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 암광]마리오네트
이세계고딩깽판걸 2017-04-27 0
유니온 임시본부까지 안 가면 이해 못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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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시작된 이래 유례없을 정도의 폐륜적 사태에 대해 느꼈던 분노나 절망은 사태가 진전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잦아들어 가야 할 길을 비추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되기 마련이나, 인간의 감정에 한해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세간의 비관적 인식이 이번에는 통용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의 올곧음이나 정의감을 드는 것은 올바르지 못 하다.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선순위가 틀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세하는 어찌보면 더이상 게임에 천착할 필요가 없고 더이상 천착하지도 않는다. 그저 타성일 뿐. 하지만 애초의 인정욕구를 잊게 만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에는 반대급부가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티나의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촉발된 감정 소요에는 조금 특이한 면이 있는 듯 하다.
"네가 테러리스트가 된다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이세하는 망연히 티나를 쳐다보다가, 허탈한 듯이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고는 말했다.
"그래 당신이 뭘 알겠어. 인간 행세를 하고 있어 봐야 로봇일 뿐이겠지."
티나는 눈썹을 꿈틀거리고 총을 고쳐쥐었다.
"뭐라고 했나?"
이세하는 울음을 터뜨리려는 건지 화를 내려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딱딱하게 굳어있는 티나의 것과는 대조적인 생생한 표정이었다. 건블레이드와 총구가 불을 뿜으려는 찰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하!"
"티나님!"
레비아는 티나에게 매달렸고, 이슬비는 이세하의 한 팔을 잡아챘다. 총구는 반강제로 내리게됐지만 여전히 이세하를 노려보고 있는 티나와 달리, 이세하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바꿨다. 이세하는 슬비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너도 그래? 내가 테러리스트가 될 것 같고, 그러면 날 죽이기라도 할 거야?"
"뭐? 그게 무슨..."
당황한 기색으로 세하를 올려다보던 슬비는 곧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티나씨, 세하한테 무슨 말씀을 하신 건가요?"
가만히 이세하를 노려보고있는 티나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레비아가 반응을 보였다. 온순해 보이는 표정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난처함을 담아 티나와 이세하를 번갈아 보던 레비아는 곧이어 이슬비와 이세하를 향해 죄송하다며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이슬비는 감정이 더 격화되기 전에 상황을 일단락시킬 필요를 느꼈고, 이세하를 어르고 달래다시피 하여 끌고 검은양측 막사로 돌아갔다.
"저... 티나님...."
"왜 그러나?"
레비아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저는... 세하님이 테러리스트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자신감에 찬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끝이 기어들어가진 않았다. 레비아가 티나에게 하는 말에 있어 이 정도면 나름 소신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까지의 이세하의 모습을 본다면 가능성이 낮지 않다고 생각된다."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본 세하님은 그럴 분 같지 않아요..."
티나는 잠깐 말없이 레비아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리고는 돌아가자며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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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개의 다른 팀원들이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티나는 이세하와의 마찰을 트레이너에게 보고했다.
"알겠다. 검은양 측과는 내가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너도 검은양 요원과의 불필요한 마찰은 삼가도록."
티나는 이세하 요원이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말하면서 덧붙였다. "그렇다면 경고할 필요가 있지 않나?"
"흠.. 네가 그렇게 판단한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 어머니인 알파퀸을 생각해 보면, 그가 그럴 인물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티나가 다시 불가해함을 말하려는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의 비속어가 끼어들었다.
"**하네. 그 놈은 그 놈이고 그 놈 엄마는 엄마지. 그럼 그 ** 찌질한 것도 유전이게?"
티나와 트레이너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는 그 무례한 인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어찌보면 그 무례한 말에도 불가해함에 대한 불만이 내재돼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일까, 티나가 나타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트레이너의 시선에 있는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이 섞여있었다. 트레이너가 짜증을 섞어 말했다.
"나타. 넌 모르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나타는 짜증을 내며 말을 잘랐다.
"아 그 놈 엄마랑 그 놈이 같냐고! 그래! 그 엄마가 저 꼴이 났네! 그래서 저렇게 찌질대는 거지. 나라면 이 깡통을 포함해서 전부 썰어버렸을테지만."
"...입조심해라, 나타."
트레이너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나타는 그 특유의 비열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티나는 약간의 기대와 함께 이들의 언제나와 같이 영양가 없는 다툼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래서 평소와 달리 나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나타의 발언과 그 영향을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나타는 티나를 흘긋 보고는 뭔가 깨달았다는듯이 말했다.
"아 보아하니 꼰대 니가 이 깡통을 감싸고 도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구만?"
티나는 미간이 꿈틀했지만 트레이너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타. 티나도 늑대개의 일원으로서 너와 똑같이 작전을 뛰었다. 너도 모르지는 않을텐데."
"웃기고 있네! 그 **랑 싸운 게 나였으면 니가 이정도로 끝냈을 것 같아?"
