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의 약속. 이세하 -6화

리프리센트 2016-02-14 2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으으. 면목 없습니다. 설날이 끝나고 나서 곧장 글을 올릴 계획이었는데... 설날과 설날 다음날은 집안 어른들과 술. 다음날과 그 다음날은 친구들과 술. 요즘 술 때문에 정신이란 건 사라진지 오랩니다. 아무튼 늦게 된 것에 사죄의 말을 올리며 (사악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눈 갱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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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각 11시 반.

 

바깥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다. 얼어 죽지 않을까라고 생각되는 추위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분명히 약속을 잡은 것은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일 건데...

 

30분 일찍 왔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1시간 30분이 지나갔다는 것에서 집에 돌아가고도 남을 사유가 될 것이다.

 

모처럼의 휴일.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 위에서 게임기를 들고 방한도구로 무장한 성인의 모습은 솔직히 보여주기 부끄럽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하는 게임 이벤트를 위해서 부끄러움 정도야 감수할 수 있다.

 

"세하야!"

 

왔군. 드디어.

 

나를 이 추위 속에서 게임기를 하게 만든 원흉.

 

"서유리. 분명 니가 약속을 잡았을 텐데?"

 

덧니를 빗내면서 미소 짓는 유리가 굉장히 밉살스럽다. 말 한마디하는 것도 턱이 떨려서 제대로 하기 힘들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그래. 많이 기다렸지. 얼어 죽을 것 같아."

 

"엄마 심부름으로 급하게 동생들 학교를 다녀오게 되서..."

 

그렇군. 유리 동생 중에 누군가가 준비물이라도 집에 두고 간 건가.

 

"그런데 얼마나 기다린 거야?"

 

"2시간."

 

정말이지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이번 겨울은 왜 이렇게 추운거야.

 

"어디 들어가 있지 그랬어. 전화라도 하던가."

 

그렇단 말이지. 오늘 만나게 된 이유는 까맣게 잊은 거로군.

 

"나 오늘 휴대폰."

 

단 한마디로 유리가 깨달은 표정을 짓는다. 오늘 만나려는 이유가 휴대폰이니까.

 

"! 그렇지. 어제 세하가 폰으로 게임하고 있어서 슬비가 폰을 부쉈지."

 

그런 이유로 그나마 오늘은 비어있는 날이어서 휴대 전화를 사러 나오려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유리가 자기도 쉬는 날이라고 따라온다고 한 거다.

 

내 전화를 부순 이슬비는...

 

우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서 유리가 같이 간다는 말이 끝나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한 내가 나쁘다며 화를 냈었지. 화를 낼 건 나인데 말이지.

 

"그래도 어디 들어가 있지 그랬어. 몸이 다 식었잖아."

 

주변을 둘러봐라 들어가 있을 곳이 있나.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만나기로 해서 들어갈 곳이 안보였다. 유리가 와버리면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한 건데.

 

". 엄청 차가워."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차갑다고 말하는 유리를 끌고 번화가 안으로 들어선다.

 

"차갑지? 그러니까 아무 가게나 일단 좀 들어가자."

 

"?! 세하야. 잠깐만. 손 좀..."

 

뭐라고 하던지 무시하고 유리의 손을 잡아끌고 10분가량 걸어서 커피숍을 찾아 들어간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몸이 좀 녹길 기다린다.

 

"후우...이제 조금 따뜻해지네."

 

내가 몸이 녹기 전까지 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그렇게 미안한가?

 

"유리야."

 

"...?! ...?! 세하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유리가 귀엽게 느껴졌다.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평소의 행실 때문에 이 녀석이 예쁜 것을 잊고 있게 된단 말이지.

 

"왜 그렇게 놀라? 그냥 사정이 생겨서 늦은 거잖아? 연락 못한 건 내 잘못이 크고."

 

"...그래."

 

지금 한숨 돌리고 보니 유리 옷차림. 이렇게 추운 날에 짧은 치마라니 어쩌면 장갑과 모자로 무장했던 나보다 춥지 않았을까.

 

추워 보이는 건 둘째 치고 주변의 남자들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눈빛으로 사람의 위협도를 판별할 수 있으면 애쉬와 더스트 급의 재해가 아닐까.

