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그녀의 휴일
프레릴 2019-06-28 2
[부산] 그녀의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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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백사장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바다는 하늘의 색을 그대로 반사하여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도 마찬가지로 완벽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금 그녀가 혼자라는 사실뿐일 거다.
하피는 읽고 있던 패션 잡지를 내려놓으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지루하네요. 자극이 필요해요."
하피는 불퉁하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랜만의 휴일을 부산 해운대에서 보내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마침 일기예보도 완벽한 날씨를 예견한 참이었으니까.
하지만 매정한 동료들은 각자 사정을 대며 그녀의 나들이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다시금 그 상황을 떠올린 하피의 입술이 한층 더 튀어나왔다.
'어머, 나타. 마침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 됐네요. 이번 휴일에 저와 함께 바다에 가지 않겠어요?'
'하아? 이 몸은 바쁘다고. 다른 녀석들한테나 물어봐.'
'그럼 레비아? 저와 함께 바다에 가지 않...'
'죄, 죄송해요, 하피님! 전 그 날 선약이 있어서...'
'...티나? 당신이라면 저와 함께 바다에 가주시겠죠?'
'난 그 날 트레이너와 임무에 투입된다. 미안하게 되었군.'
'...후우. 바이올렛 양은...'
'전 그 날 하이드와 쇼핑을 가기로 해서요.'
'...네, 그렇겠죠.'
'...아까도 들었겠지만 난 티나와 임무에...'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저 혼자 갈 거에요!'
그 후 대기실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혼자라도 가겠다고 말해버린 터라 일단 오기는 했는데, 역시 혼자는 너무 지루했다.
하피는 큰 맘 먹고 주문한 검은색 비키니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주인이 계속 해변 한 구석에 처박혀 잡지만 읽고 있으니, 비키니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나들인데, 이게 뭐람. 하피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예쁜 아가씨. 괜찮다면 나랑 같이 빙수나 먹으러... 엥? 하피 양?"
"어머나... 제이 씨. 거기다 검은양 팀 멤버들까지... 다들 해운대까진 어쩐 일이신가요? 휴일을 맞아 다 같이 놀러오신 건가요?"
"네, 맞아요. 적당한 휴식은 체력적으로도 필요하니까요."
생각 외로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익숙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발견한 하피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어머... 슬비 양이로군요. 그 수영복, 슬비 양에게 무척 잘 어울려요."
"가, 감사해요, 하피 씨. 하피 씨도 정말... 음."
슬비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노출이 심한 검은색 비키니는 보는 사람도 민망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 챈 하피가 짓궂게 되물었다.
"정말?"
"...정말, 잘 어울리세요."
"후후, 고마워요."
"그나저나 하피 씨는 혼자 오신 건가요? 다른 멤버들이 안 보이는데..."
어느새 다가온 세하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후, 걱정 말아요. 나타는 오지 않았으니까."
"...뭐, 딱히 그걸 걱정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 녀석은 항상 저만 보면 달려드니까..."
"그럼요, 잘 알고 있답니다."
"..."
세하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하피는 그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누나는 혼자 온 거에요?"
"그 말대로랍니다, 미스틸 군. 매정한 늑대개 팀 멤버들 덕분에 말이죠."
하피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처연해보이는 그 모습에, 유리가 하피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럼 저희랑 같이 빙수라도 먹으러 가요, 하피 씨!"
"정말인가요? 그래준다면 저야 환영이지만... 제가 검은양 팀의 휴일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우리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아가씨."
"네, 맞아요. 그러니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제이에 이어 슬비까지 그렇게 말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하피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아요. 어울려드리죠."
그리하여 6명은 사이좋게 근처 빙수 가게로 향했다. 빙수 가게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검은양 팀은 변함없이 무척 유쾌해서, 하피는 우울함이 한결 가시는 듯했다.
빙수 가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충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자, 형형색색의 빙수가 자리로 배달되었다.
슬비는 자신의 머리색과 똑 닮은 딸기 빙수를, 세하는 달콤해 보이는 초코 빙수를, 제이는 맛이 의심되는 비타민 빙수(?)를, 미스틸은 그의 눈색과 닮은 메론 빙수를, 마지막으로 유리는 화려하게 토핑된 과일 빙수를 주문했다.
슬비가 텅 빈 하피의 앞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하피 씨는 드시지 않는 건가요?"
"전 여러분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답니다."
그렇게 말하고 눈꼬리를 휘며 웃자 검은양 팀 멤버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정말이지 순진한 반응이로군요. 하피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간 웃던 그녀가 이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아주 중요한 비밀을 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농담이랍니다. 사실은 조금 무서워서 말이죠. 기껏 이렇게 예쁜 수영복을 입었는데, 배가 나오면 보기 흉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순간 하피의 가는 허리로 향했다. 유리가 미묘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음, 저기, 하피 씨? 제가 보기엔 충분히 날씬하신 것 같은데요?"
"어머, 칭찬 고마워요, 유리 양.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랍니다. 여러분처럼 젊지 않은 저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제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가 젊지 않다면 나는 이미 화석이 되어버렸겠군 그래."
그 말을 시작으로 검은양 팀 멤버들이 하나둘씩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무안해진 하피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쓸었다. 그녀가 작게 툴툴거렸다.
"정말이지, 짓궂은 분들이로군요..."
그렇게 말하던 하피도 결국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양 팀 특유의 다정한 분위기에 녹아들었던 하피는 문득 자신의 팀원들을 떠올렸다.
매정하게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던 건 괘씸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이었다.
'그래, 오늘은 빙수를 사가서 다 같이 나눠 먹는 것도 좋겠네요.'
즐겁게 웃는 검은양 팀 멤버들을 보면서, 하피는 짙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우울함은 어느새 저 하늘처럼 환하게 개어 있었다.
-그녀의 휴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