"니가 항상 그 모양이니까 잘못이 가중되는 거다, 나타."
트레이너와 나타가 으레 있던 것처럼 다투는 동안 티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트레이너는 그 부모를 보고 이세하에 대해 판단했고, 나타는 그게 잘못된 것이라 말했다. 다시 트레이너가 그 부모에 대해 말하려 할 때 나타는 재차 부정하면서 갑자기 내 얘기를 꺼냈지. 그렇다면...' "나타, 너는 트레이너가 교관때문에 날 감싼다고 생각하는 건가?"
둘의 다툼이 멈추고 잠깐의 정적이 찾아온 후 트레이너는 당황했고 나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티나! 그게 무슨..."
"교관? 몰라. 그게 뭔데?"
"교관은 내 머리 속에 있는 위상력을 발생시키는 두뇌의 주인이다. 현재 내 명령권자이다."
나타는 아 그거 말인가 하고 키득 거리다가 말했다.
"그래! 원래 그 몸뚱아리를 갖고 있었던 년 말이야! 그게 아니면 엄마랑 자식도 헷갈리는 꼰대가 너를 왜 그렇게 감싸고 돌겠...."
"나타! 입 다물어라!"
트레이너가 소리치자 나타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얼결에 입을 닫아버린 자신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더니 재미없어졌다며 자리를 떴다. 다시 잠깐의 정적.
"티나, 방금 나타의 말은..."
"트레이너."
"....왜 그러나."
트레이너가 말하려던 뭔가를 자르고 티나는 트레이너를 호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너에게 교관은 어떤 사람이었지?"
과거형으로 물었던 것은 티나에게 나타가 말했던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트레이너는 말했다.
"그는 내 첫훈련병이자.... 너의 명령권자다."
물론 트레이너가 과거형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는 별 의미가 없었고, 혹 트레이너 본인도 모를 무의식적 함의가 있었다고 한들 티나는 그런 미묘한 표현 차이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민감하지 않았다. 다만, 티나 또한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갖는 존재인 만큼 사람의 표정과 눈빛이 담고 있는 감정 정도는 알 수 있다. 트레이너는 트레이너대로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고, 그래서 티나는 그가 교관에 대해 말할 때 짓는 표정과 그 시선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티나는 트레이너가 교관과 티나에게 품는 감정은 논리적으로 별개의 것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타의 말이 거슬렸다. 일부나마 교관의 두뇌를 갖고 있고 교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트레이너에게 교관과 별개의 존재일 수 있을까.
"...지시를 하달받은 구역의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처리했다. 달리 지시할 게 없다면 동체를 냉각시키고 싶군."
티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이상하게 '안드로이드'라는 단어가 입에 걸렸다. 트레이너도 그로부터 어색함을 느꼈고 뭔가 더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 남자는 그런 것에 서툴렀다.
"알겠다. 대기하고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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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가 자신의 냉장고로 돌아왔을 때 먼저 작전을 끝내고 돌아와있던 하피가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고 있었다.
"하피? 뭘 하고 있는 거지."
하피는 잠깐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그 의도가 뚜렷한 윙크 한 번 하고는 꺼낸 술을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티나는 트레이너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을 유사시 팀을 이끌게 할 것이란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티나는 냉장고에 들어가기 전 하피에게도 이전의 일을 얘기해 보기로 했다,
"음... 그러니까 이세하군이 테러리스트가 되려는 건지 교관인 건지 모르겠다는 건가요?"
이 어딘가 많이 꼬인 결론을 듣고 티나는 트레이너가 잘못된 평가를 내린 건 아닌가 잠깐 의심했다.
"당신은 어느 쪽이길 바라죠?"
티나는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질문에 대답했다.
"교관이 아니길 바란다."
"세하군이요?"
아마 처음에 티나가 대답한 것은 세하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또한 다음 대답도 세하에 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쪽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티나는 이쯤돼서야 문답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떤 질문에 대답한건지 잠깐 혼란스러워하다가 그 혼란을 그대로 담아 말했다.
"잘 모르겠다..."
하피는 흠- 흐음- 하는 이상한 콧소리를 내며 술잔을 가불거렸다.
"인간은 그럴 때 술을 마시지요."
"올바른 판단력을 요하는 상황에 이성을 좀먹는 액체를 마시는 이유가 뭔가? 이해할 수 없다."
"음, 왜 그런지가 중요할까요? 이해할 수 없다니 아쉽군요."
하피는 잔을 마저 비우고는 테이블에 길게 엎드려서 자기 시작했다. 티나는 자신도 술을 마실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남은 술을 조금 입에 대봤지만 쓰기만 할 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티나가 인간은 이걸 마시면서 뭘 느끼는 걸까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 하피가 잠꼬대를 웅얼거렸다.
"솔직해질 수 있는데... 음..."
