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여자 -하피편
갓하피 2016-12-23 1
하피 이야기
-------------------------------------
-2
또각 또각-
하이힐 굽 소리가 길게 늘어선 복도의 벽을 따라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명도가 낮은 조명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고, 복도의 끝에는 보안장치가 달린 철문이 나 있었다.
“끄윽… 끅…”
또각거리는 청명하고도 음산한 굽 소리 사이로 목이 끓는 듯한 신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복도 끝의 문을 향해 걸어가던 잿빛 머리의 여자는 그 소리를 듣자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여자는 문 앞에 다다랐고, 보안장치에 비밀번호와 지문을 입력하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때요? 반성은 하고 나요?”
방 안에는 둥근 갓을 쓴 작은 조명 하나가 달려있었고, 그 조명 아래는 한 금발의 여자가 양손과 다리를 결박당한 채 머리를 떨구고 앉아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의자와 바닥을 잔뜩 적신 땀은 복도 밖으로 새어 나오던 신음소리가 그녀의 것임을 보여주었다. 금발의 여자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잿빛 머리의 여자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음소리를 참기 위함이었지만, 그런 것으로 고통을 참기에는 역부족인지 여전히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법이네요. 보자… 쵸커를 작동시킨 지 3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눈동자에 반항기가 남아있군요.”
그녀의 질근 깨문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땀 때문에 얼굴에 아무렇게나 들러붙은 금발의 머리칼 사이로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잿빛머리의 여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쵸커 정도면 충분히 제어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런 상황에서도 탈출을 시도하려 할 줄이야… 어차피 쵸커를 달고 있는 이상 이렇게 잡힐 텐데 말이에요. 멍청한 건가요, 아니면 괴도 시절의 버릇 중 하나인 건가요? 아, 둘 다인가? 어쨌든 덕분에 저도 이 지하시설 이용까지 승인 받느라 고생 꽤나 했다고요.”
“…끄윽…컥…”
“어머, 실수. 당신을 만나면 바로 끄려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잿빛 여자는 빙긋 웃으며 손에 들린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작게 경련하던 그녀의 몸이 탁하고풀리며 맥없이 늘어졌다.
“하아하아…”
고개를 늘어뜨린 채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잿빛 머리칼의 여자는 빙긋 웃어보였다.
“뭐, 제 말을 거역한 벌은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죠. 그래서 어떤가요? 이제 제가 부탁한 첫 번째 과제를 할 수행할 마음이 좀 생겼나요?”
그녀는 이미 대답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푹 떨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잖아요? ‘나는 홍시영 감시관님의 그림자에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에요.”
“차라리… 절 죽이시죠…”
금발의 여자가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감시관이라는 여자는 북풍 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크게 가로 저었다.
“정말 못 말리는군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요? 당신이 그 쵸커를 찬 이상, 당신은 이제부터 저의 그림자에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제 마음대로라고요.”
“하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요. 전 그림자 같은 것 할 생각 없다고요. 그냥… 죽여요, 제발…”
그녀가 떨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미소를 본 감시관의 표정이 굳어졌다. 금발의 여자는 잠깐 동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조차 힘에 겨운지 이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당신은 쉽지 않은 여자군요.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감시관은 무릎을 굽혀 금발의 여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고 있는 떨리는 괴도의 턱을 거칠게 받쳐 들었다.
“큭!”
아직 반항기가 남아있는 그녀의 충혈된 눈동자를 마주 보며, 잿빛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그런 점이 날 더 기쁘게 한다는 거…”
감시관은 그녀의 턱을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뺐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쓰다듬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후 천천히 일어선 감시관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다음은 10시간이에요.”
“뭐, 뭐라고요…?”
그녀의 쉰 목소리는 경악에 차 있었다. 방금 전까지 쵸커로 고문당했던 3시간도 평생 처음 겪는 어마어마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런 고통을 10시간씩이나 받는다면 그녀는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감시관은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10시간이에요. 그래도 말을 안 듣는다면 20시간일 거고요. 그다음은 30시간일 거에요.“
“잠깐… 으으윽!”
