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암광」 이후의 이야기
루이벨라 2017-01-25 5
※ 전편(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1055/)을 읽고 와주세요. 이어집니다.
결국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런 몰골을...절대 팀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이런 날 보고 예전의 이세하를 찾을 것만 같아서, 내가...나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멀어진 팀원들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엉겁결에 안겨버린 서유리의 품은 따뜻했다.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더랬다. 그런 나를 보며 서유리는 말했다.
돌아가자, 세하야.
돌아가자고? 어디로?
우리들이 있어야할 곳, <검은양> 팀으로.
...그 두 마디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는데,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도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그 무너짐을...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저앉아있던 날 천천히 들어 올려주는 서유리의 손길을 내쳐버리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겨우 검은양이 다 모였구나, 라며 내 뺨을 쓰다듬어주던 서유리의 손길이...너무도 좋았으니까.
돌아온 다음날, 눈을 떠보니 내 모습은 원래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백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냥 마음의 뒤틀림 때문이었을까? 그저 마음먹기에 따라 변하는 단순한 것이었을까.
<검은양> 팀으로 되돌아온 이후, 나의 삶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그 녀석이 나타나면서 '나처럼 받아들여' 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머리가 크게 아픈 일도 없었다. 그냥 내가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인 게 현실이 아닌 듯, 갑작스럽게 찾아온 조용한 일상과 평화였다. 팀원들은 나를 여느 때와 같은 태도로 대해주었다. 처음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보게 된 팀원들의 여기저기 감겨진 붕대를 보았고, 그렇기에 그들이 나한테 이렇게 대해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후로 아침마다 일어나 확인하는 일이 생겼다. 거울을 보며 내가 아직도 '이세하' 인지 확인하는 일.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도 들리겠지만, 난 지금 이 모습일 때야 비로소 '이세하' 인 기분이었다. 정말 웃긴 일이었다. 예전에는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이세하' 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그저 이렇게 팀원들하고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세하야, 세하야! 우리 와플 먹으러 가자!"
"어제도 먹었잖아."
"어제건 어제고, 오늘건 오늘이지!"
내 삶은 이제 '매우' 평범해졌다. '평범하게' 학교를 가고, '평범하게' 게임을 하기도 하고, '평범하게'...클로저 일을 하러 간다. 신서울 복구 때문인지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무조건 침대에 뻗어 잠부터 잤다. 이렇게 지쳐서 필름이 끊기듯 잠들 때는 꿈을 꾸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도 그 녀석을 만날 거 같았기... 때문에.
난 그것이 두려운 걸까. 녀석의 적안(赤眼)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 * *
"오늘은 이 크레페 가게 가자! 엄청 맛있기로 유명해!"
"너 그렇게 단거 먹다가 살찐다."
"사, 살찌지 않을거야. 이렇게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데...!"
요즘 서유리는 일이 끝나는 대로 디저트 가게로 퇴근을 하는 기분이었다. 많이 움직여서 그런지 요즘 들어 자꾸만 단 것이 땡긴다며 나와 이슬비를 이끌고 간다. 가끔은 거기에 테인이나 제이 아저씨도 같이 낀다.
오늘은 나와 서유리, 둘만의 파티인 듯 했다. 이슬비는 서류 정리할 게 있어서 오늘은 '정말로' 같이 갈 수 없다고 엄포까지 넣은 상태였다. 그러자 서유리가 옆에 있던 날 지긋이 보면서 '세하는 같이 가줄 거지?' 라고 물었다. 그런 눈을 하면...차마 거절을 못 하잖아...아니, 내가 서유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던가. 내 기억이 맞으면, 없었던 거 같았다.
끌려오다시피 왔지만 서유리가 말한대로 크레페는, 정말 맛있었다. 나름 즐기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서유리가 문득 말했다.
"와, 노을 예쁘다."
"..."
"벌써 초여름이 다가오는구나."
우리가 처음 <검은양> 으로 만났던 때가 초봄. 초여름이 다가온다는 서유리의 말에 그 시간으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불과 몇 달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길다는 시간에 많은 일이 지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내 눈 색을 확인했다. 컬러 렌즈를 껴서 고동색인 눈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세하는 자꾸 눈을 확인하는 거야?"
"...뭐?"
"아니, 가끔 보면 눈을 신경 쓰는 거 같아서 말이야."
가끔 보면 서유리는 이상한 부분에서는 예리했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게 서유리의 눈에 몇 번 띄었던 모양이었다. 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내 입에서 툭 나온,
"...이거 원래 내 눈 색 아니거든."
"으응?"
"컬러 렌즈를 낀 거야."
