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세하/세하유리] 모든 게 꿈이였으면 좋겠어
루이벨라 2018-04-02 7
※ 암광유리 x 네틱세하
※ 유리는 고위급차원종으로 경계대상이고, 세하는 유니온 소속 특수 클로저로 살아간다는 설정
※ 『[세하유리] 또 보자』 와 이어집니다.
※ 썰은 예전에 생각한건데 드디어 쓰네요...
"안녕?"
"..."
참 가벼운 인사였지만 이 둘의 관계는 그냥 넘어가기에는 짚고 가야할 사항들이 많았다.
하나, 용의 위광을 받아들여 새로운 '용' 이 된 유리는 현재 인류 최대의 적인 차원종, 그것도 고위급 간부에 해당되는 직책이다. 쉽게 수치하를 하자면 S급,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런 거물이 사람들이 많은 신서울 시내 한복판에 고개를 내민다? 그것도 자신의 영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포탈을 만들어서?
둘, 세하는 특수 관리 대상의 클로저이다. 특수 관리, 이 말이 붙은 명성처럼 세하는 24시간 유니온의 감시 하에 살고 있었다. 물론 클로저라는 직책에 맞게 세하는 당연히 유니온에 소속되어 있었다. 보통의 클로저와는 달리 사고로 인해 '살기 위해' 사이버네틱 수술을 받은 후, 감정의 무뎌짐을 느끼고는 있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인류와 가까운 위치에 있다.
즉, 이 둘의 만남은 인류와 차원종의 만남. 이걸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환히 웃으며 세하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세하는 잠시 주위를 휙- 돌아보았다. 감시 카메라 같은 건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핀잔하듯, 세하가 말했다.
"너,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막 행동한다고 생각해? 괜찮아. 특수 영장을 펼쳤으니까 네 눈에만 보일거야."
정말로, 시내 한복판에 차원문 같은 게 작긴 하지만 열렸는데도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제 갈길을 갈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하는 두번째 질문을 한다.
"우리 관계, 잊은 건 아니지?"
"안 잊었어."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치고, 생각 외로 바로 되돌아오는 즉답이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쓰레기 더미 위에서 감격의 제외를 한 것도 잠시. 서로가 서로의 적임을 알아채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망은 하지 않았다. 순응? 아마도 자포자기했다는 게 더 맞을 듯 했다. 무엇을 원망해야하는지 당시 두 사람은 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말만, 겨우 꺼낼 수 있었다.
-다음 번에 만나면 우린 적이야.
이 쓸쓸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말을 한 건 유리였다. 앞에서 '무책임한 행동' 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유가 다 있었다. 먼저 약속을 한 건 유리, 그리고 지금 그걸 깬 것도 유리.
애초에 지금의 세하와 유리는 말조차 섞으면 안되는 아이러니한 관계였다.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 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유리의 특수 영장 효과가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둘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과거의 '어떤 감정' 때문이었다.
뭉개지고, 흐트러지는 자신들의 여러 감정 속에서 유일하게 제 빛을 바라지 않는 기특한 녀석이기도 했다.
그럼 세번째 질문.
"그럼 여기에 왜 온 거야?"
"이러는 거 안 되는 거 알지만..."
나랑 데이트 할래? 유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나랑 데이트 할래?
얄궂게도 세하는 유리의 그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족관에 가고 싶어, 아 빵집에도 가고! 마지막은 한강 노을을 구경하면서...!