그녀의 목을 죄고 있는 쵸커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온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결박당한 손과 다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다음에 왔을 때는 좀 더 고분고분해져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냥 죽여! 죽이라고…! 아아악!”
문이 닫히고 절규와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걱정 마세요… 당신 안의 괴도는, 제 손으로 천천히 죽여줄 테니까.”
-131
“컥…”
검은색 후드를 입고 있던 남자의 몸이 힘없이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남자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서슬 퍼런 나이프가 땅에 떨어졌고 곧바로 방금 전 그를 벽에 처박은 검은색 부트가 그것을 짓밟았다.
“여자에게 흉기를 휘두르다니, 예의가 없으시군요.”
부트의 주인인 금발의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나이프를 짓밟은 발을 한번 비틀자 날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남자는 한 손으로는 얻어맞은 배를 움켜쥐고 나머지 손으로는 등 뒤의 땅을 짚고 몸을 끌면서,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발버둥 쳤다.
“넌, 넌 아무것도 몰라…! 벌처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남자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소리쳤다. 그는 최근 벌처스의 핵심 연구시설에서 기밀문서를 들고 달아난 연구원이었다. 기밀문서를 탈취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홍시영 감시관과 그녀의 그림자에게 결국 덜미를 잡히고 말았고, 결국 이렇게 그녀에게 제압당했다.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그녀가 홍시영 감시관의 그림자가 된 이후로, 회사의 배신자가 감시관의 손아귀를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 중에서는 위상능력자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녀는 일개 연구원이 도망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그는 벌처스의 비밀을 폭로하려고 했던 걸까? 그러나 그녀는 벌처스의 비밀을 알게 된 자가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벌처스의 기밀문서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하려는 것 인지, 그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됐다. 그녀의 주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저는 그저 감시관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라고요.”
“어머,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군요?”
그녀의 뒤편에서 감시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잿빛 머리칼의 여자가 그녀 특유의 섬찟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빨리 오셨군요, 감시관님. 말씀하신 쥐**를 붙잡아 놨습니다.”
“아주 좋아요.”
또각또각하는 굽 소리가 적막한 뒷골목의 벽을 따라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발걸음은 그녀의 곁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그림자의 얼굴을 바라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처리하세요.”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리… 라뇨?”
‘처리’라는 단어는 홍시영이 굉장히 자주 쓰는 단어였지만, 그 의미는 항상 달랐다. 무력화, 제압, 구속… 그러나 지금은 그것들과 다른 의미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머, 몰라서 묻는 건가요? 죽이라고요.”
“안되, 잠깐… 저 여자 말을 들을 셈이야? 이건 살인이라고!”
남자가 절규하듯 외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내 등이 벽에 닿았고, 그가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에 떨고 있는 남자를 향했다가, 다시 그녀의 주인을 향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해 홍시영의 눈동자는 아주 확고했다. 그 두 눈동자는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어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 마저 들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죠? 그림자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죠.”
홍시영은 그녀와 눈을 마주 보면서 한 단어, 한 단어 입을 크게 벌려가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살짝 틀어 눈짓으로 그 남자를 가리켰다. 그녀의 고개도 남자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녀에게 닥칠 고통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녀의 부서진 마음은 절대로 그것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남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 안되…!”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 속에 무엇인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막혀오는 숨 때문에 잠시 발걸음이 멎었으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등 뒤의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기, 기다려! 난 아직…”
“죄송해요. 정말로.”
곧바로 핏자국이 남아있는 검붉은 부트가 남자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132
그녀는 술에 잔뜩 취하고 싶었다. 테이블 위에는 찌그러진 맥주캔과 술병이 한가득이었지만, 오늘따라 취기가 잘 오르지 않았다.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얼음과 술이 담긴 잔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그녀의 오른발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발에 전해지던 감각이 선했다. 그녀의 부트를 타고 전해지던 뼈가 부러지는 느낌,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지는 몸, 이어지는 정적. 피비린내.
