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큐브 ver.J 5부
브로유리 2015-03-11 4
"제이 씨…."
제이가 큐브에 들어간 지도 수 시간이 지났다. 분명히 A급 차원종들과의 전투까지는 밖에 있는 유정에게도 영상으로 그 정보가 전송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갑자기 큐브로부터의 정보가 차단되었고, 심지어 밖에서 큐브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 충격이 쉽사리 밖으로 전해지지 않게 튼튼하게 설계된 큐브임에도 그 곳에서 간간히 울려오는 미약한 진동에, 김유정은 제이가 무언가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대체…."
설마 정말로 차원전쟁 당시의 차원종이 구현된 것일까. 아니면 유정이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난 것일까. 큐브에서의 진동은 매우 불규칙하게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유정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진동이 전해지지 않으면 행여 제이가 쓰러진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진동이 전해지면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 제이가 걱정되었다. 유정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이렇게나 무능하다고 생각된 적은 처음이었다. 검은 양 팀의 관리 요원으로 배치된 이래, 위상능력자가 아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여러 번 있었다.
강남에서 출현했던 A급 차원종 말렉.
차원종을 소환하는 가방을 만들었으며, 강력한 위상력으로 구로 일대, 아니 신서울 전체를 위기에 빠트렸던 탈바크 턱스.
신강 고등학교에서 애쉬와 더스트에게 힘을 받고 완전한 차원종이 되기 전에도 무지막지한 위상력으로 모두를 위협했던 엠프레스 코쿤.
그리고 지금,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버린 강남….
그 중 단 한 번도, 유정은 자신이 위상능력자가 아님을 원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위상능력자는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현장의 일은 클로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진심으로 믿어주고, 보조하고,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그게 지금까지의 '관리 요원 김유정'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허나 지금은, 자신에게 위상력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의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도와줄 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웠고 슬펐다.
…왜일까? 왜 평소에는 들지 않았던 그런 생각이 지금 드는 걸까…? 평소의 유정이었다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고개를 젓고 되든 안 되든 큐브를 일단 건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정은 그저 제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무리는 하지 않을게.'
큐브에 들어가기 전, 제이가 뒤도 돌아** 않고 무심한 듯이 던졌던 그 말. 무심하게 느껴졌기에 오히려 그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럴 거야. 돌아와서는 쿨럭하는 기침 소리와 함께 넉살좋게 엄살을 부리겠지. 그래, 그게 내가 아는 제이 씨니까….
"제발…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
어느새 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채 혼잣말로 제이가 돌아오길 빌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힌 것 같았다.
"허억…, 헉…. …쿨럭, 케헥…! …크으윽…."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주먹이 오갔는지도, 얼마나 더 이 짓을 해야 하는지도 감이 오질 않는다. 이미 두 손은 감각을 잃었고 호흡을 할 때마다 수천 개의 바늘이 폐를 찌르는 것 같아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들다. 그렇지만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제이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거 진짜 알 수가 없는 놈이군…."
제이와 조금 떨어져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남자. 제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왜, 왜 그렇게까지 나와 싸우려고 드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그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거지? 이미 몇 번이고 말한 거라 더 이상 말하기도 싫지만…."
정말로 몇 번이고 말했던 내용이다. 분명한 힘의 격차. 그리고 제이와 남자의 상태. 이 안에서만 몇 번을 들었는지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그만큼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남자는 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기적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내가 왜 싸우는 거냐고 물었지."
어느 정도 숨을 돌린 건지 제이가 입을 열었다.
"인류를 지킨다는 사명…. 죽은 전우들의 의지….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남자. 남자가 얌전히 이야기를 듣는 듯하자, 제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데이비드 형한테 검은 양 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보호 요원을 맡았던 건, 나와 겹쳐보였기 때문이었어. '어린 나이에 차원종과 싸우는 전장에 선다.' 차원 전쟁 당시의 내가 그랬으니까. 이 아이들은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었지. 그 외에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순간, 아주 짧은 순간, 제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애들하고 같이 팀 활동을 하다보니까 팀원들이 마음에 들더라고. 게임만 하는 것 같아도 할 건 다 하는 세하. 팀의 리더로써 팀원들을 챙겨주며 노력하는 슬비. 언제나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모두에게 활력을 넣어주는 유리. 팀원 중에서 제일 어리지만 또 제일 열심히 싸우는 순수한 막내. 그리고…."
긴 갈색 생머리의 유능한 여자. 하지만 의외로 허당같은 면이 있고 감정을 숨기려고 하면 그게 겉으로 다 티가 나는 귀여운 여자. 그래서….
'참나, 나도 별별 생각이 다 드는군, 이거.'
