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페이퍼를 쓰자!

회계사 2015-04-06 4



제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 앞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새하얗다. 다시 말해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는 백지란 얘기다.

마치 지금 제이의 상태처럼.

'정말 미쳐버리겠군. 넉 줄 이상의 장문을 쓴 적은 시말서를 썼을 때 빼곤 없었는데'

그것도 전시를 감안하여 넘어갈 수 있는 것을, 무서운 누님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누님은 단 한번도 시말서를 쓰지 않았었지. 지금 생각해보건데 누님것까지 내가 쓴 것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그녀의 아들에게 눈길이 간다. 다행히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렇게 티가 나진 않았다.

"……."

보아하니 알파퀸은 자신의 태업을 아들에게까지 넘겨 왔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게임기를 내려놓고 이세하는 진중한 표정으로 펜을 들고 글을 쓰고 있었다.

그 맞은 편의 독일 소년은 장하게도 한글로 또박또박 그림 그리듯이 작문을 하고 있고, 제이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대장님은 망설임 없이 일필휘지로 종이에 석탄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지금 제이가 종이를 바라보게 된 원인이 된 검도 소녀는

"끄응~."

마치 억울하게 엮인 사건으로 A4용지 5장 분량의 반성문을 써야하는 상황에 놓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제이는 전혀 동정이 가질 않는다. 이 롤링 페이퍼의 발안자는 다름아닌 그녀니까. 

'롤링 페이퍼라…. 전쟁이 끝나고 전우들의 무덤에 합장할 때 이후론 처음이군.'

그리고 그것이 최초의 롤링 페이퍼이기도 했다.





시간을 30분 전으로 돌린다면.

아스타로트의 처치 후, 신서울의 재해를 복구중인 지역을 돕기 위해 검은양팀은 팀을 나누어 복구를 돕고 있었다.

당일 제이는 미스틸테인과 함께 구로 일대를 순찰하고, 동아리방(제이를 제외 전원 그 명칭을 찬성했다.)으로 17시 즈음 복귀하였다.

다른 지역을 맡은 3인방은 학업을 위해 일찍 복귀하여 먼저 퇴근했을 것이다.

그랬을 터인데

"아, 아저씨다! 수고하셨어요 아저씨!"

"뭐야, 우리 소년 소녀들은 아직 볼일이 남은 건가?"

동아리방엔 세하들이 있어서 제이와 미스틸을 반긴다.

"우웅! 형 누나들 아직 안 가셨네요! 와아!"

"우리 테인이 보려고 남아있었지~♡'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출하며 유리에게 안기는 미스틸과, 온 몸을 관통하는 귀여움에 본인이 안아놓고서 어쩔줄 몰라하는 유리를 냅둔채

제이는 석연치 않은 표정의 슬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대장. 무슨 일인거지? 문제라도 생긴건가?"

"아니에요 제이 씨. 그게 아니라…."

슬비는 말을 흐린채 유리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반응이라도 하듯 유리는

"아저씨! 우리들 뒤풀이 파티해요! 네?! 내일 주말이라 오늘 밤 새도 상관없단 말이에요~."

무서운 속도로 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그 말로 시작된 유리의 열광적인 언변의 내용을 이랬다.

[아스타로트도 물리친 뒤 그냥 넘어갔지만 제대로 된 파티나 뒤풀이도 안 하지 읺았느냐. 나름 신서울을, 나아가 한국을 지킨 영웅들인데 너무 검소하게 구는것 아닌가. 하다못해 우리끼리 모임을 가진 적도 없지 않는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팀의 리더로서 생각해 봐도, 적절한 보상과 단합은 팀의 결속력을 높이고 일의 능률을 고취시킬 수 있으니까요."

슬비도 유리의 말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세하는?

"오늘이라면 괜찮아요. 중요한 게임대회 일정도 없고 석봉이도 오늘은 야근 뛴다고 게임 접속 못한다고 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하도 꽤 기대하는 눈치다. 하긴 세하도 파티같은걸 좋아할 만한 나이의 청소년이니까. 게다가 또래 친구들간의 모임이라면 더더욱.

