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의 기사(Knight of Janus)-5편
에피메테이아 2016-05-22 0
어째 여기서는 야음을 틈탄 연재를 주로 하게 되는 것 같군요.(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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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왁**껄한 하루가 다 지나갔다. 모두가 가버린 사무실 안에서, 소피아는 홀로 상념에 잠겨있었다. 해가 진 하늘은 달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그 아이는 아직 과인이 불편한 것인가.’
그녀의 머릿속은 격렬히 흐르는 급류와도 같았다. 오늘 하루에 겪은 일들이 빛보다 빠르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피아의 뛰어난 사고력과 연산능력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계산하였으며, 분류된 기억들은 차곡차곡 두뇌 한 곳에 쌓여갔다.
기억들 중에 유달리 신경 쓰이는 것은, 다름 아닌 이세하였다. 검은양 팀에서 가장 뛰어난 위상능력자. 그러나 그것을 누구보다도 더 썩히고 있는 게으른 인재… 게임에만 푹 빠져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늘도 소피아를 대할 때 가장 어색하고 겉도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소피아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약 10년 전. 그러니까 세하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의 일이었다.
‘뭐하니? 얼른 인사드려야지.’
전쟁 이후로는 처음으로 다시 알파퀸, 서지수와 만나는 자리였다. 다시 만난 그녀는 조금 나이가 들어있었다. 반면 소피아는 지금도 그렇듯 항상 10대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쟁의 풍파를 겪으며 은근히 늘어난 주름살과 그림자는, 바라보는 소피아의 표정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자신을 본 세하의 반응이었다.
‘싫어요.’
싫다. 짧지만 강렬한 거부의 말… 그 한 단어에는 어른에 대해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듬뿍 들어있었다. 당황한 서지수가 소피아에게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세하를 다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서지수 본인도 그가 왜 그러는지는 이해하는 듯했다.
‘흐음.’
‘어머나 얘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이가 워낙에 어른들을 싫어해서요.’
왜 싫어하는지,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 방법은 많았다. 아이의 눈을 잠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물마시듯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 스스로 생각을 하였다. 잠시 동안의 연산과 과거의 기억을 조립해본 소피아가 바로 결론을 내렸다. 어두워진 표정을 거두고, 그녀가 눈앞의 소년과 자신의 옛 전우를 향해 살포시 웃었다.
‘괜찮단다. 저 아이라면 그럴 만도 할 테니까.’
‘아줌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세하야.’
서지수가 엄한 표정으로 주의를 주려했다. 그러나 살짝 들린 소피아의 손이 그것을 막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질책 대신 친절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어린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선생님처럼 사근사근한 어조였다. 은은하게 일탈을 유혹하는 간질거림도 포함되어있었다.
‘과인이 이래봬도 추리에는 일가견이 있느니라. 한 번 들어** 않으련? 학교수업보단 재미있을 거라 보장하마.’
‘그때는 꽤나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둘의 관계는 과외선생님과 제자와도 같았다. 지수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세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릴 적부터 게임에 푹 빠져있던 세하가 게임기를 놓는 때는, 어머니인 지수가 훈계할 때랑 소피아가 찾아올 때뿐이었다. 게임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면서 소피아는 어른을 싫어하게 된 아이와 가까워졌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다시 ‘찍힌’ 것 같았다. 그때와 달리 자신은 공적인 일로 온 것이었다. 세하가 싫어하는 소위 높으신 분으로서 말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수도 있겠구먼.”
그럼에도 소피아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기대가 되었다. 과거의 관계가 불안해졌지만, 바꿔 말하면 새로운 걸 쌓아올릴 기회이기도 했다. 늘그막에 찾아온 도전에 그녀는 열의를 조금씩 불태웠다.
“마스터.”
거기까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뒤편에서 은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도, 기척도 없었지만 목소리를 듣는 소피아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어디까지 알아보았느냐.”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향해, 소피아는 냉엄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그녀는 단일 무력단체로는 최강이라는 백십자 기사단의 기사단장. 강력한 힘을 휘두르며 미지의 적을 상대하는 위대한 존재였다. 소피아 뒤에 부복한 복면의 남성도 그걸 인지하였는지, 감정 하나 없는 냉철한 목소리로 보고를 진행하였다.
“수상쩍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첫째, 이 지역의 위상변곡률은 이상할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어느 날은 평소처럼 낮은 상태를 유지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차원전쟁 때의 그 상태처럼 극도로 상승함이 확인되었습니다. 마치 위상력 억제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 보고부터 무언가 수상쩍었다. 위상력 제어기의 이상이 의심된다는 말에, 소피아는 잠시 자신이 한눈을 팔거나 잘못 들은 것인지를 의심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귀는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고 그녀의 종복도 여느 때와 같았다. 보고에 문제가 있거나 소피아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네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은 잘 알 것이다.”
“물론입니다, 마스터.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근거는?”
몰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종이다발이 슥 튀어나왔다. 조금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그것을 낚아챈 소피아는, 보고서들을 뚫어버릴 기세로 훑어보았다. 몇 번이고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은 그녀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막대한 힘을 이겨내지 못한 종이가 으스러지고 가루가 되었다. 하얀 눈이 내리듯, 소피아의 발밑으로 흰 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신서울 지부장, 그 멍청한 책상물림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에……!”