그녀는 잔에 담긴 남은 술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취기 대신에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혐오만이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취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빈 잔에 술을 따르기 위해 다시 술병을 들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술병을 내려놓고 자신의 떨리는 양손을 바라보았다. 시뻘건 핏빛이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시작해 손등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붉은색 벌레들이 그녀의 피부를 뒤덮은 것 처럼, 손에서부터 시작된 그 진득하고 기분 나쁜 감촉은 그녀의 피부와 옷 소매를 붉게 물들이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려 하기 직전, 그녀 방의 문이 열렸다.
“어머, 또 시작이군요. 당신은 정말 술을 좋아하나 보네요.”
“호, 홍시영 감시관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방에 들어온 홍시영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손을 확인했다. 핏빛에 물들지 않은 그녀의 새하얀 살결만 남아있었다.
“그 어중간한 자세는… 뭐 하고 있는 건가요?”
홍시영은 자신의 양손을 눈앞에 가져다 대고 있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금발의 여자는 곧바로 손을 내리면서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녀는 재빠르게 손을 내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 아래 모아 잡은 두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음… 그렇군요.”
홍시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문을 닫고 그녀의 맞은편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길쭉한 상자가 하나 들려있었다.
“그보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당신에게 선물을 주려고 왔어요. 오늘 당신의 활약이 매우 인상 깊었거든요.”
그녀는 오른손에 들린 상자를 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아시나요?”
상자에는 프랑스어로 된 고풍스러운 글자가 쓰여있었다. 애주가인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건… 크루그 그랑드 퀴베군요. 그 귀한 술을 어떻게…”
“저번에 벌처스 경영진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에요. 당신이 아주 좋아할 거 같아서 이렇게 ‘특별한’날에 선물해주려고 아껴두고 있었죠.”
“특별한… 날이군요…”
금발의 여자는 평소처럼 감시관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일전에 굳어버린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녀 대신에, 홍시영은 방긋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고풍스러운 라벨이 달린 술병의 목을 잡고 꺼내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당신을 위한 선물이에요. 자, 마셔요.”
선물. 그녀의 주인인 홍시영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꿀꺽. 그녀가 마른침을 삼킨다. 취하고 싶다. 몽롱한 취기와 비릿한 와인의 향기로 그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렇게 피부를 갉아먹는 환영과 구역질 나는 자괴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 그래, 이 술은 그녀의 죄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 위한 약이다. 그녀를 위한 최소한의 자비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 숨어있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쨍그랑-.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올라가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내리자, 깨어진 술병이 보였다. 그녀 시선은 깨진 병과 바닥을 적시고 있는 술에서 텅 비어있는 감시관의 손을 지나 감시관의 얼굴을 향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자, 마셔요.”
그녀는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당신을, 위한, 선물이에요.”
허공에 붕 떠 있던 그녀의 손은 잠시간 공중에서 갈 길을 잃은 채 떨리다가, 천천히 그녀의 무릎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보다도 더 느린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시관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변함없는, 웃는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떨궈 바닥에 깨진 병과 기어가듯이 바닥 위에서 퍼져가는 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방금 전의 첫 살인에서, 그녀가 받았던 무엇인가 깨지는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깨어져 버린 것은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던 괴도의 긍지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과거의 그녀 자체였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깨어진 술병처럼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그녀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마셔요.”
주인이 그림자를 향해 다시 한번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흐른 술을 바라보았다. 그 황금빛의 수면 위로 비친 얼굴의 눈가에는 눈물이 젖어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을 향해 고개를 파묻었다.
-794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실제로는 2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겐 20년으로 느껴질 만큼 긴 시간이었다. 주인의 그림자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그녀 방에 걸린 달력은 수 개월 전의 상태 그대로였고, 하루하루가 무슨 요일인지조차 그녀는 관심 없었다. 단지 그녀는 기계적으로 충실히 그녀의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덕분에 이제 비릿한 피 냄세와 비명소리도 어느 정도 그녀에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술에 대한 그녀의 집착도 더 깊어졌다. 그런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홍시영은, 그녀가 일을 잘 처리할 때마다 귀한 술을 선물하거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날도 그러한 날들 중 하나였다.
