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광휘 비하인드(슬비)
이세계고딩깽판걸 2016-02-26 1
"처음부터 유니온은, 당신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최서희의 냉정한 말이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는 듯 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니온의 어두운 일면, 그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를 다시 클로저로서 전선에서 뛰게 하는 것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더군다나 자신을 다시 부른 것이 '그' 데이비드임을 생각해 보면 유니온이 지금에서야 움직인다는 건 오히려 늦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니온은 처음부터 데이비드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신서울의 영웅들에게 뒤집어 씌울 혐의를 꾸며내는 것이니 만큼 꽤 애먹었나 보군. 제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쓰게 웃는 것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지만, 다른 팀원들은 그렇지 못 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저런 표정을 짓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는데. 제이는 혼잣말을 삼키며 아이들 중에 그나마 침착한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소녀를 불렀다.
"리더."
"... 예, 제이 씨."
"세하와 유리를 데리고 이 곳을 빠져나가. 여긴 내가 막도록 하지."
침착함을 가장한 이슬비의 얼굴에 금이 가듯 경악이 서렸다. 방금의 그 말에서 누군가 하나를 버려야 나머지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임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안 돼요! 제이 씨를 놔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녀가 쉽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리더, 저들을 막을 수 있을만한 사람은 나 밖에 없고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을만한 사람은 리더 밖에 없어. 적당히 막다가 곧 뒤따라 갈테니 먼저 가라고."
망설임으로 흔들리던 눈빛이 이내 가야할 길을 비추고, 흔들림을 억누른 목소리가 다른 이들을 이끌었다.
"이세하! 서유리! 가자."
"하지만...."
"가야 해! 제발..."
제이는 멀어지는 발걸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뒷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들었다. 차원전쟁 때도 검은양팀으로 일할 때도, 동료들을 보는 맛에 살맛 났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불안정한 눈빛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 차츰 성장해나가는 걸 보면서 언제나 가슴 한 켠이 아렸다. 이제와서 유니온에 증오나 혐오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유니온은 예나 지금이나 밥맛이었고, 인류의 적은 차원종일지언정 올바름의 적이 차원종이 아니라는 것 쯤은 오래 전에 깨달았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감찰국 아가씨는 그걸 알까?
"고마워, 기다려 줘서."
"....남기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음... 이번 일이 끝나면, 저번에 약속했던 건강차나 한 잔 할까?"
제이는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끌려가서 버림받고, 불려와서 배신당한 영웅은 술을 들이키듯 약을 들이켰다. 그래도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그 자신이 생각해도 참 기가막힌 존재였다.
-
이슬비, 이세하, 서유리. 세 명이 얼마나 달렸을까. 그대로 도망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유니온 내부에서 유니온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검은양팀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존재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슬비는 문득 제이 씨는 처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눈치 채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미스틸테인이 독일지부로 재발령 났을 때부터겠지. 이상한 데에서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그 사람.
유니온의 정예요원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 목적은 제압이 아니라 사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한 충만한 살의가 실린 공격이었다.
저 사람들에게 맞서 싸워야 하지만, 저 사람들에겐 잘못이 없다. 사람과 싸우는 건 언제나 힘들었지만, 잘못이 없는 사람들과 싸우는 건 그 이상으로 훨씬 괴로운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어하는 공무원이 되어 내가 살고싶어하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는 팔이 무겁다. 그런 동정이, 감상이 칼 끝을 흔들었고, 그렇게 서유리는 쓰러졌다.
어른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제이 씨나 유정이 누나처럼 좋은 어른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른이란 더러우며 더러운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모순된 생각이 있었다. 나는 위상잠재력이 있는 아이였지만 위상잠재력만 있는 아이는 아니었고, 그걸 알면서도 무시한 채 필요한 것만 잘라서 보는 그 시선이 역겨웠다. 그리고 그 역겨움은 눈 앞의 멍청이들을 보면서 극도로 치달았다. 진실을 외면한 채 보고 싶은 것만 살아가는 더러운 어른들. 그런 울분이, 감상이 그 시야를 흐리게 했고, 그렇게 이세하도 쓰러졌다.
늑대개와 공범이라는 누명이 씌워진 지금, 저들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긴 하다. 그들이 보기에 지금의 검은양팀은 데이비드의 배신에 가담하고 늑대개에 의한 인류에 대한 반역에 동참한 천인공노할 범죄자들에 불과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 누명을 씌운 자들에게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런 생각이, 이상이 그 단검의 끝을 무디게 했고, 그렇게 이슬비도 쓰러지려는 찰나였다.
암적색의 폭발과 함께 굉음이 터져나왔다.
"아, 이슬비양. 진작에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게- 진작에 따라왔으면 좀 좋아. 어머? 꺄악! 세하가 망가져버렸어! 아까워라..."
이슬비는 자신들과 그토록 격렬하게 싸우던 클로저들이 간단하게 폭사당하는 걸 보며 약간의 허무함을 느꼈다. 애쉬와 더스트, 저들이 이제와서 나타난들 더이상 절망할 것도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 아닐까 하는 시니컬한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원종과 싸우다 죽는다면 한 명의 어엿한 클로저로서 죽는 것일테니까.
