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세x슬) 그를 대신하는 검.

리네라임 2015-02-23 9

"내가... 한 명 더...?"
 

"그래, 난 너야. 네 무수히 많은 미래의 가능성들 중 하나지. 말 안듣는 검은양 팀원들보다 훨씬 말 잘듣는 귀여운 아이들을 거
 
느릴수 있는 자리라고. 조금 이르지만 선택해주지 않을래? 나와 하나가 될지, 여기서 죽을지."
 

"헛소리 하지마!"
 

명백한 거절의사를 표명한 슬비는 또 한명의 자신, 큐브슬비의 발밑에 화염폭발을 일으키는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아니, 던졌
 
다기보다는 쏘아냈다고 하는게 맞겠다. 슬비는 쏘아진 나이프를 전혀 피할 생각조차 없어보이는 큐브슬비의 모습에 내심 쾌재
 
를 부르며 승리를 확신했다. 큐브슬비는 나이프가 바닥에 박히는 타이밍에 맞춰 뒤로 슬쩍 자신의 나이프를 흘리다시피 떨어
 
트렸다. 그 의도는 알수 없어도 자신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입힐 것은 명확해 보였다. 목표지점에 도착한 슬비의 나이프는 퍼퍼
 
펑-, 연기를 내며 시원스럽게 폭발했고, 큐브슬비의 나이프 또한 동시에 폭발했다. 큐브 바닥에 그을음을 그리며 연기를 내는
 
화염폭풍은 둘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큐브슬비는 두 개의 화염폭풍에 휘말리고도 씨익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 '넌 졌어.' '
 

슬비, 그리고 그녀와 똑같이 생긴 큐브슬비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선택의 결과부터 말하자
 
면... 슬비는 패배했다. 확실한 마무리를 하겠다고 버스폭격을 하려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결전기들은 그 위력이 강력한만큼
 
동작의 크기가 다른 기술들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전기를 준비할 때 큐브슬비는 이미 슬비
 
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들이밀고 있었다.
 

"어떻게.... 벌써...."
 

큐브슬비는 사악해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경악하는 슬비에게 친히 설명을 시작했다.
 

"단순한 눈속임이지. 네가 단검을 터뜨릴 때 나도 같이 터뜨린건 봤어? 그로인해 추가로 피해를 입었지만 덕분에 연기의 양을
 
늘일 수 있었지. 넌 이겼다고 생각하고 방심해서 평소보다 연기가 많이 일었던 건 눈치 못 챘어, 그렇지 않아? 난 그저 너에게
 
걸어갔을 뿐인데, 넌 허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큰 동작을 하면서 사자 ***에 머리를 들이미는 양 한 마리와 다름없어진거
 
야. 네 패배란다, 이슬비."
 

큐브슬비는 패배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며 슬비의 목에 닿아있는 나이프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밀기 시작했다. 슬비
 
는 나이프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슬비에겐 영겁의 시간이었던 잠시 후, 슬비의 등에 뭔가 닿았다
 
. 큐브의 벽면이었다. 큐브슬비도 이제야 만족한듯 밀던 나이프를 멈추고는 슬비의 허리춤에서 나이프 두 개를 뺏어 슬비의 소
 
매깃과 함께 벽에 깊이 박아넣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슬비의 두 팔을 봉인한 다음 목에 댄 나이프를 내리고 그녀의
 
턱을 잡아 짧은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다.
 

"체크메이트. 아까 했던 질문에 답변을 줄 시간이야. 나를 네 미래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일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지."
 
*                    *                   *
 
"큐브 내부와 통신이 끊겼습니다!"
 

"이슬비 요원님이 아직 안에 계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큐브를 모니터링하던 특경대원들의 호출에 김유정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안에서 상정 외의 일이 일어난 것은 확실할 것이
 
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대의 카메라가 꺼진다는 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다.
 

"열어요. 안 열리면 부숴서라도."
 

 결과적으로는 슬비의 승급을 방해하는 꼴이 되겠지만 승급시험이야 나중에 다시 치루면 그만. 지금 중요한 건 슬비의 목숨이다.
 

"열리지 않습니다! 폭파를 시도하겠습니다!
 

 김유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디선가 가져온 직사각형 모양의 폭탄을 굳게 닫힌 큐브의 문에 서둘러 설치하는 특경대원의 모
 
습은 수습요원 이슬비가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폭파!"
 

 전원 영향권 밖인걸 확인한 대원이 빨간 버튼을 눌렀고, 폭탄은 뇌관애 전해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펑-
"**, 이건 완전히 상식 밖인뎁쇼."

폭파결과를 확인하러 다가간 대원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이쪽을 쳐다봤다.
 
 

큐브의 문은 멀쩡했다.
 
*            *                 *
슬비의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네가 내 미래라면 그 질문에 어떤 답이 돌아올지는 알 거 아냐."
 

숨이 닿을듯 가깝게 위치한 그 얼굴이 서서히 노기를 띄기 시작했다. 노기라고 해봤자 눈을 살짝 찡그리는 정도가 다였지만 본
 
인의 얼굴이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수있었다. 화를 내고 있다- 고. 바로 그때, 슬비가 속박되어있는 벽면이 폭발음을 동반하고
 
무너져 내릴듯 흔들렸다. 무너지진 않았지만.
 

'찬스다!'
 

 일단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폭발 때문에 헐거워진 나이프를 뽑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
 
다. 마치 슬비가 양손에 나이프를 쥐기 딱 알맞은 위치가지 뽑히도록 계산하고 만든 폭발인가 싶을 정도였다.
 