솔직함. 티나에겐 그 말이 낯설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것에 지금 하피가 말한 것과 같은 별다른 특별함을 느끼진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어떤 미덕이나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숨긴다는 것에 전략적인 판단 외에 다른 게 있다는 뜻일까.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티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난 어느 쪽이길 바라는 게 아니다.'
주어라고 생각되는 것을 넣어 떠올려본 이 말에는 분명한 중의성이 있었고, 티나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티나는 분명 세하가 테러리스트가 되길 바란 것도 교관이길 바란 것도 아니다.
'난 교관이 아니길 바란다.'
내가... 티나는 문득 지타워에서 자신에게도 기계 외의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다며 씁쓸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관이 아닌, 자신에게. 티나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명령권도 클로져가 클로져일 수 있게 해주는 위상력도 교관에게 있음을 감안해 보면 그 자신은 정말 교관의 흔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티나는 솔직함이 미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직접 체험하면서도 자각하지 못 한채 냉장고에 들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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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졸린 것처럼 보이는 눈을 하고 있는 티나가 냉장고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이고 있는 모습은 잠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 티나와 같이 냉각이 필요한 안드로이드, 아니 냉각이 필요한 유일한 안드로이드인 티나에게 있어서 냉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수면과 어떤 공통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고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수 있다. 가령 '티나가 방열을 시작하기 전에 느끼는 열기는 인간이 졸릴 때 느끼는 피로와 비슷할까?'라거나 '티나가 냉장고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낄 서늘함은 인간이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느끼는 상쾌함과 어떻게 다를까?' 같은 질문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티나도 꿈을 꿀까?'하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질문에는 티나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농담같은 질문들의 최종 해답인 티나가 눈을 떴지만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진 않았다. 티나는 냉각하는 동안 꾼 꿈이 대체 뭔지, 아니 꿈을 꾸긴 했는지 고민하는 것보단 언제나처럼 곧장 냉장고 문을 열고 나가는 쪽을 택했다.
"아 티나, 마침 잘 왔다. 곧장 지시를 하달하겠다."
티나가 냉각이 끝나자마자 의례적으로-현 정세를 보자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트레이너를 찾아가자 트레이너는 곧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트레이너는 현장의 상황과 구체적인 임무 내용을 말해주고 언제나처럼 유사시 행동 강령을 숙지시켰다.
"그리고 이건 검은양 측의 요청인데..."
트레이너는 주저하듯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김유정 부국장이 현 상황을 고려해서 징계나 처벌을 요구하진 않겠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바란다고 해왔다. 사과를 하고 끝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티나, 사과할 마음은 있나?"
티나는 보통 사람이라면 즉답이라고 생각할만큼 짧게 고민하고 말했다.
"이해가지 않지만 그것이 합리적이니 그렇게 하겠다."
티나도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교관도 사과하라는군.... 어쨌든 알겠다. 작전이 끝나면 사과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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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란 의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런 도구 중에서도 가장 그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있는 것은 무기, 그 중에서도 총이라고 하면 적지 않은 사람의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화약을 채워 폭발하면서 어딘가로 향해 빠르게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총알이나 그런 총알이 좀 더 올곧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나선이 선연히 새겨진 총열 등은 이것의 목표가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손잡이부터 방아쇠, 가늠쇠나 가늠자와 같은 기계식 조준기 등 인체에 적합한 디자인은 그 사용자가 인간임을 짐작케 한다. 혹자는 어차피 모든 도구의 사용자는 대부분 인간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티나를 보면 알 수 있듯, 모든 도구의 사용자가 반드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지만 티나보다 잘 쓰는 인간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차라리 티나 그 자체가
"한 자루의 총과 같군."
티나가 언젠가 한 번 쯤 들어 본 적 있는 소년의 목소리. 티나는 반사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들고 있던 대물저격총의 굉음과 함께 그 방향에 있던 안드로이드가 관통되며 부서졌다.
"아니지! 한 자루의 총에 '불과하다'고 해야지!"
티나는 대물저격총을 내팽개치듯 허수공간에 넣어두고 권총을 꺼내면서 활기찬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겨냥했다. 무언가 타다가 마침내 완전히 까맣게 돼버리기 직전의 암적색, 타고 남은 것들과 타다 남은 것들이 부대껴 흩날리는 풍경, 그 속에 애쉬와 더스트가 서있었다. 유사시의 행동 강령대로 트레이너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무전이 연결되지 않았다. 애쉬와 더스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너희 연락 채널을 침범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너희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어차피 누굴 불러봤자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테지만."
눈 앞에 있는 것이 분신이라면 적어도 큐브에서 상대했던 것보다는 공들여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강하다. 내 힘으론 이길 수 없어.'
당연한 수순으로 도주할 방편을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티나에게만 당연할 수순인 자폭이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했다.
"아 너무 걱정하진 마. 우린 널 죽이러 온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목적이 뭐지?"
더스트 곧장 홍소할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주인 없는 인형인 너를 내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서지!"
