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전장을 꿈꾼다. -1-
아이숄더 2016-12-31 0
소년병(小年兵). 소년병의 소자만 들어도 과거의 아픔이 깨어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저런 살벌한 단어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대다수는 후자 쪽이겠지만, 차원 전쟁이 터지고 나자 소년병을 비롯한 전쟁 관련 용어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차원종(次元種). 세계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준 괴수들을 총칭하는 단어다. 차원문을 통해 이계에서 지구로 넘어오는 가지각색의 괴물들은 저마다의 무기로 누군가의 친구, 혹은 가족일 수 있는 사람들을 죽인다.
앞서 소년병과 차원종을 설명한 이유는, 앞으로 이야기 할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저 둘과 너무나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어려서는 강대한 위상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전쟁에 끌려나가야 했으며, 자라서는 인류에겐 없어야 할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실험체로 굴렀으며, 끝끝내 버려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잠적해야 했던 비참한 남자의 것이다.
* * *
"저건…!"
코드명 알파 원, 본명은 서지수인 그녀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전장 한복판. 차원문으로부터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차원종들을 그녀가 소속 되어 있는 울프팩 팀의 동료들과 함께 처리하던 중이었다. 앞을 막고 있다면 벤다라는 단순무식한 마인드로 지금껏 차원종들을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목숨을 거두었던 그녀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에게 한 눈을 팔았다.
"누님?"
백발청안의 소년이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알파 원을 호위하며 주변의 차원종들을 쳐내던 찰나, 그녀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누님?!"
한 발, 두 발. 토끼뜀을 하듯이 가볍게 튀던 발걸음은, 어느새 초기의 가벼운 움직임은 생각도 할 수 없이 묵직한 폭발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질주는 평범한 인간이 대지를 박차며 달리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위상력을 담아,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 밑에서 폭발을 일으켜 압도적인 가속도로 나아갔다. 대기를 찢어**는 파공음이 울려퍼질 때마다, 차원종들은 학살의 마녀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자, 잠깐. 어디 가는 거야!"
어린 소년은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알파 원은 최강의 클로저들이 소속 되어 있는 울프팩 팀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을 지녔기에, 또 그와는 별개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성격 탓에, 항상 최소한 한 명의 팀원은 그녀를 따라다녀야 했다. 이것은 곧 대량학살 마녀의 전투를 곁에서 지켜볼 영광을 얻게됨을 뜻하지만, 울프팩 팀원들에겐 과격한 누님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당번'과도 같은 의미였다.
"말도 안 돼…!"
그녀의 비행은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는 우아함은 없었으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설령 태산이라 할 지라도 일격에 부숴버릴 만한 압도적인 기세가 있었다. 폭발의 여파를 이용해 가속하면서도, 어딘가에 부딪힐 것 같다면 즉시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켜 현란하게 위치를 전환하는 모습을 보며, 소년은 그녀에게 진심 어린 경외를 표했다.
"역시, 내가 잘못본 게 아니었어!"
뒤따라오는 어린 소년의 기척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슬쩍 속도를 내렸던 알파 원은, 지근거리에 있는 한 차원종을 보며 전율에 떨었다. 간신히 그녀의 뒤를 쫓던 소년은, 부서진 건물의 외벽을 딛고 멈춰 선 그녀에게 위화감을 느껴 위상력을 시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두려움으로 떨린 적이 없던 그녀의 가녀리지만 강인한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차원종이 있길래? 소년은 꿀꺽 침을 삼키며 각오를 다지기로 했다. 그리고 소년이 각오를 다진 순간, 알파 원은 그 막강한 차원종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녀가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소년은 각력에 위상력을 집중해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건물을 몇 개씩 뛰어넘으며 속도를 높였다.
콰앙!
곧 경천동지의 굉음이 들려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들려온 폭음의 규모는 소년의 생각보단 작았다. 그 점에 소년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가 두려움에 떨 정도의 차원종이라면 분명 그녀가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할 상대일 텐데, 왜 이렇게 소리가 작을까. 그녀의 폭발은 가히 하늘이 떨고 대지가 뒤흔들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보석 차원종?"
소년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긴장 풀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알파 원은 그 먼거리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보석', 거대한 차원종의 등에 박혀 촘촘하게 자라난 보석을 보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해 이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시민들의 대피는 사전에 이루어져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전쟁이다. 그녀와 소년을 제외한 다른 울프팩 팀원들이 차원종들을 제압하며 공습의 피해를 최대한 막고 있었고, 또 그런 만큼 이번 방어도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제이! 얘 건드리지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저 보석 좀 보라고. 죽이기 아깝지 않아? 생포해서 기르는 게 어때?!"
폭발을 이용해 단숨에 소년이 있는 곳까지 올라 온 알파 원은 기상천외한 제안을 했다. 보석이 아까우니 차원종을 기르자는 것이다.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참담하게 한 숨을 쉬었다.
"하아…. 농담이지?"
"에이. 당연히 진담이지. 스릴 넘칠 것 같지 않아? 저 놈 세기도 엄청 세다고!"
아슬아슬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음을 피해가며 스릴을 즐긴다. 그것이 알파 원이자 서지수인 그녀의 모토다. 물론, 소년은 그녀의 사탕 발림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한**삐 저 차원종을 죽이고 시민들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그것이 클로저로서의 의무. 힘 없는 정의는 허상에 불과하고 정의 없는 힘은 단순한 폭력에 불과하니, 클로저로서 마땅히 힘을 휘둘러 차원종에게 인류의 정의를 행하는 것이 옳았다.
"안 돼. 기각."
"왜애?!"
"한 시가 바쁜데 누님 어리광까지 들어줄 여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나 혼자 하겠어."
"뭐?!"
"나 혼자 할 거야. 잘 봐. 내가 혼자 잡을 거니까."
그녀는 말로 내뱉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굳은 결의에 찬 표정을 내보였다. 쓸데없이 언행일치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다. 소년은 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소년에겐 그녀가 저 차원종을 잡는 도중에 힘조절에 실패해 죽여버리던지, 하다못해 놓치는 쪽이 나았다. 왜냐면, 그녀가 정말로 저 차원종을 생포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곁에 있던 소년도 덩달아 그녀와 함께 문책을 받을 것이다.
"그럼 나도 같이 해."
"기각이라며?"
"…그냥 같이 해. 누님 혼자 두면 불안하니까."
"짜식. 너도 보석 좋아하는구나."
긴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알파 원은 그녀의 손에 익은 무기를 들고 거대한 보석 차원종에게 달려들었다.
* * *
"…음. 저기?"
"왜 그러지? 베로니카."
17세의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차원 전쟁에 참가한 베로니카는, 곁에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인상이 거칠기 짝이 없는 남자는 소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달려드는 차원종을 걷어차 날려버렸다. 그의 발에 걷어차인 차원종은 건물 벽에 쳐박혀 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버렸다.
"그러니까… 제이랑 알파 원 언니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설명을 해 주기 바란다."
"어… 등에 보석이 박힌 차원종을 생포? 하려고 하는 것 같아."
"…그 둘은 지금 어디 있나."
"따라와."
그와 베로니카는 남은 차원종들을 다른 팀원들에게 맡기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제이는 어린 소년이지만 울프팩 팀의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한 위상력 컨트롤을 선보이는 천재 중의 천재였고, 알파 원은 말할 것도 없이 울프팩 팀, 나아가 인류 최강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둘이 차원종을 생포하려고 하다니. 남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며 눈살을 찌푸렸고, 베로니카는 천리안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