어떻게 그런 말이 툭하고 튀어나온 걸까. 내가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 하나를 알리고 싶지 않아, 또 다른 비밀을 알린 꼴이 되었다. 나의 이런 뜬금없는 대답에 서유리는 헤~ 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헤~그건 몰랐네. 난 세하 원래 고동색 눈인줄 알았지!"
"..."
"그럼 진짜 눈 색은 뭐야?"
"...나중에 보여 줄게."
나중에, 라는 막연하기만 한 시간으로 약속을 했지만 서유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거 같았다. 내가 나중에 꼭 보여줄 거라고 믿는 표정이었다.
서유리가 말한 대로 지고 있는 노을이 참 예뻤다.
* * *
오랜 만에 들어오는 <검은양> 동아리방이었다. 오늘은 현장이 아닌, 이 동아리방에서 모이기로 했다. 아직 지정된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아있어서인지는 동아리방에는 나 혼자였다.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문득 벽 한 켠에 붙어있는 벽 거울이 눈에 띄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거울이 보이면 다가가서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
이쯤 되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언제나 확인해 봐도 난 '이세하' 본래의 그 모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이세하' 의 모습이지만. 그렇게 거울을 잠시 살펴보는 중에 렌즈가 좀 뻑뻑해서 이참에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컬러 렌즈를 빼자, 거울 안에는 확연하게 드러난 내 본래의 눈 색, 황금색 눈을 가진 내가 눈을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어렸을 때는 남들과는 다른 눈 색(위상능력자들 중에서도 내 눈 색은 희귀한 편이었다) 때문에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다. 그로 인해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타인에게 '나' 에 관한 것은 전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호기로움으로 시작한 게, 나중에 가서는 안 좋은 결과로 변하는 걸 몇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난 한숨을 쉬며 렌즈를 끼기 위해 다시 거울 앞으로 섰다. 그런데...무언가 좀 이상했다. 거울에 있는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지금 저런 미소를 짓고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거울 안에 있던 내 눈동자가 새빨간 적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서 똑똑히 들리는 그 목소리.
-뭐야, 겁쟁이로구나.
"...!"
...왜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건데...?! 난 '평범하게' 살고 있잖아. 아니, 위상능력자라는 것부터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지만, 평범한 위상능력자로 잘 살고 있잖아. 그런데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데?!
내 마음 속의 질문이 들렸는지 거울 안의 나는 빙긋, 다시 한 번 웃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너를 끊임없이 억눌렀다는 거야? 정말, 겁쟁이야.
"..."
-나처럼 받아들여, 어차피 너랑 나는 처음부터 똑같은 '이세하' 잖아? 넌 결국 나처럼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아니, 원래부터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게 되어있었지.
그 입 다물어...!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내가 내려친 부분부터 시작해서 거울에 금이 여러 갈래 갈라졌다. 거울에 금이 갈 정도면 세게 내려친 게 분명한데, 아프지 않았다. 통각이 일순간 마비된 듯이, 아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려친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녀석은 이런 날 항상 비웃고 사라졌다.
-지금 네 모습을 봐. 과연 네가 말하는 그 삶이, 너한테 가장 어울리는 삶일까?
"...무슨."
금이 가버린 거울 앞으로 다시 섰다. 녀석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갈라진 부분으로 나뉜 거울의 부분마다 내 얼굴이 비추었다. 그리고 그 거울 부분마다 비추고 있는 내 얼굴은...
한쪽이 보통 인간들이라면 볼 수 없는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내가, 용의 힘을 받아들인 직후, 변화한 외형과 똑같은 보라색 눈이.
뭐야, 이게...뭐냐고, 이게...! 이게...뭐냐고...!!
충격으로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떡해야하지...이제 어떡하면 좋은 거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은 언제나 최고임과 동시에 최악이다. 이 동아리방에 들어올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후보를 간추려보면...
"어...? 세하다!"
...타이밍은 언제나 최고임과 동시에 최악이다. 내가 지금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의 목소리였다.
"...세하야...? 너 왜 그러고 있어...?"
서유리가 성큼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붙잡았다. 보여주기 싫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증거를 들키기 싫었다.
서유리의 시원한 벽안과 마주하고 말았다. 그 벽안에 담긴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은...나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세하야...?"
"오지 마..."
오지 마...보여주기 싫다고. 이런 모습, 너한테 보여주기 싫다고. 왜 하필 네가 지금 들어오는 건데. 왜 하필, 지금...
녀석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잔뜩 비웃으며 자신이 결국 정답이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있을 곳은...여기가 아니라고.
[작가의 말]
개인적으로 저 뒤에 유리가 피 나오는 세하 손 치료해주면서 꼭 안아주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