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의 화이트 데이는 번거롭다(상)
사일로시빈 2015-03-16 8
"후, 3월 14일은 화이트 데이가 아냐."
제이가 엄숙하게 선언했을때 유리는 직감했다.
이 아저씨가 되도 않는 폼을 잡으면서 서두를 늘어놓을 때는 잔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유정과 제이를 비롯한 어른들이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라고 주장하는 바른 말씀들은 굳이 다시 들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마치 매주 주말 12시에 반본적으로 흘러나오는 노인보험 광고처럼 어떠한 변주도 없이 정직하게 한 말을 반복할 뿐이다.
이 시대의 여고생 서유리는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한 귀로 흘리면 되는 것이다.
"3월 14일은 파이의 날이라고. 원주율을 기념하는 수학자들의 날이지. 화이트 데이는 다 과자업체의 상술이야."
"그렇군요! 그치만 전 수학자가 아니니까, 화이트 데이로 할게요!"
유리는 공손히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9할은 장난이었지만 1할은 그래도 뭐라도 주지않을까 하는 심정이 있던 것이다.
제이는 몇 번 신음을 하고, 이내 싱긋 웃으며 재킷 안쪽을 뒤졌다.
"후. 어쩔 수 없지. 귀한 거니까 잘 받아두라고."
"아싸! 감사합니다!"
미리 감사인사를 한게 실수였다. 제이가 꺼낸 통은 절대로 초콜릿 색깔이 아니었다. 어떤 초콜릿 업체도 저렇게 포장을 하진 않는다.
제이는 은색 알갱이 몇 개를 유리의 뽀안 손바닥 위에 별을 박듯이 점점이 수놓았다.
"으, 은단이라니.... 또 속았다...."
"건강이 제일이지."
"전 아직 건강 챙길 나이 아니거든요!? 하다못해 목캔디라도 주세요!"
"내가 말 안 했던가? 당뇨가 있어서 단 걸 끊었다고말이야."
"우으으......"
"설마 싫은가? 그럼 다시 돌려줘."
"아, 안 돌려줘요!"
유리는 과감하게 은단들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얼굴로 파블로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재현하는 남다른 개인기를 선보였다.
"........이, 이게 어른의 맛...."
"실은 다른 어른들도 싫어하지만 말야."
"......물 마시고 올게요...."
유리는 가뜩이나 중력 때문에 늘어진 어깨를 더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대기실을 나갔다.
제이는 문이 닫힐 때까지 가만히 신문을 내려보다가, 이내 게임기를 두드리던 세하를 불렀다.
"이봐, 동생."
"지금 현실에서 로그아웃했으니까 말 걸지 말아주세요."
"현실에는 로그아웃이 없어. 정신 차리라고. 우린 화이트 데이인지 뭔지를 함게 견뎌내야할 동지잖아."
"전 이미 다 줬어요."
"유리한테도?"
"가장 먼저 줬죠. 뭐 어렵진 않아요. 그냥 몇 개 사서 녹인 다음에 틀에다가 굳히면 수제라고 우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답례로 뭐 받은 거 없어?"
세하가 대답이 없기에 제이는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세하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내리자, 그제야 이 꼬마가 얼굴에 열기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 형이 다 안다."
"뭐, 뭘 안다는 거에요?!"
"피임 잊지말고."
"역시 모르고 있잖아!"
"데이트할 때는 애들 무기 챙기지 못하게 하고. 그러다 배 탄다."
"너무 나갔잖아!!"
제이는 비록 기껏 장만한 노트북으로 홀로 바둑을 두는 앞서가는 쉰세대였지만, 인터넷 정도는 사용할줄 알았다.
제이는 여성들이 화이트 데이에 가장 받고싶어하는 물건이 다름아닌 반짝거리는 장신구라는 것을 알아냈다.
아니 자기들은 고작 아주 조금 비쌀뿐인 과대포장된 초콜릿을 온갖 생색을 내며 줘놓고는, 보석으로 돌려받겠다니.
정작 이 날을 만든 전국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이 알면 "커플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닥치고 사탕이나 사라고!"라며 통탄할 이야기다.