"슬비 양, 지금이라도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어때?"
"애쉬, 그냥 쟤도 죽여버리자. 세하도 죽었잖아."
"아, 누나. 이슬비 양은 그냥 죽여버리기 아까운 인재라고."
"쳇, 네 마음대로 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로 멍하게 저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이슬비는 이세하가 죽었다는 말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서유리는 어떻게 됐을까. 유리는 정이 많아서 제대로 싸우지 못 했겠지. 이슬비는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원종에 의해 잃은 것은 아니지만 차원종 때문에 잃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슬비는 정말 눈 앞의 존재들을 찢어죽이고 싶어졌다.
"그래, 이슬비 양. 지금 그 눈 아주 마음에 들어.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어?"
"그래! 우리랑 같이 가서 마음대로 다 해버리면 되잖아."
이슬비는 폐부를 쥐어짜듯 소리쳤다.
"너희들이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어. 내가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너희와 손을 잡는 일은 결코 없어!"
어렵게 말을 토해놓은 이슬비는 격렬한 기침을 하며 괴로워했다. 애쉬와 더스트는 그 모습을 즐겁다는듯 웃으며 바라보다가, 서로를 쳐다보고 피식 웃고는 다시 슬비를 바라봤다. 애쉬와 더스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슬비 양, 네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우리가? 언제?"
"그렇다 해도 딱히 신경쓰진 않겠지만, 슬비 양에겐 중요한 문제인 것 같으니까 얘기해 봐야겠군. 슬비 양, 우린 유니온 내부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다 알아."
이슬비에겐 더 말할 기운이 없었기에 눈빛만이 애쉬를 향했다. 다만 바로 전까지 뚜렷한 증오만으로 정립돼있던 눈매가 의아함에 의해 약간이나마 누그러졌다.
"늑대개가 무엇을 했는지도 알고, 그로 인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도 알고, 너희가 그들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된 이유도 알지. 그런데 슬비 양,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연관돼 있단 말이지?"
"그래! 전부 너희 유니온이 벌인 일이라구. 근데 애쉬, 늑대개란 이름 너무 촌스럽지 않아?"
"누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건 전부 너희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잖아!"
이슬비가 절규하듯 외쳤다. 애쉬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아아 이슬비양. 네가 당한 일을 잘 생각해 봐. 인간들은 칼로 누군가를 베면 칼에게 책임을 묻나?"
이슬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지만, 어차피 더이상 말싸움할 여력도 없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들은 어차피 인류의 적이며 부모의 원수이다. 이슬비는 대화하고 싶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침묵으로 대꾸했다.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잃었지만 고결한 영혼만은 잃지 않는군. 역시 이슬비 양이야."
"어차피 너희 인간들은 우리를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근데 인간들은 너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 배신자들이라고 느끼지 않겠어? 인간을 배신한, 차원종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어릴 때부터 줄곧 클로저로서 자라왔다지? 그 보람은 어때, 이슬비 양?"
"아주... 보람차..."
"그래?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다른 동료들이 언급되자 이슬비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제이 씨는 어떻게 됐을까? 미스틸테인은 무사할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게임기 때문에 맨날 지지고 볶던 이세하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지지가 않았다. 같이 한 것도 많지만, 같이 하기로 한 건 훨씬 많아서 가끔은 좀 난처하기도 했던 서유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함께일 줄 알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그 순간처럼.
부모를 잃고 차원종을 증오했다. 그 차원종을 죽이고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클로저가 됐고, 클로저에 매달려 클로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왔다. 차원종을 처단하는 것은 클로저이고, 훌륭한 클로저는 더 많은 차원종을 처치할 수 있을테니까. 소중한 것을 앗아간 차원종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혼자 생각하던 것이 어느 순간 입 밖으로 새어나갔고 그걸 들은 차원종이 질문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것을 앗아간 게 차원종 뿐일까?"
이슬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다. 차원종에게 복수하기 위해 클로저가 됐고, 클로저는 올바름을 지향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가르침 아래 올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했다.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그래! 부질없는 거야!"
"인간에게는 '위선'이라는 말이 있다지? 우리한테는 그런 게 없는데."
나는 왜 올바름을 추구한 걸까. 애쉬가 말했다.
"클로저가 되기 위해서."
나는 왜 클로저가 되려 한 걸까. 더스트가 말했다.
"복수하려고!"
복수의 이유, 이것은 자문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나의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애쉬와 더스트가 말했다.
"그들이 누굴까?"
'짐승'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손을 잡아."
"네 마음대로 복수하는 거야."
이슬비는 그들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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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를 위한 생략과 캐붕이 넘치는 졸문 읽어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레압이 나오자마자 위와 같은 망상에 시달리며 끙끙 앓았습니다.
다 맞추고 나니까 '이제 평화 속에 잠들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슬비가 리더로서 갖는 중압감을 살리지 못 한 것이 정말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