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는 위상력과 함께 11화

검은코트의사내 2017-10-17 0

이세계에서 맞이하는 둘째 날 아침, 기지개를 펴고 일어난다.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게임기를 켜지도 않고 푹 잤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밤새 게임을 하면서 잠을 별로 못자는 게 맞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력으로 배터리를 채울 수 있는 건가? 그거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약간의 전류마법이라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하다. 과학은 싫어했지만 배터리를 충전하는 건 콘센트 뽑고 하는 건 수도 없이 봐왔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게임기라... 여기 이세계에서 오프라인 게임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하기가 좀 그렇다. 다들 이상하게 쳐다볼테고 게임하는 데 집중이 안 될 게 뻔하니까 말이다.


"새야야. 길드에서 사람이 왔어."


내 이름이 세하에서 새야로 바뀌여버렸다. 이제는 뭐 익숙하니까 아무렇지도 않는다. 알려줘도 못알아먹는데 어쩌겠는가? 그냥 내가 양보하는 게 낫지. 아무튼 간에 길드에서 사람이 왔다니, 혹시 내 의뢰를 받고 와준 사람인가 싶어서 밖으로 나가보자 처음보는 복장을 한 늙은 학자가 헐렁한 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녕하세요. 혹시 제 의뢰를 들어주시러 오신 분이신가요?"

"오오, 젊은이, 말은 할 줄 아는데 글을 쓸 줄 모른다고 했나?"

"네. 기초부터 잘 모르거든요."

"알겠네. 그럼 내가 친히 가르쳐주겠네."


사실 이런 의뢰는 이름난 모험가들은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귀찮은 거고 차라리 그 시간에 몬스터 토벌 의뢰나 하나 실행하는 게 맞다고 그런 생각을 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런 할아버지가 오지. 글이라는 건 여기 왕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르칠 수 있었다. 이런 쉬운 의뢰는 초심자인 모험가들도 가르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안왔다는 건 아마 이번 의뢰를 대부분 안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새야야. 식사부터 하고 해."

"네. 미카 누나. 저기, 어르신. 우선 아침 식사부터하세요. 돈은 제가 낼게요."

"괜찮네. 나는 이미 식사를 하고 왔네. 방 안에서 기다리겠네."

"네. 그럼. 이쪽으로."


나는 그분을 방 안에 정중히 모신 다음에 아침식사에 들어갔다. 에르제와 린제는 아침일찍 길드로 갔다고 누나가 말해줬다. 아마 등록하고 설명을 들으러 갔겠지. 그들이야 알아서 잘 할 테니 나는 내 할일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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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뒤에 나는 어르신에게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기초글자, 한글로 따지면 자음과 모음, 이런 거 부터 하나씩 배운다. 글은 쓰지 못해도 말은 알아듣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나는 그 어르신이 내신 한글 발음으로 전부 옮겨적고 있었다.


"그게 뭔가? 신기한 글자로구만."

"아, 제가 사는 나라에서 배운 글자입니다."

"오오, 내 나이 80이 넘어서 살았는데 내가 모르는 언어가 있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구만. 나중에 내게도 가르쳐주겠나?"

"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어르신은 언어학자라고 했다. 여기 왕국 언어뿐만 아니라 고대 언어들을 연구하신 분이라고 하셨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한글을 배웠지만 동시에 영어도 배웠다. 왜 영어를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세계 공용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배울 이유가 있었을까? 그래도 과학보다는 나았기에 영어 수준은 중간정도에 그쳤었다.

언어 배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글자는 틀려도 발음은 내가 하는 한글발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 글자만 다 외운다면 나는 글을 읽는 것은 충분했다. 왜 아무도 안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수준높은 모험가가 할 리가 없지. 어르신은 이 글자들만 발음을 잘 한다면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하셨다.


"정말 신기하구만. 젊은이. 이런 글자를 이제 나도 알려주겠나?"

"발음은 똑같습니다. 어르신이 가르쳐주신 데로 이대로 발음하시면 됩니다."

"오호, 그렇구만."


내가 예시로 달걀이라는 단어를 한글로 쓰고, 여기에서 쓰는 글자를 그대로 번역했다. 그러자 어르신도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호. 자네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군. 그러고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구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 소식은 이미 듣고 있었네. 몬스터 연합군을 전멸시킨 장본인이라지?"


어르신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드 총수나 기사단들에게 부탁을 해서 내가 쓰러뜨렸다는 일은 비밀로 하라고 부탁했는데 말이다. 혹시 세상을 오래 사신 경험으로 그들의 거짓말을 간파한 걸까? 하긴,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기사들이라도 몬스터 연합군을 상대로 희생을 피할 수가 없는데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기사단이 총수님을 호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나는 모르시 데롤드네. 과거에는 나도 잘 나가는 모험가였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이제 수준높은 의뢰는 못하는 신세야. 그리고 내 삶도 얼마 남지도 않았지. 쿨럭... 쿨럭..."