제이는 자신의 통장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저번에는 대출 때문에 은행에 갔더니 신용등급이 낮아 불가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신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대한 법률을 들이밀었더니 국가보훈처에다 문의하라고 돌려보냈다.
그래서 국가보훈처에 문의를 하니 신용등급을 매긴 신용평가회사에 문의하라하고,
신용평가회사에선 자신들은 외부등급에만 관여하며, 내부등급은 은행에서 자체적으로 매기므로 해당 은행에다가 문의하라는둥...
이 나라의 모든 부분이 이젠 껍데기만 남은 그을 핀볼마냥 튕겨내고 있었다.
제이는 발렌타인 데이 때 여성진들이 자신을 챙겼던 것을 기억했다. 실제 가치가 어땠든간에, 그에게는 꽤 따스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편의점에서 대충 포장한 사탕 바구니로 때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도 남자였고, 자존심이 있었다.
제이는 계산기를 몇 번 두드려본 후, 대기실에서 나가기 전에 세하에게 물었다.
"아, **에 좋은 약이 있는데 어때?"
"아, 아니! 필요없다니까요!"
"젊다는 건 좋군 그래. 약을 먹지 않아도 충분하다 이거지?"
"노, 놀리지 말고 빨리 가세요!"
매번 삐딱한 척 하지만 이런 부분에선 귀여운 점이 있다. 세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헝클어뜨린 후 밖으로 나왔다.
유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복도에 등을 붙이고는 날렵하게 모퉁이를 돌아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갔다.
초콜릿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다니며 산타마냥 전해주고 가는 것은 별로 모양이 나지 않았다.
제이는 사온 물건들을 코인 로커에 넣은 후, 작은 것부터 빼서 순서대로 전해줄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채민우에게 물어 송은이를 찾았다.
상부에서 내려오는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운행대기 중인 장갑차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자고있는 모양이다.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게 방탄복을 착용한 채로 누워있었음에도, 코를 골며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다.
자는 사람이 무슨 화이트 데이를 챙기냐며 그냥 갈 수도 있었지만, 제이는 예의상 물어보기로 했다.
"송경정 자나?"
물론 제이는 이 속 편한 여자를 간단히 깨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은이의 머리맡에 놓인 총-통칭 제니퍼 잭슨 4세-에 손을 뻗자, 침대에서 늘어져있던 팔이 채찍처럼 휘어쳐 올라왔다.
슬쩍 손을 빼자 은이가 한쪽 눈을 뜨더니 빙긋 웃는다.
"어라? 제이 아저씨. 어쩐 일이세요?"
몸을 일으킨 후 눈을 비비던 그녀는 한차례 하품을 하고 고양이마냥 기지개를 켰다.
매번 그렇게 이것저것 주워먹으면서도 살이 전혀 찌지 않을 정도로 일에 시달리는 그녀는 낮잠이 최고의 휴식일 것이다.
"방금 전 눈 엄청 무서웠는데."
"에이, 저처럼 순하게 생긴 애가 무서울리 없잖아요?"
은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가 감히 내 제니퍼에 손을 대지?'와 '어쭈, 이게 안 잡혀?'라는 의미가 담긴 눈길을 던졌었다.
제이는 그러려니 했지만 만약 보통 민간인였다면 벌써 손목이 비틀린채 주저앉았을 것이다.
"오늘이 실은 화이트 데이...라고 하더군?"
"아아. 그렇죠, 뭐. 하핫."
은이는 어쩐지 맥빠진 표정을 지으며 발끝으로 슬쩍 바닥에 있던 바구니를 밀어 그늘에 숨겼다.
'보급품'이라는 글자가 처량하다. 그녀가 발렌타인 때 보급품으로 많은 대원들의 속을 긁었던 것이 돌아온 것이리라.
특경대라면 "송은이 경정님! 여기 화이트 데이용 보급품입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같은 산통을 깨는 소리를 곁들였을 수도 있겠다.
"나도 보급품을 주려고 했는데 이미 많이 받았나보군."