“그것만이 아닙니다.”
“또 문제가 있단 말이냐?”
위상력 제어기에 문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지부장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 마땅했다. 더 문제가 있다니? 생각보다 심각한 신서울의 상황에 소피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둘째, 현재 신서울에서 S급 차원종이자 ‘이름 없는 군단의 참모장’이 가끔 목격된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보고는 아까보다도 더 기가 막혔다. 소피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한탄이 흘렀다.
“하!”
주군의 심정이 분노로 가득차자, 복면의 남성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보고를 처음 접한 자신도 기가 막혀했던 정보였다. 하물며 ‘그 참모장’을 직접 상대해본 소피아 본인은 오죽할까. 기껏 차원전쟁 때 손을 더럽혀가며 막아왔건만, 난데없이 다시 튀어나온단 소식이 듣기 좋을 리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안 좋게 겹칠 수도 있구나. 그래, 분명 그놈이더냐?”
“형상 자체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2개체로 분리된 상태. 허나 흔적으로 남은 위상력 등은 분명히 놈이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구나. 좋다. 다른 문제는 더 없느냐? 놀라려면 차라리 오늘 한꺼번에 몰아서 놀라야겠구나.”
한껏 비꼬는 말투에 복면의 남자가 몸 둘 바를 몰랐다. 자신을 향한 비꼼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에게서 나오는 투지와 살기가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꼴사나운 면모를 주군에게 보일 수 없던 그는 서둘러 보고를 이어나갔다.
“셋째, 이건 조금 추측성의 보고입니다만…….”
“말하라. 판단은 과인이 하겠다.”
“데이비드 리, 신서울 지부 국장에게서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최악의 소식에 이어서 이번에는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안 좋은 소식을 듣고자 마음의 준비를 한 소피아도, 거기에는 뭐라 반응을 못하고 얼어붙었다. 부하가 미리 경고했던 것처럼, 이번 보고는 밑도 끝도 없었다.
“출처는?”
“지부에서 일하는 몇몇 클로저들에 의한 보고입니다. 익명을 지켜달라고 하면서 소식을 전해줬지만, 필요하시다면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아니. 되었다. 그만하도록.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이곳 일이 안정되면 듣겠다.”
소피아가 관자놀이 짚었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인내심의 한계를 알려왔다. 더 들을 자신이 없어진 그녀는 손짓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복면의 남자는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다. 갑자기 왜 그 아이의 이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
휘하 기사단원에게 몇 번이고 강조했던 충고였다. 그 충고를, 지금 본인이 지키지를 못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아이에 대한 미심쩍은 보고. 모든 가능성을 판단하는 현명함으로도 이것만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모르겠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 패기 넘치는 양성 계획으로만 생각한 검은양 프로젝트에, 짙고 어두운 안개가 드리운 느낌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발을 담갔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더 깊이 빠져들어야만 알 수 있었다. 긴장,
또 긴장을 해야 할 듯했다.
식사가 끝난 직후. 검은양 팀은 퇴근하는 길이었다.
“세하야.”
“응?”
“그 아주머니 누구신지 알아? 아는 거 있으면 이야기 해주라.”
게임기에만 몰두하고 있던 세하는, 갑작스런 질문에 눈만 살짝 들었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 유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들러붙는 그녀를 보며 세하는 묵묵히 게임에만 집중했다. 손가락과 눈은 게임기 속 캐릭터들에게 열중하며, 입으로만 대충 대답을 해주었다.
“그냥 몇 번 본 적이 끝이야. 아는 거 없어.”
“에이~ 그런 것 치고는 많이 놀라던데?”
덤덤한 대답에도 유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송곳니가 아니라 이빨 전부를 드러내며 웃은 그녀는 세하의 옆에 들러붙었다. 세하는 오른쪽 팔로부터 전해지는 부드럽고 묵직한 압박에 얼굴을 붉혔다. 유리는 세하가 그러는 이유도 모르고서 그의 붉어진 볼을 이리저리 누르고 문질러댔다.
“응? 응? 아무거나 하나 말해주라.”
“너 아무한테나 이러면… 아니다. 됐다.”
뭔가를 말하려던 세하는 유리를 흘끗 보았다. 어차피 이 천방지축인 소녀는 어떻게든 대답을 들으려 할 터였다. 귀찮은 건 질색이었던 그는 말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늘은 맘 놓고 게임하기 그른 날인 모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가 운을 떼자 슬비와 미스틸테인도 가까이 다가왔다. 슬비는 알파퀸 이상으로 유명세를 타는 영웅에 대한 동경심으로, 미스틸테인은 그 또래다운 순수한 호기심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순식간에 청중(?)이 불어나자 세하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다.
“굉장히… 특이한 분이셨어.”
“특이?”
“어떤 식으로인지 물어봐도 될까.”
“신기한 분 같기는 했어요. 얼마나 특이한 분이세요?”
특이하단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더욱 반짝거렸다. 기대감 가득한 그들을 보며, 세하는 이걸 말해줘야 하나를 진지하게 망설였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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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소피아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면인지는 다음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