곧 터질 것 같았던 웃음이 결국 터졌다. 더스트는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는 티나에 아랑곳않고 한참을 깔깔댔다. 티나가 겨누고 있던 총끝이 흔들렸다.
"....더이상의 모욕은 용납하지 않겠다."
더스트는 과장된 몸짓으로 배례하며 대답했다.
"모욕이라니! 미안해, 사과할게! 근데 너한테 해야할지, '그 두뇌'한테 해야할지 모르겠는걸?"
티나는 충동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애쉬와 더스트가 더 빨랐다. 권총에 장전된 탄약이 모두 터져나가며 순식간에 티나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비명과 신음을 삼키며 왼손으로 수류탄을 빼들려 하자, 애쉬가 여유 작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왼쪽도 날아가고 싶은 거라면... 아 그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걸 터뜨리면 넌 죽어."
"죽음은... 두렵지 않다..."
애쉬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오? 그렇다면 네가 두려워하는 게 뭐지?"
"클로저가.... 되지 못 하는 것."
이에 더스트가 홍소하며 뱉은 말은 죽음을 결심하던 티나를 멈칫하게 했다.
"꺄하하하하하! 바보 아냐? 클로저는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거야!"
애쉬도 거들듯이 말했다.
"네가 쓰는 무기가 망가진다고 네가 슬퍼하진 않지."
티나의 표정에 고통 외의 다른 것이 섞였다. 애쉬는 피식 웃고는 여전히 홍소하는 더스트를 대신하듯 말했다.
"너희 세계의 문학에는 재미있는 게 많더군. 널 보고 있자니 '주석병정'이란 동화가 떠올라. 다리가 하나 없는 채로 태어난 결함품인, 주석으로 만들어진 병정 인형이 다리가 없는 무희 인형을 남몰래 사랑하는 와중에 여러가지 시련을 만난 끝에 돌아오지만, 어린 인간의 손에 벽난로에 쳐박혀 녹아버리고 하트 모양의 주석 덩어리만 남아버리지. 그 무희도 벽난로에 떨어지지만 순식간에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더스트는 그 사이에 웃음을 진정시키고 한껏 목을 돋우더니 과장된 몸짓을 섞으며 말했다.
"인형아, 인형아, 용감한 '주석병정'아. 넌 대체 누굴 위해 무얼 견디려 하니? 그래 봤자 너한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텐데! 티나는 도중부터 더스트의 재잘거림을 듣지 않고 생각 속에 침잠했다. 사실 부상이 심각해서 대화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다. 몽롱해지는 와중에 생각했다. 살육의 업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 업이 중단되고 마침내 클로저로서의 정의감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던 그 곳에 '티나'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영혼을 원천으로 하는 사람 같은 도덕 감정이나 클로저로서의 정체성이 되는 위상력은 말할 것도 없고 팀 내에서 마저 '교관'이 아닌 '티나'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니 티나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인간 행세를 하고 있어 봐야 로봇일 뿐"이었나...
티나의 눈이 완전히 감기려던 때, 더스트가 쓰러져 있는 티나의 머리채를 잡아올려 억지로 눈을 맞췄다. 티나가 힘겹게 초점을 맞추자 더스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줄게."
티나는 몸에 들어오는 힘을 느꼈다. 그 자신의 발로 섰다. 온전한 육체를 갖게 된 무언가를 향해 애쉬가 말했다.
"누구도 감히 너를 '인형'이라고 부르지 않게 될 거야."
티나는 주체할 수 없는 유쾌함을 느꼈다. 그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그 자신의 감정을 갖게 된 그 무언가를 향해 더스트가 활기차게 말했다.
"인간이 되는 방법은 간단해!"
"정말 정말? 어떻게?"
티나는 재잘대듯 빠르게 말하고는 한참을 까르륵거렸다.
"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기억하지? 인간들은 너로 뭘 했지?"
"저요 저요! 인간을 죽였어!"
더스트는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똑똑하구나! 여기 돌아다니는 인간이 만든 인형들도 인간을 죽이기 위함이잖아. 인간처럼 행동하면 언젠가 너도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럼 인간은 뭘하는 동물일까?"
"저요! 인간을 죽이는 동물이요!"
푸핫! 구경하던 애쉬가 웃음을 터뜨리며 끼어들었다.
"그거 이상한데? 우리한테 힘을 받고 만들어져서 우리 말에 따라 인간을 죽이면 계속 인형인 거 아닌가?"
더스트가 과장되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애쉬의 핀잔에 답했다.
"뭘 모르시는군! 티나는 이제 마법의 힘을 받고 새로 '태어난' 마법소녀야! '직접' 마법의 힘으로 인간들을 학살하는 거지!"
애쉬는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악령으로 '제조'되어 처리부대의 '개'와 '그 두뇌'의 클로저를 거쳐 이제는 얼토당토 않은 마법소녀라... 애쉬는 짧막한 감상평을 남겼다.
