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태세린] 주마등

M42오리온대성운 2016-02-09 3


https://youtu.be/5DUCKGyojpE


bgm입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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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아무것도 없는 꿈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차원종 따위는 흔적도 없었다. 서울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각자의 일상으로 분주했다.

병에 걸릴 것처럼 무정하게 눈부신 태양이 우선 눈에 들어왔고, 말끔한 하늘이 다음으로 눈에 들어왔고, 주위에 가득한 일상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너와 나는 카페에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너는, 아니었던 것도 같다. 언제나처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눈치나 보던 꼴이란.

나는 꿈 속에서, 무엇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한가롭게 일상을 거닐고 있었다는 건 알겠더라. 너와도 늘 함께였다. ..지금까지 그랬듯.

너는 시답잖은 얘기를 던졌고 나는 가시 어린 농으로 받아쳤다. 너는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고 나는 코웃음을 치며 널 들여다보았다.

글쎄, 꿈에서마저 넌 왜 내 옆에 있었냐. 멍청한 나는 꿈에서도 네게 예쁘단 소리를 하지 못했다.

늘 진심과 다른 소리만 입에서 튀어나왔다. 호박아, 멍청아, 무능한 놈, 온갖 독설에 네가 상처입었을 게다. 미안했다.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는데.

내 말에 잠시 눈치를 보다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너, 마치 종달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 네가 말할 때 시간이 춤을 추고 햇빛이 축복했다.

그건 원래도 그랬었는데, 하고 중얼대니 네가 네? 하고 되묻더라. 또 너를 까내리며 얼버무렸다. 나란 놈은.


​-딸기 파르페로.

-아, 저도 같은 걸로..

-딸기 좋아하냐?

-네, 네...

네가 딸기를 좋아했던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설마하니 나 때문은 아니지? 아, 제발, 날 따라오지 마. 그러면 안돼..

네가 가끔씩 웃을 때마다 호박이라고 부르지 말걸 후회를 한다. 네가 자책할 때마다 무능하다고 하지 말걸 후회를 한다.

오세린, 넌 능력 좋고, 누구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다. 꽃같은 여자다. 재능도 넘치고 참하고 소박하고...

내가 데리고 있는 건 정말 분에 넘치는 짓이다. 하지만 미안해, 다른 놈과 같이 다니게 놓아둘 수가 없었다. 행여나 너무 순박해서 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네 옆에 다른 사내놈이 붙어있을 때마다 불안해서 괜히 욕을 하고 ... 욕심을 부렸다.

넌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참을 떠들어대더라. 생각해보면 넌 원래부터 그랬었다. 내가 무시하고 담배나 뻑뻑 펴대도 굳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입을 다물라고 하면 잠시 조용해지더니, 조금 있으면 어색했는지 또 입을 열고,

난 잠깐 듣다가 다물라고 윽박지르고, 그랬었지.

그럴 때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 자기가 무능해도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는 둥 나를 추켜세우지 않았던가.

난 맞장구나 치고 널 까내리고, 넌 반박하기는커녕 입을 다물고.

그래도. 그래도 너랑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던 게 즐거운 거였는데.

그 때 좋은 말 열심히 해둘 걸, 지금에 와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꿈을 꾸었다. 너와 한참을 카페에서 얘기하는 꿈이었다.

별 얘기도 아니었는데 한 마디에 너는 웃고, 한 마디에 빈정대도 너는 웃고, 한 마디에 대답하면 모든 게 환해지고...

꿈 속에서 너와 나는 평온했다. 산들산들, 산들..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가고, 그 어떤 전란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행복했다.

오로지 아름다운 너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아아 꿈이, 끝날 때,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닿지 않는 비명만 질러댔다.

제발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나-너 김기태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앞의 그 사람을 제외한 어떤 목표도 쫓지 말고 제발

오세린에게만 집중해달라고 점점 햇빛 속에 사라지는 자신에게 외쳤다.

제발 꿈 속에서만이라도 우리 함께 있었으면.




비명을 질러대다 눈을 떴다. 깜깜했다.

그렇지, 지하구나. 뼈 깎이는 소리.

몽롱한 정신으로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용들이 나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그제서야 격통이 올라왔다.

그런데 왜인지, 나는 아파서가 아니라, 서러워서 울부짖었다.

이 멍청한, 멍청한, 멍청한,

왜 일상에서 벗어나려 했는지...


고통이 서서히 멀어졌다. 여전히 정신은 멍하다.

시야가 흐려지며 닫힌다. 눈이 닫히기 시작했다.

또 꿈을 꿀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앞으로 그럴 일이 없겠구나.

영영 너와는 작고하게 되었다.


산들바람은 다시는 불지 않겠지. 이젠 폭풍이 지나가겠지.

그렇게 나는 잦아들었다.

2024-10-24 22:58:5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