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임기로소이다. - 입을 가지고 싶다

바르세 2015-02-06 2


 나는 게임기다. 이름은 아직 없다.

 내가 어느 공장에서 태어났는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무튼 어떤 게임기 공장에서 태어나 검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확인해본즉 내가 있던 곳은 상자 안이라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두운 상자 안이 갈라지고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내 주인인 이세하라는 인간이었다. 그때 상자 안의 나를 본 주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아직 제대로 전기로 배도 채우지 못한 나로서는 잠결에 본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이후 주인은 나와 함께 여러 게임을 즐겼지만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진 않았다. 게임기에 이름을 붙이는 취미따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하지만… 사실은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비밀이다. 이럴때면 입이 있었으면 한다.

 인간 세상에서는 점잖게 표현하면 매니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겜덕후라 불리는 주인의 집에는 나를 비롯한 여러 게임기가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존경하는 어르신은 TV와 연결된 거치형 게임기로 우리 중 가장 연장자다. 언제나 은퇴가 가까워졌다고 버릇처럼 입에 담고 계시던 어르신은 그 말대로 최근 집에 온 새로운 거치형 게임기에 밀려 주인의 서랍 안에 모셔지게 되어 최근 뵙기 어렵다. 언젠가 나도 차세대 기종이 나오면 어르신처럼 되는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최근 자주 품게 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괴롭게 하는건 내가 휴대용 게임기라는 점이었다.


 "이세하, 상황보고해."

 "…………."

 "…이세하, 상황보고해."


 겜덕후인 주인은 비교적 최신식 휴대용 게임기인 나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아니, 그보다는 매일 같이 나를 가지고 다닌다. 학교나 직장은 물론 심할 경우에는 화장실에까지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과연 화장실만은 주인의 어머니에게 금지되었기에 지금은 아니지만 하마터면 변기 안에 빠질 뻔 했던건 그리 유쾌한 기억이 아니다.


 "야, 이세하! 게임기 당장 안끄면 부셔버린다!"


 주인은 시간만 났다하면 게임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고함을 쳐지는건 일상의 당연한 풍경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서 내 괴로움의 원인 중 하나가 나온다.


 "아, 알았다고!"


 게임기… 즉, 나를 부셔버리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무서운 여자의 존재였다.

 무서운 인간의 이름은 이슬비라는 것 같았다. 이 슬비라는 인간 여자는 언제나 화를 내며 무서운 얼굴로 주인과 나를 번갈아 보는게 일과인 이상한 여자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서슬퍼런 기색에 언제나 주인이 의견을 접으며 나를 주머니에 집어넣기 때문에 조금은 고맙기도 하다. 


 "이세하. 작전 중에는 게임 하지 말랬지?"

 "하지만 아직 차원종이 나온건 아니잖아."

 "…………."

 "아, 아하하하하."


 주머니 안에서 밖을 살짝 쳐다보면 주인을 그녀가 노려보고 있었다.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주춤하는 주인이 뭔가 말을 돌리려는지 입을 여는 것 같았지만 그 뒤 주인의 뒤에서 덮쳐온 인간에 의해서 강제로 말이 끊겼다.


 "뭐야, 또 너희들 싸우고 있었어?"


 주인을 덮친 인간은 서유리라는 인간이다. 이슬비라는 인간에 비하면 나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다만 때때로 나를 주인에게서 빌려 게임을 할때면 마구잡이로 키를 누르며 조작하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다. 별 의미없는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주인의 친구인 한석봉이라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족속 중에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야, 좀 떨어져."

 "뭐 어때 우리사이에!"


 서유리라는 인간은 스킨쉽이라는 행위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도 떨어지라 말하는 주인은 물론 다른 인간에게도 시도때도 없이 달라붙는다. 그러한 습관 때문인지 때때로 우정미라는 인간에게 주의를 받고는 한다. 특히나 가슴이라 불리는 인간의 부품이 남자라는 인종에게 닿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정미의 말에 서유리는 그냥 웃어넘기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가 입이 있었다면 우정미의 말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어지곤 했다. 내가 관찰한바 그녀의 말은 틀리기 때문이다. 서유리라는 인간이 가슴이라는 부품을 닿게하는 남자라는 인종은 주인이 유일하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에게 조심성 없이 닿는다.'라고 지적하는게 아닌 '이세하에게 조심성 없이 닿는다.'고 지적해야 옳은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그 가슴이라는 부품이 닿는게 무슨 문제인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예전에 교실에서 서유리와 우정미가 달라붙어 서로의 그 부품이 닿는 장면을 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몰래 힐끔거리던 것을 보고는 그게 문제라고 깨달았다. 여자라는 인종의 가슴이라는 부품은 주인이 잠시나마 게임을 멈추게 할 정도의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확신하건데 시선을 빼앗는 것으로 주의가 분산되니 사고의 위험이 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분명하다.


 "…지금은 작전 중이니까 거기까지만해."

 "하항, 우리 슬비… 질투하고 있구나! 요녀석! 요녀석!"