우리의 독일미소년 미스틸테인이야

"아핫! 파티에요? 정말로? 전 턱포키 먹고 싶어요!"

말할 필요도 없다.

제이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직까지 재해복구지역에서 큰 이변은 없었다.

오늘만해도 스케빈저 몇 마리가 나타났지만 특경대들 선에서 처리가 가능했었고, 말렉같은 A급 차원종들이 나타난다고해도, 강남에 현재 비번인 정식요원들이 몇명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테지.

"후, 나도 딱히 반대는 하지 않지만 말이야…. 유정씨한테는 물어본거야?"

"아뇨. 오늘 언니가 많이 언짢은 상태라, 파티라고 말하면 그…맥주를 들고 오실 기세였던지라." 

"쿨럭. 아, 알만하군."

몇일전 용의 전당이라는 새로운 스테이지(?)의 발견 당시 유정씨가 보여준 충격적인 자태는, 모두에게 언급하면 안될 금기사항이 되어있었다.

우정미가 지나가는 말로 그 후 캐롤리엘이 캔맥주를 싸들고 유정씨에게 몇번 대쉬했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제이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캐롤리엘도 맥주를 좋아하는가보다하고 넘겨짚을 뿐.

'그래도 나중에 유정씨가 자신을 빼고 파티같은걸 열었다는걸 알면 엄청 실망할텐데 말이지.'

"네? 제이 아저씨? 우린 검은양이라는 팀인데도 다섯명이 제대로 모인적이 몇번 없잖아요? 마침 기회가 왔으니까 후딱 파티해봐요~ 네?"

아직도 미스틸을 품에 안은 유리가 맹렬한 기세로 제이에게 붙어온다.

풋풋한 여고생의 돌진과 미소년의 순수한 눈망울이 어우려져 뿜어내는 굉장한 에너지에 제이는 절로 뒷걸음질치며 품 속에서 약을 찾아버렸다.

"그, 그렇군. 나도 찬성하지. 그런데 파티라고 하면 음식이나 소품같은것이 필요하지 않나? 지금부터 사러 나가야…"

"쨔잔!"

유리가 급격히 방향을 틀어 음속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거기엔 보는 순간 '이걸 먹으면 100% 살이 찌겠군!'하고 깨닫게 되는, 그러나 그 대가만큼 유혹적이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로 가득차있었다.

"…미리 음식을 사왔었군? 대장?"

슬비는 제이의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을 회피했다.

"너무 그러지 마요. 아저씨. 슬비가 팀의 리더로서 자비로 산거에요."

세하의 구원투에 제이는 한발 물러난다.

"후, 우리 대장님은 마음씨가 곱구만. 그런데 영수증을 끊었다면 경비 처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물론. 알고 있어요."

슬비가 진지한 표정으로 치마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었다. 

역시 리더감이야. 제이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여줄 수 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대장이랑 유리가 음식을 셋팅해보라구. 남성진은 자리를 만들어보도록 하지."


 



그렇게 야심차게 시작된 제 1회 검은양 파티는 5분만에 파국을 맞이한다.

바꿔말하면, 각자 작전구역을 돌고 저녁시간에 귀가한 검은양팀원들의 위장의 크기가 전체 음식의 부피보다 압도적으로 커다랬다는 얘기다.

모두 허망한 표정으로 빈 접시를 쳐다본다.

"우웅… 저, 턱포키 한 번밖에 못 먹었어요…."
 
"정말 놀랍군, 유리가 대식가일줄은 알았지만 우리 대장도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전부 제가 좋아하는 곳에서 사온 것들이라, 그러니까!"

"아하하하, 좀 더 샀을걸 그랬나. 세하야, 그러니까 내가 마트도 가자고 했지!"
 
"왜 날 걸고 넘어지는거야…. 음식 고른건 다 너네고 난 짐 들고 왔을 뿐이잖아."