"하하하. 그러게나말이에요. 이제 이 사탕을 전부 차원종 놈들 미간에 쏴버리려구요. 하하하."
화이트 데이때 여성들이 가장 받기 싫어하는 선물이 사탕이 아니던가.
아무리 먹보인 송은이라도 이렇게나 많은 사탕은 환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이는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조각 케이크다. 초콜릿 크림에 초코 쉬폰이라는 초콜릿에 모든 것을 바친 구성이다.
위에는 견과류와 특이하게도 깨가 뿌려진 반달모양 초콜릿이 올려져 있고, 크림 측면은 쿠키가루가 뿌려져 있다.
"저번에 자네가 줬던 거 말야. 이자치면 대충 이 정도는 나오겠더라고."
반쯤 감겨있던 은이의 눈이 곧 쟁반만큼 커졌다.
제이의 얼굴과 초콜릿을 차례로 보더니, 홱 낚아채서 장난감이 아닌지를 확인했다.
이후 우렁차게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자네가 먹기엔 양이 좀 적겠지만."
"물론 적죠! 그래도 고마워요!"
포크로 크림 한 가운데를 폭 찍어 입에 올린 은이는 볼을 부풀리며 무척 탐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완전 달아요! 한 입 드릴까요?"
"난 단 거 끊었어."
"다행이네요!"
"그럼 묻지를 말라고."
"헤헷, 절 위해서 이런 것까지 들고오시고. 아저씨치고 제법이네요?"
"왜? 새삼 반했나?"
"아저씨야말로 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눈을 깜빡이며 장난스레 묻기에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물론 많이 좋아하지."
"엣!? 에에...?"
어쩐지 허둥거리고 있다. 평소에 단정했던 머리가 막 일어난 탓에 삐쳐있어서, 좀 더 소란스러워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뱅글뱅글 굴리고 있기에 제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왜 그래? 설마 급하게 먹어서 체했나? 마침 여기 비장의 소화제가..."
"아, 아뇨.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 저기, 제이 아저씨는 아저씨고, 그러니까 에에.... 마음은 감사하지만..."
"응? 그 얘기인가? 물론 내가 송경정을 좋아하기는 하지만말야. 잘 먹고 잘 자고 늠름한 점말야."
제이의 대답에 은이는 순식간에 고요한 설원마냥 평정을 되찾았다.
굴러오는 눈사태를 보고 열반에든 산토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이는 이게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고, 은이는 곧 폭발했다.
"뭐에요!? 이젠 하다하다 제이 아저씨까지 절 남자취급한다 이거죠!?"
"지, 진정해. 내가 마침 진정제를 가진게 있...."
"부하놈들도 그렇고 채민우 녀석도 그렇고 유정씨도 그렇고 전부 저를 고릴라 취급하는 거죠!"
"지금 남자에서 진화한게 고릴라야? 그 다음은 혹시 공룡인가?"
"나도..... 나도 벗으면 끝내준다고요!"
은이가 훌쩍 방탄복을 벗기에 제이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친근한-동네 바보같은- 여성이라고 해도, 탈의는 연애세포가 개화되지 않은 남자인 제이에게는 아직 허들이 높았다.
이미 선글라스를 쓰고있음에도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가는 비명을 내지르던 제이는,
은이가 진압복을 완전히 벗기 전에 구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송은이 경정님, B블록에서 D급 차원종이 출현했습니다!]
"...........아, 알았어."
그녀는 곧 자신이 하던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뒤늦게 옷깃을 여미며 다시 진압복을 주섬주섬 챙겨입기 시작했다.
얼굴이 동그란 그녀였기에, 지금의 얼굴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트에 진열된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보였다.
은이가 도끼눈을 뜨고는 뾰족하게 말한다.
"두고봐요. 지금은 이 정도로 끝나지만 이걸로 끝난게 아니니까요!"
"어쩐지 그거 삼류악당 대사 아닌가?"
"제가 나중에 사복차림으로 와서! 제이 아저씨가 절 여자로 보게 만들 거라구요!"
"그, 그래?"