"주석병정이 아니라 마리오네트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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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더남매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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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시작된 이래 유례없을 정도의 폐륜적 사태에 대해 느꼈던 분노나 절망은 사태가 진전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잦아들어 가야 할 길을 비추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화되기 마련이나, 인간의 감정에 한해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세간의 비관적 인식이 이번에는 통용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의 올곧음이나 정의감을 드는 것은 올바르지 못 하다.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선순위가 틀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세하는 어찌보면 더이상 게임에 천착할 필요가 없고 더이상 천착하지도 않는다. 그저 타성일 뿐. 하지만 애초의 인정욕구를 잊게 만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에는 반대급부가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티나의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촉발된 감정 소요에는 조금 특이한 면이 있는 듯 하다.
"네가 테러리스트가 된다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이세하는 망연히 티나를 쳐다보다가, 허탈한 듯이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고는 말했다.
"그래 당신이 뭘 알겠어. 인간 행세를 하고 있어 봐야 로봇일 뿐이겠지."
티나는 눈썹을 꿈틀거리고 총을 고쳐쥐었다.
"뭐라고 했나?"
이세하는 울음을 터뜨리려는 건지 화를 내려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딱딱하게 굳어있는 티나의 것과는 대조적인 생생한 표정이었다. 건블레이드와 총구가 불을 뿜으려는 찰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하!"
"티나님!"
레비아는 티나에게 매달렸고, 이슬비는 이세하의 한 팔을 잡아챘다. 총구는 반강제로 내리게됐지만 여전히 이세하를 노려보고 있는 티나와 달리, 이세하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바꿨다. 이세하는 슬비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너도 그래? 내가 테러리스트가 될 것 같고, 그러면 날 죽이기라도 할 거야?"
"뭐? 그게 무슨..."
당황한 기색으로 세하를 올려다보던 슬비는 곧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티나씨, 세하한테 무슨 말씀을 하신 건가요?"
가만히 이세하를 노려보고있는 티나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레비아가 반응을 보였다. 온순해 보이는 표정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난처함을 담아 티나와 이세하를 번갈아 보던 레비아는 곧이어 이슬비와 이세하를 향해 죄송하다며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이슬비는 감정이 더 격화되기 전에 상황을 일단락시킬 필요를 느꼈고, 이세하를 어르고 달래다시피 하여 끌고 검은양측 막사로 돌아갔다.
"저... 티나님...."
"왜 그러나?"
레비아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저는... 세하님이 테러리스트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자신감에 찬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끝이 기어들어가진 않았다. 레비아가 티나에게 하는 말에 있어 이 정도면 나름 소신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까지의 이세하의 모습을 본다면 가능성이 낮지 않다고 생각된다."
"잘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본 세하님은 그럴 분 같지 않아요..."
티나는 잠깐 말없이 레비아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리고는 돌아가자며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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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개의 다른 팀원들이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티나는 이세하와의 마찰을 트레이너에게 보고했다.
"알겠다. 검은양 측과는 내가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너도 검은양 요원과의 불필요한 마찰은 삼가도록."
티나는 이세하 요원이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말하면서 덧붙였다. "그렇다면 경고할 필요가 있지 않나?"
"흠.. 네가 그렇게 판단한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 어머니인 알파퀸을 생각해 보면, 그가 그럴 인물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
티나가 다시 불가해함을 말하려는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의 비속어가 끼어들었다.
"**하네. 그 놈은 그 놈이고 그 놈 엄마는 엄마지. 그럼 그 ** 찌질한 것도 유전이게?"
티나와 트레이너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는 그 무례한 인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어찌보면 그 무례한 말에도 불가해함에 대한 불만이 내재돼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일까, 티나가 나타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트레이너의 시선에 있는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이 섞여있었다. 트레이너가 짜증을 섞어 말했다.
"나타. 넌 모르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나타는 짜증을 내며 말을 잘랐다.
"아 그 놈 엄마랑 그 놈이 같냐고! 그래! 그 엄마가 저 꼴이 났네! 그래서 저렇게 찌질대는 거지. 나라면 이 깡통을 포함해서 전부 썰어버렸을테지만."
"...입조심해라, 나타."
트레이너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나타는 그 특유의 비열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티나는 약간의 기대와 함께 이들의 언제나와 같이 영양가 없는 다툼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래서 평소와 달리 나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질 나타의 발언과 그 영향을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나타는 티나를 흘긋 보고는 뭔가 깨달았다는듯이 말했다.
"아 보아하니 꼰대 니가 이 깡통을 감싸고 도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었구만?"
티나는 미간이 꿈틀했지만 트레이너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타. 티나도 늑대개의 일원으로서 너와 똑같이 작전을 뛰었다. 너도 모르지는 않을텐데."
"웃기고 있네! 그 **랑 싸운 게 나였으면 니가 이정도로 끝냈을 것 같아?"
"니가 항상 그 모양이니까 잘못이 가중되는 거다, 나타."