 "그, 그만!"


 주인에게 달라붙어있던 인간은 그대로 이슬비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대로 는실난실 들러붙어 있는 모습을 주인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약간의 미소를 띄우며 보고 있었다.

 서유리라는 인간이 질투라는 말을 꺼내서 떠오른 일이지만 이슬비라는 인간은 무섭기 짝이없을 뿐만이 아니라 질투심도 많은 것 같다. 나는 인간이 아니기에 질투심이 뭔지는 알고 있어도 과연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관찰을 하며 낸 통계나 내 감에 의해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슬비라는 인간의 질투 대상은 줏대 없게도 이 인간 저 인간에게 향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 이슬비라는 인간은 그 질투심을 주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때때로 주인에게 노력이라느니 재능이라느니 하며 은근히 그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부터 주인이 아니라 서유리라는 인간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다만 이때의 질투심은 조금 방향이 다른 것 같았는데, 질투심이 보이는 이슬비라는 인간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서유리라는 인간의 부품이 흔들리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단 주인과 함께 플레이 한 게임에서 나오는 인간이 타인의 가슴이라는 부품의 크기를 질투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는건 알았다.

 그 외에는 가슴이라는 부품이 아니라 주인과 들러붙어있는 모습일 경우도 질투심을 보이곤 했다. 이를 다른 인간들은… 특히 서유리라는 인간은 '서유리가 이세하에게 붙어있는 것'을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이세하에게 서유리가 붙어있는 것'을 질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슬비라는 인간이 그러한 질투심을 보이는건 서유리라는 인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캐롤리엘이라는 인간이나 오세린이라는 인간 등이 주인에게 붙을 경우에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어이 너희들, 장난은 거기까지만 해라. 슬슬 손님이 오신다."


 두 인간이 붙어있던 와중 다른 인간이 다가왔다. 제이라는 인간이다.

 이 제이라는 인간은 주인과 한석봉이라는 인간을 제외하고 내가 비교적 인간중에는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나를 시도때도 없이 부수려는 이슬비라는 인간이나 막다루는 서유리라는 인간과는 달리 나에게 접근하지도 않는다는 점만으로도 큰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매일같이 내 안의 게임속 캐릭터처럼 약을 먹는 모습이 실로 친숙하다. 이는 주인도 같은지 게임에서 매일 포션을 마시듯 약을 섭취하는 제이라는 인간에게 주인은 그가 어른임에도 따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심할 경우에는 이슬비라는 인간이 주인에게 달라붙는 여자라는 인종에게 보이던 질투심이 때로는 그에게 향하기도 할 정도다.

 이러한 모습에 정도연이라는 인간은 동성애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인과 그 동료들은 제이라는 인간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던 적이 있다. 그에 당황한 제이라는 인간이 믿는거냐 묻자 주인을 비롯한 다른 인간들은 농담이라 얼버무렸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예전 제이라는 인간이 한석봉이라는 인간에게 결혼을 신청했던 것을 말이다. 둘다 남자라 불가능하다며 서로 웃어넘겼지만 주인은 그걸 떠올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게임기인 나로서는 동성애니 이성애니 하는 인간의 비생산적인 감정과 생식행위에 대해 이해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제이라는 인간은 이성애를 지닌 인간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슬비라는 인간이 제이라는 인간과 김유정이라는 인간이 서로 커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더 잘 알테니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 대상인 두 인간은 서로 부정했지만 말이다.


 "자자, 손님 오셨다."


 제이라는 인간이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에 주인을 비롯한 인간들이 그곳을 쳐다보았기에 앞주머니에 있던 나 또한 그 곳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있는건 차원종이었다.


 "검은양팀, 작전 개시. 적을 섬멸합니다."

 "좋아, 그럼 내가 일등!"

  "얘들아, 무리하지마라. 건강이 제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주인과 인간들이 차원종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주인의 주머니 안에 있던 나는 거칠게 흔들리는 그 속에서 다시금 괴로워했다. 내가 앞서 이야기한 괴롭게 하는 것들 중 다른 하나 때문이었다.


 "빨리빨리 덤벼! 난 시간 없다고!"


 기합을 지르며 무기를 휘두르는 주인의 품 안에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은퇴하는건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를 주인이 새로 구입하거나 무서운 여자가 나를 부수는 것보다 먼저, 주인과 차원종의 싸움에 망가지는게 먼저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게임기다. 이름은 아직 없다. 주인은 게임기에 이름을 붙이는 취미가 없고 그때문에 이름이 없지만 그건 약간의 아쉬움에 불과하다. 만약 내게 입이 있다면 나는 주인에게 이름을 지어달라는 말보다 먼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적어도 게임기는 위험한 직장에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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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물로 계획중인 글입니다.

 첫편은 소개라는 느낌으로 써봤습니다.

 사실 몇편을 더 쓰고 느긋하게 올리려했는데, 내일... 오늘? 미스틸 테인이 업뎃되니 먼저 올리는게 좋을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2024-10-24 22:22:5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