"그래요! 그래서 제이씨가 저한테 반하면, 보란듯이 그 자리에서 차버릴 거구요!"
"난 설마 차이는 걸 알면서도 고백하는 고릴라가 된 건가?"
금새 평정심을 되찾고 히죽거리는 제이였지만, 은이는 무전기를 마저 챙기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는 제이가 나가기 전에 더듬더듬 덧붙였다.
"그래도, 그..... 케이크는 고마웠어요. 다, 다음에는 더 비싼 걸로 부탁할게요!"
"뭐, 봐서. 그나저나 차원종 놈들이 나온 모양인데, 좀 도와줄까?"
"이건 우리 애들 수준에서 처리할 수 있어요. 저도 놈들을 제이씨를 생각하면서 다 쏴버릴게요!"
"본인 앞에서 파이팅 넘치게 외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제이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지만, 은이는 유치하게도 메롱을 날린 후 문을 닫았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온 쥐를 연상시키는 모양새로 특경대원들이 차곡차곡 차에 틀어박히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차가 떠난 후 제이는 일단 임무는 완수했다며 온 길을 되돌아가려다가,
기왕 밖에 나왔으니 포장마차에라도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향한 곳은 포장마차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여우네'란 브랜드를 걸고있는 곳이다.
야심찬 여대생-자칭 엘리트 공순이-이 등록금을 번다며 요식업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진 무허가 포장마차다.
그런 주제에 자기가 개발한 컵라면을 메뉴로 내건데다가, 어쩐지 점점 메뉴가 늘어나고 있다.
다행히 오늘은 그리 붐비지 않는 것 같다. 행주로 선반을 닦고있던 소영이 그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앗! 아저씨! 어서 와요!"
"손님은 왕인데 서비스 정신으로 한번은 오빠라 불러줄 때도 되지 않았나?"
"아저씨를 아저씨라 부르지 못하고, 오빠를 오빠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부르지 못하는게 아니라 안 부르는 거잖아. 그러다가 내가 진짜로 아저씨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래."
"글쎄요, 누구네 아저씨인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소영이 웃을 때는 가느다란 눈꼬리가 올라가며 혜성꼬리같은 모양새가 된다.
갸름한 얼굴에 얇은 입술까지 전체적으로 여우같은 아가씨다. 제이는 그녀를 볼 때마다 참 김시환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혹시 둘이 친척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정말 그런 의미없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여우같이 생긴 사람들한테 실례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저씨같이 생긴 사람들에게 아저씨라고 거침없이 호칭하는 이 아가씨처럼 말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냥 지나가다 보여서 왔어."
"저 보러 온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럼 왜 물어보는 거야?"
소영은 본디 붙임성도 좋고 인사성도 밝아서 인기가 많았지만, 단지 그런 성격 탓에 제이에게 살갑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저번달 말쯤에 제이는 이 포장마차에서 시비가 붙은 것을 보았다.
자칭 '음식점협회'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허가를 받지않은 포장마차라며 자릿세와 가입비 등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포장마차도 가설건축물 허가 및 식품위생 신고를 통해 시에서 합법적으로 운영할 수는 있다.
허나 그걸 듣도보도 못한, 공권력도 없는 협회 사람들에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제이는 많은 것을 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말을 걸고, 어깨를 붙잡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법대로 하시려면 서로 가자고 말했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마침 소영의 포장마차를 단골로 이용하던 특경대가 지나간 덕에 이 음식점협회는 사색이 되어 도망갔다.
소영은 이 일을 굉장히 고마워했지만, 제이는 영웅 칭송을 받기에는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상한 놈들 안 왔고?"
"그럼요."
"잘 팔리고?"
"어련히요."
"몸은 괜찮고?"
"무슨 우리 아빠에요?"
"오빠라고 해줘."
"안 해줘요."
"튀김은 잔뜩 서비스로 주면서."
"남으니까요."
"오빠란 말도 잔뜩 남아돌잖아."
"계속 오빠라 불러달라고 강요하는 시점에서 이미 아저씨같은 거라구요."