트레이너와 나타가 으레 있던 것처럼 다투는 동안 티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트레이너는 그 부모를 보고 이세하에 대해 판단했고, 나타는 그게 잘못된 것이라 말했다. 다시 트레이너가 그 부모에 대해 말하려 할 때 나타는 재차 부정하면서 갑자기 내 얘기를 꺼냈지. 그렇다면...' "나타, 너는 트레이너가 교관때문에 날 감싼다고 생각하는 건가?"
둘의 다툼이 멈추고 잠깐의 정적이 찾아온 후 트레이너는 당황했고 나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티나! 그게 무슨..."
"교관? 몰라. 그게 뭔데?"
"교관은 내 머리 속에 있는 위상력을 발생시키는 두뇌의 주인이다. 현재 내 명령권자이다."
나타는 아 그거 말인가 하고 키득 거리다가 말했다.
"그래! 원래 그 몸뚱아리를 갖고 있었던 년 말이야! 그게 아니면 엄마랑 자식도 헷갈리는 꼰대가 너를 왜 그렇게 감싸고 돌겠...."
"나타! 입 다물어라!"
트레이너가 소리치자 나타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얼결에 입을 닫아버린 자신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더니 재미없어졌다며 자리를 떴다. 다시 잠깐의 정적.
"티나, 방금 나타의 말은..."
"트레이너."
"....왜 그러나."
트레이너가 말하려던 뭔가를 자르고 티나는 트레이너를 호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너에게 교관은 어떤 사람이었지?"
과거형으로 물었던 것은 티나에게 나타가 말했던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트레이너는 말했다.
"그는 내 첫훈련병이자.... 너의 명령권자다."
물론 트레이너가 과거형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는 별 의미가 없었고, 혹 트레이너 본인도 모를 무의식적 함의가 있었다고 한들 티나는 그런 미묘한 표현 차이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민감하지 않았다. 다만, 티나 또한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갖는 존재인 만큼 사람의 표정과 눈빛이 담고 있는 감정 정도는 알 수 있다. 트레이너는 트레이너대로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렀고, 그래서 티나는 그가 교관에 대해 말할 때 짓는 표정과 그 시선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티나는 트레이너가 교관과 티나에게 품는 감정은 논리적으로 별개의 것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타의 말이 거슬렸다. 일부나마 교관의 두뇌를 갖고 있고 교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트레이너에게 교관과 별개의 존재일 수 있을까.
"...지시를 하달받은 구역의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처리했다. 달리 지시할 게 없다면 동체를 냉각시키고 싶군."
티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이상하게 '안드로이드'라는 단어가 입에 걸렸다. 트레이너도 그로부터 어색함을 느꼈고 뭔가 더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 남자는 그런 것에 서툴렀다.
"알겠다. 대기하고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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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가 자신의 냉장고로 돌아왔을 때 먼저 작전을 끝내고 돌아와있던 하피가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고 있었다.
"하피? 뭘 하고 있는 거지."
하피는 잠깐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그 의도가 뚜렷한 윙크 한 번 하고는 꺼낸 술을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티나는 트레이너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을 유사시 팀을 이끌게 할 것이란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티나는 냉장고에 들어가기 전 하피에게도 이전의 일을 얘기해 보기로 했다,
"음... 그러니까 이세하군이 테러리스트가 되려는 건지 교관인 건지 모르겠다는 건가요?"
이 어딘가 많이 꼬인 결론을 듣고 티나는 트레이너가 잘못된 평가를 내린 건 아닌가 잠깐 의심했다.
"당신은 어느 쪽이길 바라죠?"
티나는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질문에 대답했다.
"교관이 아니길 바란다."
"세하군이요?"
아마 처음에 티나가 대답한 것은 세하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또한 다음 대답도 세하에 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쪽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티나는 이쯤돼서야 문답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떤 질문에 대답한건지 잠깐 혼란스러워하다가 그 혼란을 그대로 담아 말했다.
"잘 모르겠다..."
하피는 흠- 흐음- 하는 이상한 콧소리를 내며 술잔을 가불거렸다.
"인간은 그럴 때 술을 마시지요."
"올바른 판단력을 요하는 상황에 이성을 좀먹는 액체를 마시는 이유가 뭔가? 이해할 수 없다."
"음, 왜 그런지가 중요할까요? 이해할 수 없다니 아쉽군요."
하피는 잔을 마저 비우고는 테이블에 길게 엎드려서 자기 시작했다. 티나는 자신도 술을 마실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남은 술을 조금 입에 대봤지만 쓰기만 할 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티나가 인간은 이걸 마시면서 뭘 느끼는 걸까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 하피가 잠꼬대를 웅얼거렸다.
"솔직해질 수 있는데... 음..."
솔직함. 티나에겐 그 말이 낯설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것에 지금 하피가 말한 것과 같은 별다른 특별함을 느끼진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어떤 미덕이나 위안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숨긴다는 것에 전략적인 판단 외에 다른 게 있다는 뜻일까.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티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난 어느 쪽이길 바라는 게 아니다.'