“어떤가요. 음식은 입에 좀 맞나요?”
“물론이죠. 감시관님. 매번 이렇게 얻어먹어도 괜찮은지 몰라요.”
“당신이 잘해준 것에 대한 보상일 뿐이에요.”
감시관은 그렇게 말하며 포크로 핏빛이 도는 서로인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 안에 넣고 있는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어쩐지 과거의 홍시영과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던 싸늘한 눈빛이 아닌, 조금은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녀를 완전히 길들였다는 충족감 때문일까? 아니면…
“사실 당신에게 드릴 선물이 또 있어요.”
“혹시 술인가요? 이번엔 뭐죠? 전 루이자도 샤블리가 좋은데…”
“술은 안 돼요. 내일 당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요. 대신에 당신에게 술보다 더 ‘특별한’ 것을 드리려고 해요.”
‘특별한’이라는 단어를 듣자, 스테이크를 썰던 여자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홍시영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새하얀 봉지였다.
“티백은 아닌 것 같고… 약인가요?”
“맞아요. 정확히는…”
그녀는 물이 담긴 글래스 잔을 탁자 가운데로 놓았다. 그리고는 약봉지를 뜯어 글래스 잔에 가루를 털어 넣었다. 가루가 녹으면서 작은 기포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독약이에요. 일반인뿐만 아니라 클로저 마저도 한 알로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독약이죠.”
“이것이… 제 선물이라고요?”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맞아요. 이건 제가 당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권한이에요.”
홍시영이 독약을 탄 물이 담긴 글래스잔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원하신다면 이 약을 먹어도 돼요. 선택은 완전한 당신의 자유에요. 그걸 먹으면 고통 없이 아주 우아하게 죽을 수 있어요. 과거의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죽음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자살시도는 그녀의 초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에 이어지는 끔찍한 형벌의 시간 때문에 나중에는 죽음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그녀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운명이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드디어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그녀는 의심한다. 이것이 정말 독약인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평범한 가루를 독약으로 속이고 그녀를 시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녀에게는 다시 긴 조련의 시간이 올 것이다. 홍시영, 그녀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완전한 자신의 그림자로 만들기 위해, 다시 한번 그녀의 자아를 조각내버릴 것이다.
… 아니….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녀에게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주인이 있었다. 그녀는 절대 그녀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조차.
“감시관님도 정말 엉뚱하시네요.”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쓴웃음을 지으며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투명한 잔 속에 담긴 물을 바라보았다.
“저는 당신의 그림자. 제가 있을 곳을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닌 홍시영 감시관님이에요.”
그녀는 잔을 천천히 기울여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냈다. 바닥에 떨어진 액체가 바닥에 깔린 카펫를 축축하게 물들였다.
“하하…”
잿빛 머리칼의 여자는 한 손으로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작게 웃었다.
“하하하하!!”
뒤이어 주인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은 듯, 과장된 몸짓으로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아… 정말로, 정말로 기분 좋군요! 나의 사랑스러운 그림자. 당신은 정말 최고에요.”
“과찬의 말씀이세요.”
그림자도 그녀를 향해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녀는 과거에 한번 그녀의 긍지가 깨지는 것을 느낀 적 있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그림자의 삶을 살면서도 이따금씩 그 깨어진 조각들을 돌아보고는 했다. 그리고는 그보다도 더 가끔씩, 언젠가는 저 조각을 다시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번 깨어진 조각은, 다시 맞출 수 없다. 다시는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과거의 자신은 이미 죽어 없어졌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1131
“하피… 하피…!”