앞서 가고 있는 유리는 아주 신이 난 얼굴이다. 그 모습은 검은 용의 비늘로 만든 듯한 갑주와 창백한 백발에 자안이 아니었다. 예전의, 위상력이 각성된 직후의 서유리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따스한 푸른색 눈동자에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데이트를 한다고는 했지만 그 튀는 차림새는 어떡할거야? 라며 세하가 묻자, 유리는 간단하게 영장 조절로 '예전 자신의 모습' 을 투영했다. 세하는 임무 중에만 수트를 입기 때문에 현재 차림새는 당연히 사복 차림이다. 그러나 수술의 영향으로 인해 변해버린 머리색과 눈동자 색은 확실히 튀는 요소였다. 그런 세하를 유심히 보던 유리는 손짓 한번으로 세하도 예전의, 유리가 가장 친숙한 고동색 머리와 고동색 눈동자로 바꾸어 주었다. 이렇게까지 하니 정말 그 시간으로 돌아간 거 같았다. 눈앞에 있는 불확실한 미래에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따스함만은 내리쬐던 그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그 때로 돌아갈 순 없겠지...괜한 넋두리다.
첫 코스는 수족관. 갑자기 왠 수족관? 질문만 계속 하는 세하가 귀찮을 법도 한데 유리는 다 대답해주었다.
"그 곳은 바다가 없어. 푸른 하늘도 없고. 늘 잿빛이야."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잠자코 있었다. 유리는 모든 수조를 다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특히 돌고래가 있는 수조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
"예전에 기억 나? 세하랑 수족관 처음 왔을 때..."
그런 적이 있던가? 또, 잊어지는 기억 속에 있던 모양이다. 세하가 모르겠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때 돌고래쇼를 보는데 우리 맨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물보라에 옷이 흠뻑 젖었잖아."
"..."
"게다가 그 날 소나기도 장난 아니게 내렸고. 결국 우리 둘, 며칠 후 감기 몸살 걸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좋은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다소의 무리감이 있다. 유리는 왜 하필 그런 일을 회상하는 걸까. 유리는 씁쓸히,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런 거 하나도 느낄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
인간이 아니니까. 그건 세하도 마찬가지라 숙연해졌다.
나가는 길에 기념품점에서 돌고래 모양 열쇠고리를 샀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열쇠고리 중에서도 유리는 굳이 회색 돌고래를 선택했다. 지금의 나랑 가장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잿빛뿐이라는 유리의 말이 상기되었다.
세하의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길을 걸어가면서도 계속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렸다.
"마음에 들어?"
"응."
천진난만하게, 그 시절의 유리처럼 웃었다. 왜 자꾸 쓸데없이 그 시절이 떠오르고 난데없는 비교를 하는 걸까. 자꾸만 유리와 유리가 겹쳐보인다. 세하는 자신의 이런 속좁음이 미웠다.
유리가 그 때 용의 위광을 안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자신이랑 지금 걷고 있을 수조차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옛날은 옛날이다. 그리고 변한 건 유리뿐만이 아니다. 세하 자신도 변했다. 어쩌면 지금 유리도 현재의 세하에게 실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 의지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저지른거야...!!
이런 게 과연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없다. 세하는 그 면죄부를 과감하게 찢어발겼다.
빵집에 도착한 유리는 심플하게 케이크를 시켰다. 뭐 먹을거냐는 세하의 질문에 유리는 한쪽 구석에 있는 생크림 케이크를 보며 '케이크...' 라고 조심스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 뿐, 마실 것조차 시키지 않았다. 세하 자신도 영 입맛이 없어서 케이크만 시켰다.
더도 말고 딱 케이크 한 조각이다. 과일 등도 그렇게 많지 않은, 온전체였을 생크림 케이크 부분 중에서 가장 부실한 부분. 하지만 유리는 정말 맛나게 먹었다. 그걸 바라보자니 또 유리가 겹쳐보이기 시작해서 세하는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정말 케이크면 돼?"
"응."
"..."
"사실 그닥 배고프지도 않아..."
이게 최선이다. 포크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리 저리 걷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될 때쯤 한강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석양이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있노라니 유리가 대뜸 말을 꺼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아직 다 안 끝난 걸, 뭘..."
"아, 그러네."
데이트 목록(?)에 노을 보기, 라는 항목이 제일 마지막에 있었으니까.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
강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답지않게 눅눅한 바람이다.