"저기, 어르신. 괜찮으세요?"

"아, 괜찮다네. 원래 사람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니까.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지. 날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도 갔고, 내 형님과 누나, 그리고 동생도 갔으니 이제 내 자식들을 남겨둔 채로 떠날 때가 되었지."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것도 과로사로 말이다. 적어도 이 어르신 처럼 오래 사셨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김기태 요원, 그 분은 비록 죄를 저질렀지만 데이비드의 배신을 통해 그가 얼마나 불쌍한 녀석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결국 그자도 데이비드의 희생양이나 된 것이었다. 적어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만약 내가 그 사람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를 배신한 데이비드도 사실 총본부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총본부에서 시작되었다. 그 외에 칼바크 턱스도 있었지만 그들이 죽고 난 뒤에는 단 한번도 개운해한 적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프게 느껴졌다. 왜 일까? 그들은 죄를 짓고 대가를 받은 건데 왜 내 마음은 슬펐던 걸까? 그 때마다 아버지는 어렸던 나에게 이렇게 말하셨었다. '내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고 확신했다. 확실히 증오에 가득찬 삶을 살았다면 김기태나 데이비드, 칼바크 턱스처럼 안 좋은 결말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분노하지않으면 싸울 수도 없다. 그 분노의 대상은... 바로 자신에게 향하도록 해야된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약하고 싸우는 걸 망설이려던 내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싸운다고 생각하니 싸우고 나서도, 싸우기 전에도 적을 증오하는 일이 없었다. 애쉬와 더스트가 당시에 표정이 일그러진 게 떠올랐다. 나더러 역겹다고 말이다. 내 엄마와 같은 눈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혹시 우리 엄마도 이런 시련을 이겨내게 된 이유가 바로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애쉬와 더스트가 골치아파했던 민간인이라면서 말이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그들은, 위상능력자가 아닌 평범한 민간인에게 당하는 것은 수치로 알고 그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었다. 하나가 되어버린 더스트에게 물어본 적 있다. 우리 아버지를 아냐고... 그러자 약간 동요하는 눈치가 보였었다. 얼마나 험하게 당했으면 그렇게 질색인 표정을 지었던 걸까? 그들이 곤란해

하는 표정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곤 했었다.


"자네는 내가 봤을 때는 큰 인물이 될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군. 그리고... 이런 기운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네."

"기운이라고요?"

"바로 신의 기운이지. 잘못 느낀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만 자네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되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 쿨럭! 쿨럭!!"

"저기, 괜찮으세요? 의원을 찾으시는 게..."

"괜찮네. 내 병은 내가 잘 아네. 죽기전에 그래도 큰 인물이 될 사람을 만나니 다행이로구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전 아직 어르신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어르신이야말로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듯 했다. 내가 큰 인물이라니... 말이 안 된다. 나는 어디까지나 신에게 은혜를 받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물론 위상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것과 신에게서 받은 힘을 빼면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모험가도 막 시작한 풋내기에 불과하고 말이다. 나는 나가서 미카 누나에게 의원님을 불러달라고 말하자 미카 누나도 사정을 알고 급히 어딘가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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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의 말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불치병을 앓고 계셨다고 했다. 그건 즉,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 길드 총수님은 한 때 이분이 베테랑 모험가로써 활동해온 사람이라고 하셨다. 지금은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로 일하면서 모험가 의뢰를 간단한 걸로 수행중이라고 들었다.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시고 은퇴를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길드 총수님도 의료소에 찾아와 누워있는 어르신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총수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어려운 의뢰들을 해결하신 어르신을 존경했어. 그 당시에 어르신이 젊었을 때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나이가 드셨으니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은퇴하시라고 내가 말을 하기도 했었네만 끝까지 모험가는 그만둘 수 없다고 하셨다네."


총수님의 말을 듣고 나는 어르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모험가를 계속하고 나서 살아왔던 사실,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신 분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못가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원의 말에 나는 가시는 곳까지 남아서 어르신 곁을 지키기로 다짐하고, 지금은 주름이 잡힐 데로 잡힌 손을 잡으면서 온기를 느꼈다. 그러자 어르신이 두 눈을 뜨면서 나와 총수님을 보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마지막... 의뢰를 마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어르신!!"


우리 두 사람은 팔이 추욱 늘어진 채로 눈을 감은 어르신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분은 하고싶은 것을 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나도, 이런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마지막에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고 죽는다. 그게 바로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

To Be Continued......

2024-10-24 23:17:2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