그녀를 부르는 티나의 목소리에 하피는 문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는 헤카톤케일 웨폰이 내려친 충격으로 산산조각이 나 있는 콘크리트 잔해와 그 사이에 진득한 핏덩이와 함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려있는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이제 가야 한다. 늦기 전에 용의 영지로 향한 팀원들을 지원해줘야 해.”
“아… 네…"
하피는 여전히 그것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티나는 탄창을 점검하던 손짓을 멈추고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티나의 시선을 느낀 하피는 굳어진 표정을 고치고서 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피, 하나 질문해도 되겠나?”
티나는 약간은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나는… 이제 점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의 감정이 어떨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너의 그런 반응…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반응이라뇨?”
“너는 왜 눈물을 보이고 있는 거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촉촉한 물기가 그녀의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옷 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 티나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도 잘 모르겠군요. 인간의 감정은 생각보다 아주 복잡한 것이거든요.”
그녀 또한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분노, 두려움, 증오. 그것만이 하피가 그녀에게 느끼는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에 대한 믿음을 뒤틀린 방식으로밖에 확인하지 못하는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배신당하기 직전까지도 그녀를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다른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사과하겠다.”
“아뇨… 전 괜찮아요. 자, 그보다 우리에겐 이럴 시간 없잖아요? 어서 움직이자고요. 우리, 늑대개 팀원들을 위해서요.”
“좋다. 앞장서지.”
티나는 마지막까지 근심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먼저 허수공간에서 꺼낸 와이어를 타고 다른 건물을 향해 도약했다. 하피는 멀어져가는 티나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쓸쓸하게 누워있는 그녀의 주인을 곁을 스쳐 지나간 차가운 바람이 피비린내를 실고 그녀에게 불어왔다.
‘당신은 영원히 제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
홍시영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느껴졌다.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잿빛 여자의 차가운 눈빛이.
“당신이 맞아요. 그러니, 작별인사는 하지 않을게요. 당신은 언제나 제 안에 있을 테니…”
그녀는 몸을 틀어 티나가 움직인 방향을 향해 도약했다. 그녀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 검은 새가 그려진 카드가 불어오는 미풍을 타고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
티나 출시 때부터 생각해두었던 하피 트릴로지(하피VS티나, 지옥의여자-홍시영편, 지옥의여자-하피편)을 드디어 이렇게 끝냈네여. 사실 말이 하피 트릴로지지 실제로 하피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은 건 이 편인거 같네여.
이 편의 마지막 부분은 이전에 제가 썼던 하피VS티나의 결말에서 이어지는 부분이에여.
개인적으로 하피는 클로저스 캐릭터중에서 가장 복잡한 캐릭터인거 같아여. 물론 조트슨이 정말로 이렇게 복잡한 하피를 구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여. 확실한건 스크립트를 통해서 그걸 충분히 어필하지 못했던 거 같아여. 그게 늘 아쉬워서 시작한 문학질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번 편으로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대강적인 시즌1까지의 하피 이야기는 끝낸거 같네여. 공대생에, 읽는 책이라고는 전공책 밖에 없는 이과충이라서 필력이 후달리는 점은 예쁘게 봐주세여.
사실 하피 생일 때 이 글을 올리고 싶었지만 시험기간 땜에 넘 바빠서 글을 제대로 못 썼어여. 여전히 시험기간 중이긴 한데 바이올렛이 나오기 전에 하피 스토리를 끝내고 싶어서 좀 무리해서 후딱후딱 써봤어여.
바이올렛이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다음에는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한번 써볼까해여. 그리고 시즌2의 하피나 티나 이야기, 혹은 늑대개 캐릭터를 싹 다 집어넣은 이야기도 써볼 생각이에여.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는 많은데 그걸 손으로 옮기기가 쉽지않네여.
재밌게 보셧으면 제가 쓴 다른 글도 한번 읽어주세여.
그럼 다음문학에서 또 만나여.
하피VS티나
메인홈피
클겔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losers&no=2299263&page=3&exception_mode=recommend
지옥의 여자 -홍시영편
메인홈피
클겔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losers&no=3100407&page=1&exception_mode=recomm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