"이거 무슨 딜레마인가? 오빠라 불러달라고 하던지, 아니면 가만히 있던지 결국은 아저씨잖아."
"아저씨가 아저씨인건 궁극의 진리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42살?"
"이봐, 너무 갔어."
시시하게 농담을 주고받자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소영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매번 서있으면서도 곧은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여자란 굉장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고 속으로 감탄한다.
부드러운 여우모피처럼 윤이 나는 갈색 머리카락이 아래쪽에서 끓어오르는 수증기에 섞여 조금 희뿌얘졌다.
"뭐, 이걸 주려고 온 거야. 화이트 데이라며."
"우와! 고마워요. 외상으로 달아놓은 보람이 있었네요."
꺼낸 것은 동전모양의 초콜릿이다. 물론 그림이 그려진 금박 포장 덕에 금화로 보여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통에 담긴 초콜릿들을 일부러 흔들어 소리를 냈다. 소영이 어쩐지 부자가 된 기분이라며 웃었다.
"그냥 놔둬도 되겠는데? 이런 모양을 인테리어라고 하던가?"
"지금은 좀 오빠같은 단어선택이었어요."
"이제 좀 더 기세를 몰아서 오빠라고 불러봐."
"방금 말 때문에 다시 아저씨같아졌어요."
"어렵구만."
"그래도 받은 김에 서비스! 드시고 싶은걸로 드시고 가세요! 외상이 아니라 공짜!"
"아예 포장마차 창업을 하지 그래?"
"하아. 유니온하고 포장마차 중에 뭐가 더 좋은 직장처럼 보이세요?"
"포장마차."
"빨라?!"
"유니온은 좋은 직장이 아니라고. 벌처스보다는 낫다쳐도 그 나물에 그 밥이야."
"그러면서 아저씨도 결혼은 유니온에서 일하는 여자랑 하고싶겠죠? 그런 건, 다 가진 자의 푸념인 거라구요."
"글쎄. 굳이 비교하자면 난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을 거 같은데말야. 진취적이잖아."
제이는 오뎅 국물을 마시면서 이게 MSG를 썼는지 그냥 멸치로 육수를 낸 건지 물어봐야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이전에 소금이 너무 많다.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포장마차에서 간식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건강할 생각이라면 외식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쩐지 소영의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역시 불 앞에 너무 오래 서있던 거 아닌가? 바람이라도 좀 쐬라고."
"네?!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아요."
손을 파닥파닥 흔들던 소영이 후드를 푹 끌어내리면서, 예쁜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저기, 있잖아요, 제이 아저씨. 주말에 시간 있어요?"
"언제나 없지."
"제가 저번에 차원종으로 요리를 실험해본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잘 됐나?"
"아저씨가 시식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왕이면 먼저 먹어보고 먹이라고?"
"아직 완성단계는 아니지만 곧 완성이니까요! 제 요리교실에 초대할게요!"
"건강식품 개발이라면 좋았을텐데."
"부탁할게요 오빠!"
제이는 이럴 때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유정이라면 그런 수상한 음식, 용납할 수 없어요! 라며 화를 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또 몰래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이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때 차원종놈들이 나타나지만 않으면 좋겠군."
소영은 발돋움을 하면서 아까보다 산뜻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만나러 갈게요. 약속 있으면 다 비워두세요?"
"기억해두지."
"분명 맛있을 거에요."
"몸에 나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말야."
"몸에 좋다 그러면 곰발바닥도 드실 분이면서."
곧 손님이 왔기에 제이는 자리를 비워야 했다. 간단한 인사를 하면서 자리를 뜨자, 소영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을 흔들어주었다.
제이가 떠난 후에 온 손님은 떡볶이를 포장해달라고 하면서 소영에게 방금 간 사람이 남자친구냐고 물어보았다.
아줌마들의 오지랖은 알게 모르게 발동하는 법이다. 난데없는 잽에 소영은 잠시 깜짝 놀랐다가, 이내 장난스레 웃었다.
"비슷해요!"
**
합치려고 했는데 드럽게 기네요. 길어서 죄송합니다...
어째선지 제이하렘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