주어라고 생각되는 것을 넣어 떠올려본 이 말에는 분명한 중의성이 있었고, 티나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티나는 분명 세하가 테러리스트가 되길 바란 것도 교관이길 바란 것도 아니다.
'난 교관이 아니길 바란다.'
내가... 티나는 문득 지타워에서 자신에게도 기계 외의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다며 씁쓸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관이 아닌, 자신에게. 티나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명령권도 클로져가 클로져일 수 있게 해주는 위상력도 교관에게 있음을 감안해 보면 그 자신은 정말 교관의 흔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티나는 솔직함이 미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직접 체험하면서도 자각하지 못 한채 냉장고에 들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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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졸린 것처럼 보이는 눈을 하고 있는 티나가 냉장고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얼굴을 숙이고 있는 모습은 잠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 티나와 같이 냉각이 필요한 안드로이드, 아니 냉각이 필요한 유일한 안드로이드인 티나에게 있어서 냉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수면과 어떤 공통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고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수 있다. 가령 '티나가 방열을 시작하기 전에 느끼는 열기는 인간이 졸릴 때 느끼는 피로와 비슷할까?'라거나 '티나가 냉장고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낄 서늘함은 인간이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느끼는 상쾌함과 어떻게 다를까?' 같은 질문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티나도 꿈을 꿀까?'하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질문에는 티나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농담같은 질문들의 최종 해답인 티나가 눈을 떴지만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진 않았다. 티나는 냉각하는 동안 꾼 꿈이 대체 뭔지, 아니 꿈을 꾸긴 했는지 고민하는 것보단 언제나처럼 곧장 냉장고 문을 열고 나가는 쪽을 택했다.
"아 티나, 마침 잘 왔다. 곧장 지시를 하달하겠다."
티나가 냉각이 끝나자마자 의례적으로-현 정세를 보자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트레이너를 찾아가자 트레이너는 곧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트레이너는 현장의 상황과 구체적인 임무 내용을 말해주고 언제나처럼 유사시 행동 강령을 숙지시켰다.
"그리고 이건 검은양 측의 요청인데..."
트레이너는 주저하듯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김유정 부국장이 현 상황을 고려해서 징계나 처벌을 요구하진 않겠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바란다고 해왔다. 사과를 하고 끝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티나, 사과할 마음은 있나?"
티나는 보통 사람이라면 즉답이라고 생각할만큼 짧게 고민하고 말했다.
"이해가지 않지만 그것이 합리적이니 그렇게 하겠다."
티나도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교관도 사과하라는군.... 어쨌든 알겠다. 작전이 끝나면 사과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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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란 의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런 도구 중에서도 가장 그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있는 것은 무기, 그 중에서도 총이라고 하면 적지 않은 사람의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화약을 채워 폭발하면서 어딘가로 향해 빠르게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총알이나 그런 총알이 좀 더 올곧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나선이 선연히 새겨진 총열 등은 이것의 목표가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손잡이부터 방아쇠, 가늠쇠나 가늠자와 같은 기계식 조준기 등 인체에 적합한 디자인은 그 사용자가 인간임을 짐작케 한다. 혹자는 어차피 모든 도구의 사용자는 대부분 인간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티나를 보면 알 수 있듯, 모든 도구의 사용자가 반드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지만 티나보다 잘 쓰는 인간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차라리 티나 그 자체가
"한 자루의 총과 같군."
티나가 언젠가 한 번 쯤 들어 본 적 있는 소년의 목소리. 티나는 반사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들고 있던 대물저격총의 굉음과 함께 그 방향에 있던 안드로이드가 관통되며 부서졌다.
"아니지! 한 자루의 총에 '불과하다'고 해야지!"
티나는 대물저격총을 내팽개치듯 허수공간에 넣어두고 권총을 꺼내면서 활기찬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겨냥했다. 무언가 타다가 마침내 완전히 까맣게 돼버리기 직전의 암적색, 타고 남은 것들과 타다 남은 것들이 부대껴 흩날리는 풍경, 그 속에 애쉬와 더스트가 서있었다. 유사시의 행동 강령대로 트레이너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무전이 연결되지 않았다. 애쉬와 더스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이지... 너희 연락 채널을 침범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너희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어차피 누굴 불러봤자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테지만."
눈 앞에 있는 것이 분신이라면 적어도 큐브에서 상대했던 것보다는 공들여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강하다. 내 힘으론 이길 수 없어.'
당연한 수순으로 도주할 방편을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티나에게만 당연할 수순인 자폭이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했다.
"아 너무 걱정하진 마. 우린 널 죽이러 온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목적이 뭐지?"
더스트 곧장 홍소할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주인 없는 인형인 너를 내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서지!"