 

평소에도 치마를 입기는 하지만, 위의 옷이나 치마를 보면 움직이기 쉬운 게 아니라 뭔가 한껏 꾸민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 얼굴과 몸매로 멋을 부린 게 잘못인가, 그걸 정신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이 잘못인가. 가끔 생각하는데 이 녀석은 자기가 예쁘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해줬으면 한다.

 

그건 그렇고 세린 선배는 어떤 옷이든 자기의 순수함으로 물들이는 것 같은데 유리는 어떤 옷이든 그냥 어울리는 것 같다.

 

"너 안 추워? 치마 짧아 보여."

 

순간 등줄기로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오싹하고 스쳐지나갔다. 엄마가 마음에 드는 옷을 샀는데 안 예뻐요라고 솔직히 말했다가 반쯤 혼이 나가게 되었던 그때의 느낌과 동일하다.

 

"!"

 

봐라. 유리가 그야말로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뭐야.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말끝이 뾰족하다.

 

그래도 싫은 건 싫다.

 

"아니. 그냥 너를 보는 주변의 남자들과 여자들의 시선이 싫어서..."

 

유리는 인간 페로몬을 발산하는 것 같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 쪽에서도 가끔 같이 있는 날 죽일 듯이 바라보니까.

 

"뭐야. 그거 내가 부끄럽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냐. 저렇게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면 니 옆에 서있는 내가 초라해 보이지 니가 부끄러울까봐?

 

"아니. 다른 사람들이 그냥 니 몸에다가 시선 주는 게 그냥 싫더라구."

 

"......세하야. 그거..."

 

왠지 태도가 돌변해서 아까 전처럼 불안에 떠는 어린 사슴 같아졌다.

 

"슬비나. 캐롤 누나나. 너나. 다른 사람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싫어서..."

 

맞았다. 도대체 왜?!

 

 

 

 

 

 

커피숍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오늘의 목적인 휴대폰 가게로 향했다.

 

신종 휴대폰이라던가. 잘 팔리는 휴대폰이라던가. 가게 사장님이 권유했지만 나의 목적은 화질 좋고 화면 크고 게임이 가장 잘 돌아가는 폰이다.

 

그러다가 휴대폰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유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야. 뭐하고 있어?"

 

어떻게 해서든 다양한 휴대폰을 권유하는 사장님과 실랑이를 피해서 유리에게 다가간다.

 

"휴대폰 구경. 예쁜 휴대폰들이 엄청 많아. 세하야. 이것들 좀 봐봐. 이건..."

 

마치 자기가 휴대폰 가게 점원인 것처럼 열과 성의를 다해서 설명하고 있다.

 

"유리야. 너 언제부터 휴대폰에 관심이 많았어?"

 

"그냥 너랑 오기로 했으니까 찾아봐두면 알려주기 편할 것 같아서...공부 좀 했지. 헤헤."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유리를 보고 있으니 미소가 지어진다. 무엇보다 공부하는 걸 가장 힘들어하는 유리가 무언가를 알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다가 유리의 주머니 사이로 휴대폰이 삐져나와 있는 것을 봐 버렸다. 그야말로 언제 나왔는지도 잊어버린 옛날 기종. 유니온에서 한참 전에 제공했을 휴대폰이었다.

 

아끼고 또, 아껴서 가족들과 한우를 사먹을지언정 휴대폰을 사는 것에 돈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가.

 

"아저씨. 커플폰 보여주세요."

 

"? 세하야. 커플폰이라니?"

 

". 커플폰 말인가요? 그건 이 기종과 이 기종이 잘 나가죠."

 

어리둥절해하는 유리의 말을 막으면서 가게 사장님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신다.

 

"괜찮아. 난 이 휴대폰으로 만족하는데...아직 바꿀 생각은 없어. 그리고 커플..."

 

"너 저번에 휴대폰 화면이 잘 안 눌러진다고 그러지 않았어? 분명 엄청 속상한 표정이었는데?"

 

"그건 그렇지만..."

 

망설이고 있는 유리를 대신해서 가게 사장님과 일사천리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휴대폰을 커플폰으로 사고 요금까지 모두 커플로 계약시켜서 유리에게 건넨다. 게임만 잘 돌아가는 폰보다 비싸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폰이다.