그는 곧 작게 피식 웃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더 이상 그냥 나와 겹쳐보여서, 혹은 막연하게 애들이니까 지켜줘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 때문에 이 팀에 있는 게 아냐. 난… 이 팀이 마음에 들어. 그래서 이런 몰골이지만 싸울 수 있는 거고."
"뭐야, 그래서 이제 울프팩 시절의 전우들은 아무래도 좋다 이건가?"
"그건 아니지. 다만 내게 소중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제이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불길할 정도로 강렬한 붉은 빛이 도는 캡슐형 알약. 각오는 하고 꺼냈지만, 막상 붉은 캡슐을 보자 제이의 손이 살짝 떨렸다.
"…이봐, 정말 그걸 지금 쓸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렇다. 누구보다도 제이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던 그것. 복용하는 즉시 전** 이상의 신체 능력과 잠시나마 억지로 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그 뒤의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는 약.
"놈들과 결착을 내기 위해서 아껴둔 것이 아니었나? 고작 이런 곳에서 쓰기에는 아까운 약이 아닌가?"
"…그래, 그랬지."
확실히, 녀석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입체 영상만을 내보내는 큐브에 의식을 가진 어떤 것이 나타날 리가 없다. 어쩌면 이건 그가 환각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냥 그가 여기서 뻗으면 알아서 큐브가 정지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오류가 있다지만, 요원이 쓰러졌는데 계속 돌아갈 리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빈말로 '어, 그래. 나 차원종이 될게.'라고 하면 끝날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꺼림칙했다. 큐브에 들어오고 나서 그런 것들이 생각난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녀석은 단순한 입체 영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저 속삭임에 승낙한다면 정말로 차원종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녀석을 쓰러트리고, 여기서 나간다.
'…무리는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침내 알약을 입에 털어놓고 삼키는 제이. 삼킴과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후들거리던 몸이 안정을 되찾고, 호흡을 할 때마다 **온 고통은 자신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신선함이 되었다. 피폐해진 몸에 생기가 돌아와 그야말로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내가 차원종이 되는 건, 내 삶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거든. 사람에게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뭐가 있겠어?"
"그 말 어째 나더러 사람도 아니라고 하는 말 같은데. …이런, 말하고 보니 내가 차원종이었군."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자세를 잡는 남자. 그도 그럴 것이 제이의 기세가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하게, 제이에게서 흘러넘치는 위상력이 푸른 오오라로 구현되어 제이의 몸을 휩싸고 있었다.
"…휘유. 거 약빨 한 번 더럽게 끝내주는군."
남자는 낮게 휘파람을 불고 식은땀을 흘렸다. 처참한 몰골로도 자신과 비등하게 싸웠던 제이다. 만약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자신에게 달려든다면 이번에는 결코 상당한 내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리라.
"…어쩔 수 없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번엔 남자 쪽에서 먼저 공격을 가해온다. 제이는 마지막으로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약의 효능으로 호흡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위상력을 쓸 수 있지만, 위상력을 쓰려는 것보다는 그저 습관에 가까운 행동이다.
"…이거 돌아가면 유정 씨에게 한 소리 듣겠어."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렸으니 얼른 끝장을 내야 잔소리를 덜 듣겠지. 그래도 이번에 정말 힘들었다고, 그러니까 조금 과하게 엄살을 부려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도 자리에서 뛰쳐나간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진짜 끝을 보자고…!"
'쾅-'
이제껏 느끼지 못한 커다란 진동과 굉음에 유정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마침내 큐브의 컨트롤러에 불길한 붉은 불이 꺼지고 파란 불이 들어왔다. 곧바로 큐브의 가동을 중지시키고 유정은 제이가 나올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제이 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피투성이 몸, 찢어지고 구멍이 나서 헌신짝이나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옷, 힘없이 터벅터벅 내딛는 걸음. 그런 주제에 멀찍이서 달려오는 유정을 보고 제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씨익 하고 웃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여, 유정 씨…. 뭐하러 여기까지…. …어?"
제이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몸이 먼저 크게 휘청했다. 만약 유정이 필사적으로 달려서 제이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머리부터 바닥에 부딪쳐 크게 다쳤으리라.
"제이 씨! 정신 차려요, 제이 씨! …"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유정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보이던 유정의 얼굴도 서서히 희미해져만 갔다. 아무 이유도 없이 팔을 뻗어서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하지만, 팔이 들어지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온몸이 꼼짝을 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팔을 움직일까.
"……"
말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적어도 이 말 한 마디는 해야 할 텐데. 그래서 제이는 안간힘을 내어 입을 열려고 애를 썼다.
"ㅁ…,"
됐다. 조금만, 조금만 더….
"ㅇ…, …."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말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한 그 때.
'…톡'
자신의 뺨 위로 무언가가 한 방울 떨어져 내린 것까지 느끼고, 제이의 의식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