좀 더 유인물을 잘 보고 올 걸 그랬구나. 어쩐지 운동장에 차가 하나도 없더라니."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저씨. 내,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건가? 사실을 말한 거긴 하지만, 조금 더 상냥하게 말씀드릴 걸 그랬나?
"그,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제가 선생님께 한 번 일찍 할 수 있냐고 여쭤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건, 이미 익숙한 일이야."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니깐. 대장은 그냥, 평소처럼 열심히 공부만 하면 돼. 이 아저씨는 괜찮으니까."
"아저씨..."
"대신에...혹시 점심 때 시간 되니? 아저씨가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대체 뭘 하려고요."
"그렇게 노려** 말라고 대장. 그냥...만약 다시 학교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역시 수상해. 하지만 아저씨의 저 아련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점심 시간 때 봬요."
"고맙구나. 그럼 이제 대장도 들어가 봐야지? 수업 시작하겠다. 이 아저씨는, 어디서 시간이라도 떼우고 오마. 혹시 운동장에서 무릎 꿇고 아임 프리!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난 줄 알고."
그 말을 끝으로, 아저씨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고 복도 끝으로 걸어가셨다.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그래도 그 감촉은, 싫지는 않았다. 다만...교실로 들어가자마자 쏟아지는 여자애들의 질문은, 굉장히 귀찮았다. 평소엔 친하지도 않은 애들이 말이다.
예, 안녕하세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글을 올립니다.
날씨가 많이 춥네요. 5월 중순이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쌀쌀한 날씨입니다. 빨리 날씨가 좀 더 따뜻해졌으면 하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어제 예고해 드린 대로, 이번엔 슬비의 시점에서 글을 올리게 되네요. 일종의 슬비 시점 프롤로그라고 해야 할까요? 앞으로 한 한두 편 정도 이렇게 슬비의 시점에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오늘은 조금 분량이 짧은 건, 다음 글에서 만회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