세상의 험난함을 깨닫고 눈망울이 탁해진 미스틸을 보며 제이는 배달음식을 제안했고 나머지는 적극 찬성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메뉴 선택과 주문을 마친 제이는 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유리야. 보통 파티란게 이렇게 말없이 먹기만 하는건가?"

요즘 고등학생들한텐 이런 파티가 유행인가?

"네? 에? 음, 아하하하, 그,글쎄요? 전 검도가 끝나면 바로 집에가서 동생들 보느라 잘…"

다시말해 유리한테도 처음이란 얘기로군.

"저도 항상 집에 가서 게임하느라 잘 몰라요."

세하도 뭐 그럴 수도 있지. 위상력이 있는 아이란 배척당하기 쉬우니까. 슬비는… 더욱 모를테지.

"잠깐, 뭔가 무시당한 기분인데요."

테인이도 실험실에서 자랐다고 했으니 들어만 봤을 테지. 결국 파티를 경험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가.

"네? 제이 아저씨도 파티해본적이 없어요?"

"후, 높으신 분들이 하는 지루한 얘기들을 듣고 그들과 악수를 한 적은 있지만 말이야. 나와 친한 사람들과 앉아서 정답게 얘기를 나누며 춤을 추거나 사교를 쌓은 적은 없어."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알만한건 다 아는 나이다. 분위기가 좀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우웅…. 제이 아저씨는 왕따였던 건가요. 그치만 저는 제이 아저씨가 좋아요!"

아니, 모르는 애가 여기 있군.

"후, 저도 제이 아저씨가 딱히 싫은 건 아니니까요. 힘내세요 제저씨."

고등학생도 몰랐던건가?

"아니, 나 왕따 아니거든? 그리고 제저씨는 또 뭐야, 제이 형이라고 불러."

"오, 어감이 딱 들어맞는데요?! 제저씨 제저씨 제저씨!"

진심으로 맘에 든듯 유리가 몇번이고 되뇌인다.

제이는 빨리 대화의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야 '제저씨'란 말이 사라질 수 있음을 직감했다.

"자, 자. 음식이 올 때까지 그토록 원한 친목이라도 쌓자구. 어때. 그동안 이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도 하는게?"

제이는 몇번 TV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모임을 가져 1박 2일로 놀러간다면 반드시 그날 밤 진실된 얘기를 나눈다는 것을.

유정씨와 술이 있었다면 그야말로 헤카톤케일의 재림이었겠지만, 다행히도 청소년들뿐이니 건전한 대화가 성립할 수 있겠군.

"우웅…. 딱히 없는데요?"

"그건 그러네. 힘내세요 제저씨."

"힘내세요 제이씨."

"하하하하하 제저씨 제저씨!"

방금 말 취소. 도와줘, 유정씨….

자신의 내면이라는 껍질속으로 들어갈뻔한 자아를 잡고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한 제이는 그 후 몇번이나 정신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이들의 의견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는데,

리더, 슬비의 의견인 '사랑과 차원전쟁의 베스트 에피소드 각자 5개 뽑기' 

세하의 의견인 '최초로 5인파티가 구현된 괴물사냥꾼 8G란 게임 파티플레이'

미스틸테인의 의견인 '다같이 크레파스 들고 서로를 그려요!'

유리의 의견인 '롤링페이퍼를 적읍시다!'

제이의 의견인 '일단 유정씨를 부르자."

이 중 하나를 투표로 뽑은 결과 슬비 1표, 세하 1표, 미스틸 1표, 유리 2표, 제이 0표로 유리의 안건이 통과된 것이다.

이 때 제이는 '일단 의견을 내긴 했지만, 자기를 빼고 이미 1차(?)를 끝낸 검은양을 보고 맥주 한캔을 원샷할 유정씨를 보느니 그냥 글을 쓰는게 나을 것같다.'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는 곧 거대한 후회가 되어 제이의 몸에 몰아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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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방 타임이 올때까지 끄적일 계획이었는데 fail...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2024-10-24 22:25:2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