곧 터질 것 같았던 웃음이 결국 터졌다. 더스트는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는 티나에 아랑곳않고 한참을 깔깔댔다. 티나가 겨누고 있던 총끝이 흔들렸다.
"....더이상의 모욕은 용납하지 않겠다."
더스트는 과장된 몸짓으로 배례하며 대답했다.
"모욕이라니! 미안해, 사과할게! 근데 너한테 해야할지, '그 두뇌'한테 해야할지 모르겠는걸?"
티나는 충동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애쉬와 더스트가 더 빨랐다. 권총에 장전된 탄약이 모두 터져나가며 순식간에 티나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비명과 신음을 삼키며 왼손으로 수류탄을 빼들려 하자, 애쉬가 여유 작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왼쪽도 날아가고 싶은 거라면... 아 그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그걸 터뜨리면 넌 죽어."
"죽음은... 두렵지 않다..."
애쉬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오? 그렇다면 네가 두려워하는 게 뭐지?"
"클로저가.... 되지 못 하는 것."
이에 더스트가 홍소하며 뱉은 말은 죽음을 결심하던 티나를 멈칫하게 했다.
"꺄하하하하하! 바보 아냐? 클로저는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거야!"
애쉬도 거들듯이 말했다.
"네가 쓰는 무기가 망가진다고 네가 슬퍼하진 않지."
티나의 표정에 고통 외의 다른 것이 섞였다. 애쉬는 피식 웃고는 여전히 홍소하는 더스트를 대신하듯 말했다.
"너희 세계의 문학에는 재미있는 게 많더군. 널 보고 있자니 '주석병정'이란 동화가 떠올라. 다리가 하나 없는 채로 태어난 결함품인, 주석으로 만들어진 병정 인형이 다리가 없는 무희 인형을 남몰래 사랑하는 와중에 여러가지 시련을 만난 끝에 돌아오지만, 어린 인간의 손에 벽난로에 쳐박혀 녹아버리고 하트 모양의 주석 덩어리만 남아버리지. 그 무희도 벽난로에 떨어지지만 순식간에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
더스트는 그 사이에 웃음을 진정시키고 한껏 목을 돋우더니 과장된 몸짓을 섞으며 말했다.
"인형아, 인형아, 용감한 '주석병정'아. 넌 대체 누굴 위해 무얼 견디려 하니? 그래 봤자 너한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텐데! 티나는 도중부터 더스트의 재잘거림을 듣지 않고 생각 속에 침잠했다. 사실 부상이 심각해서 대화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다. 몽롱해지는 와중에 생각했다. 살육의 업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 업이 중단되고 마침내 클로저로서의 정의감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던 그 곳에 '티나'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영혼을 원천으로 하는 사람 같은 도덕 감정이나 클로저로서의 정체성이 되는 위상력은 말할 것도 없고 팀 내에서 마저 '교관'이 아닌 '티나'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니 티나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인간 행세를 하고 있어 봐야 로봇일 뿐"이었나...
티나의 눈이 완전히 감기려던 때, 더스트가 쓰러져 있는 티나의 머리채를 잡아올려 억지로 눈을 맞췄다. 티나가 힘겹게 초점을 맞추자 더스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줄게."
티나는 몸에 들어오는 힘을 느꼈다. 그 자신의 발로 섰다. 온전한 육체를 갖게 된 무언가를 향해 애쉬가 말했다.
"누구도 감히 너를 '인형'이라고 부르지 않게 될 거야."
티나는 주체할 수 없는 유쾌함을 느꼈다. 그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그 자신의 감정을 갖게 된 그 무언가를 향해 더스트가 활기차게 말했다.
"인간이 되는 방법은 간단해!"
"정말 정말? 어떻게?"
티나는 재잘대듯 빠르게 말하고는 한참을 까르륵거렸다.
"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기억하지? 인간들은 너로 뭘 했지?"
"저요 저요! 인간을 죽였어!"
더스트는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똑똑하구나! 여기 돌아다니는 인간이 만든 인형들도 인간을 죽이기 위함이잖아. 인간처럼 행동하면 언젠가 너도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럼 인간은 뭘하는 동물일까?"
"저요! 인간을 죽이는 동물이요!"
푸핫! 구경하던 애쉬가 웃음을 터뜨리며 끼어들었다.
"그거 이상한데? 우리한테 힘을 받고 만들어져서 우리 말에 따라 인간을 죽이면 계속 인형인 거 아닌가?"
더스트가 과장되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애쉬의 핀잔에 답했다.
"뭘 모르시는군! 티나는 이제 마법의 힘을 받고 새로 '태어난' 마법소녀야! '직접' 마법의 힘으로 인간들을 학살하는 거지!"
애쉬는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악령으로 '제조'되어 처리부대의 '개'와 '그 두뇌'의 클로저를 거쳐 이제는 얼토당토 않은 마법소녀라... 애쉬는 짧막한 감상평을 남겼다.
"주석병정이 아니라 마리오네트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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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더남매 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