침묵이 계속 되던 와중에 오늘 하루종일 대답만 하던 유리가 질문을 하나 했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임시로 허문 이 '벽' 이 다시 견고해질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까지만이라도 같이 이리 있으면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긍정적인 세하의 반응에 비해 질문은 음습하고 자조적이었다.
"나 '이렇게' 된 거 밉지?"
"..."
'이렇게' 라니. 이토록 참담할 수가 없다. 재차 유리가 묻는다.
"지금도 미워해?"
그때 더미에서 재회한 이후부터 지금 옆에 같이 앉아있는 그 시간대 동안...
넌 날 미워했어? 지금도 원망해?
두 사람 사이의 벽이 점점 단단해지는 걸 세하는 느꼈다. 이제 어느 정도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도 되었다. 하지만 세하는 솔직해지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이 모습을 한 유리의 앞에서는!
하지만 가끔씩은 너무 솔직하지 않아도 된다.
"...모르겠어."
"..."
"다 잊어버리고 있으니까."
담담하다 못해 무신경하다. '그런 거' , 모르겠어. 감정이 잊어버리는 중이니까...
"물론 자의는 아니지만."
정말 훌륭한 변명이었다.
사람들이 꽃을 보면 으레 하는 꽃잎을 뜯는 장난을 치듯, 누군가에게서 어떤 것들을 하나둘씩 뺏기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화가 나게도 익숙해졌다. 심지어 그 꽃 장난을 치는 손이 '누군가' 인지 아님 '자기 자신' 인지조차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꽃잎점이나 장난으로 인해 뜯겨져 땅에 떨구워진 꽃잎을 줍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세하의 함축된 소감에 비해 유리의 소감은 장황하기까지 했다.
"난 말이야,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너무 기뻤어."
"...나도."
세하도 그 부분은 동감했다. 그러나 그 뒤는 아니었다.
"그리고 원망하고 싶어졌어. 하지만 뭘 구체적으로 원망해야하는지 갈피를 잘 모르겠더라고. 그 때였지. '네' 가 눈앞에 있었어."
그 다음은 뻔한 이야기다.
"그럼 날 원망했어?"
"솔직히 말하면 증오도 했어."
-다음 번에 만나면 우린 적이야.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일방적인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세하는 솔직하게 다시 물었다.
"지금도?"
"..."
유리는 옅게 웃을 뿐이다. 사실 이런 수줍은 감정을 가까스로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용은 언제나 위대하고 위대한 존재였다. 사사로움에 얽히지 말라, 위광은 늘 그리 말한다.
유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해는 이미 져버린지 오래다.
"오늘 내 변덕에 응해줘서 고마웠어. 열쇠고리도 고마웠고. 이제, 가야할 시간이네."
속을 털어놓은 거치고 뭔가 개운치 않는 목소리다. 몇 걸음 걷던 유리는 별안간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분명 달라졌는데..."
"..."
"아직 받아들이질 못 하는 거 같아. 자꾸, 네 예전 모습만 찾으려고 해."
"..."
"사실 이 모든 게 꿈, 악몽이었으면 해. 그러면 깨어나면 모든 게 다 그대로일텐데. 너도, 나도...!"
절규였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소망. 시계는 뒤로 가는 법이 없다.
나도. 이번만큼은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헤어질 것이 분명한데도 잘 가, 라는 인사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 몇 걸음을 걸은 사이에 유리는, 차원종의 군단장의 모습으로 다시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 꿈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네. 정말로 꿈이라면 말이야. 방금 전까지 그런 말을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오늘의 아침에서처럼, 짧지만 예의바르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어..."
그 다음이 이런 형태의 만남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차원의 균열이 닫히고서 유니온 쪽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S급 차원종의 근처에 있었던 거 같은데 무사하냐는 내용이었다. 다시 세하는 세하만의 일상으로 복귀를 했다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괜찮습니다."
모든 게 다 생략된 보고를 하고 세하는 통신을 끊었다. 이제 꿈은 깨어나고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이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