 

그리고 왜 커플폰이냐 하면...그래도 그게 더 싸게 먹히잖아? 합리적인 선택인거지. 진짜 커플도 아니니 요금으로 싸울 일도 적을 거고...얼굴까지 안 볼 정도는 안 될 거야. 아마도...

 

"내 마음대로 휴대폰 바꿔서 미안해. 그래도 내 나름대로 휴대폰 사주는 것에 어울려 주는 너한테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

 

"... 그래도 고맙긴 한데 한우가..."

 

, 그 한우 이야기냐.

 

"오늘 저녁 한우로 사줄게."

 

"정말? 세하 너. 분명 약속했다? 이제 와서 무르기 없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야 새로운 휴대폰으로 관심을 돌린다.

 

"...여보세요? 정미정미?"

 

슬비나 제이 아저씨. 유정 누나. 세린 선배. 정미. 자신과 알고 있는 모두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 정미야. 그래서 세하가 커플폰으로 휴대폰 사줬다? 어디냐고? 강남역 부근인데 왜? 여보세요? 정미야? 정미정미?"

 

갑자기 정미랑 통화가 끊긴 모양이다.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울렸다. 전화번호는 바꾸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더니 찍혀있는 전화는 유리와 통화했던 정미의 전화다.

 

"여보세요?"

 

"! 이세하."

 

목소리가 매우 기분 나빠 보인다. 항상 나한테 화가 나 있는 정미니까 예상은 했다만...

 

"정미? 아까 유리랑 통화하더니 끊어졌던 거야?"

 

"...맞아. 통신상태가 이상해서..."

 

왠지 모르게 끊어진 게 아니라 끊은 것 같은 건 기분탓이겠지. 정미는 3년 전부터 여전히 캐롤 누나의 조수로 일해서 지금은 캐롤 누나 대신에 미국의 유니온 본부로 잠깐 파견 나가있다.

 

외국과의 통신이라 끊길 수도 있겠지.

 

"아무튼 이세하. .........유리랑...사귀기로 한 거야?"

 

왠지 굉장히 불안해 보이는 것도 기분 탓...은 아닐 거다. 유리랑 친한 사이였으니 유리의 교제 상태가 궁금하긴 할 거다.

 

"아니. 사귀는 거 아닌데?"

 

"누구야? 정미정미?"

 

옆에서 물어오는 유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안도한듯한 정미의 한숨이 들려와서 유리를 돌아본다. 이 녀석 페로몬이 정미에게도 먹힌 건가? 나한테 화만 내는 정미니까 안도하는 건 유리에 관해서겠지.

 

"그래. 유리 걱정은 하지 마. 니 눈에 찰 정도의 녀석이 아니면 내가 통과 시키지 않을 거니까."

 

"...그런거 아니야. 하여간...둔탱이."

 

"? 다시 들려줄래? 마지막 잘 안 들렸어."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으려 그래?"

 

억울하다. 안 들린 걸 안 들렸다고 한 것 뿐인데... 그리고 꼬치꼬치 라니...

 

"아무튼 유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명심해. 이세하."

 

"알았어."

 

그 뒤로 안부나 생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한 뒤 정미와의 통화를 마쳤다.

 

"정미가 뭐래?"

 

물어오는 유리에게 답해준다.

 

"그냥 통신상태가 안 좋아서 끊어졌다고 그리고 니 걱정이었지."

 

"그래? 헤헤. 우리 정미정미. 나 없다고 혼자 울고 있지는 않겠지?"

 

"그럴리가 있겠냐."

 

정미를 마지막으로 유리의 '전화 바꿈 통보 전화'도 끝난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한우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먹으려고 계속 물어보는 건데?"

 

"한계치까지?"

 

...이거 물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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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뭔가 글이 늘어진다고 해야 할까요. 전투 신도 그렇지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능력 부족인 듯도 싶고...어찌 되었든 이번 화는 잠시 쉬어가는 화라고 하겠습니다. 다음 화부터 천천히 세하를 괴롭히도록 해볼까요. 흐흐흐.

우선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24-10-24 22:58:5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