"칫."
 

 슬비보다 0.5초가량 늦게 상황을 파악한 큐브슬비는 아래에서 번뜩이는 나이프를 인식한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상체를 뒤로 뺐다. 반 박자, 아니 반의 반 박자 정도 늦은 탓에 윗목에서 아래턱까지 적색 선이 그어졌다. 여기서 멈추면 반댓
 
손에 들린 나이프가 나를 관통할 것은 뻔하다. 그렇게 판단한 큐브슬비는 회피동작을 끝내지 않고 아예 뒤로 젖혀 팔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왼쪽 발로 땅을 차며 오른쪽 발로 슬비의 턱을 강타했다. 곧이어 한쌍의 나이프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슬비는 쓰러졌다. 결국 슬비는 자신의 뒤틀린 미래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게 너의 한계야."
 

하늘이 내려준 타이밍이란 이런걸까. 나이프를 주워들고 슬비를 죽이려던 큐브슬비는 큐브의 시스템에 의해 사라졌다. 말 그
 
대로 어떤 잔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큐브의 문이 열린 것이다. 입장자의 기억을 잃고 출력해내는 큐브의 특성상 다른
 
인물이 입장하면 그의 기준으로 오브젝트를 재생성하게 된다. 그래서 문이 열리면 이전 오브젝트를 삭제하고 새로 만들 준비
 
를 하게되는 것이다.
 

"김유정 요원님! 큐브 주변은 위험합니다!"
 

특경대원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세하가 뛰어들어가 슬비를 앞으로 안아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캐롤 누나... 전 괜찮으니까 슬비의 치료를 부탁해요...."
 

세하는 안아온 슬비를 땅에 눕힌 후 자신도 그 위에 풀썩 쓰러졌다.
 

 
*              *           *
 
 
 
몇 분 전.
 

'....?!'
 

폭탄 터지는 소리에 습격이라도 당한 줄 알고 대기실에서 뛰쳐나온 세하가 본 것은 큐브를 둘러싸고 있는 특경대원과 유정 누나였다.
 

"누나, 무슨 일이에요?"
 

"세하야! 네 도움이 필요해!"
 

사정조차 설명하지 않고 폭파에 실패한 큐브를 가리키는 김유정을 보며 세하는 한순간에 사태를 파악했다.
 

'아까 슬비가 승급시험을 치러 간다 했으니 안에는 슬비가 있겠고... 문을 터뜨리려한 것 보니 강제로 열어야 하는데 실패했나보네. 늦진 않았을까.'
 

"네, 저걸 열면 되는거죠?"
 

세하는 김유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바로 달려가 새카맣게 그을린 잠금장치에 건블레이드를 갔다댔다.
 

"제발..."
 

그 상태로 5초쯤 지났을까, 세하의 건블레이드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중 김유정만이 세하의
 
의도를 알아챘다. 세하는 지금 자신의 위상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건블레이드를 달구는데 쓰고있는 것이다. 당연히 부작용이
 
없을수가 없다. 어쩌면 영구히 위상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세하야, 잠깐만! 그렇게 하면 네가....."
 

"알아요."
 

세하는 집중에 방해된다는 듯 대답을 툭 던지고 작업을 마저 진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밝아진 건블레이드는 빠르
 
게 잠금장치를 잘라내고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세하도 빠른 속도로 지쳐가는 것이 모두의 눈에 보였지만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세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의 증거이리라. 30%....40%... 잠금장치가 절단되는 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지만 세하에게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조금 더 뜨겁게, 조금 더 빠르게.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상력을
 
건블레이드에 압축시켜 넣어 순식간에(이마저도 본인은 느리다고 생각했지만) 잠금장치를 잘라내는데 성공했다.
 
 
"조금만 기다려...."
 
 
큐브는 열렸다. 하지만 세하 이외에는 전부 비능력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안에 들어갈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세하의 눈
 
에 들어온 것은-
 
슬비를 죽이기 위해 나이프를 역으로 잡아들고 찌르려고 하는 또 다른 슬비.
 
당장 눈에 들어온 정보로는 판단할 수 없었지만 일단 큐브에 뛰어든 세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탑 포지션에 있던 슬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뭐..."
 
 
하지만 당황도 잠시,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슬비를 안아들고 나왔다. 자신이 본 것은 내 환상 이었다고, 내가 헛것을 본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며.
 
 
 
 
*              *            *
 
 
 
의식이 들었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편안하다. 따듯하다. 아늑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난 분명 그때 큐브에서 죽었어야 할 터였다. 눈을 떠 보니 난 병실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창가쪽에 놓인 간호인용 의자엔 김유정이 앉아있었다.
 

"네 무장이라면 저기 다 들어있으니까 걱정말고 푹 쉬렴."
 

김유정이 병실 구석에 놓인 큼지막한 종이상자를 가르켰다. 그러고보니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요원복이 아닌 환복이었다.
 
아직도 차일 때의 격통이 남아있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어떻게 된거죠? 전 분명 큐브에서..."
 

"세하가 죽을뻔한 널 구해줬어. 다행이지 뭐니..."
 

아, 마냥 밝기만 한 목소리가 아니다. 나의 목숨을 위해 누가 어떤 대가를 치뤘는지는.....
 

"어떻게요?! 지금 세하는요?"
 

물어보는 내 모습이 그렇게 초조해 보였는지 언니는 머뭇거리다 대답해주고 말았다.
 

"세하는 자기 위상력을 전부 써서 건블레이드를 달궈 큐브의 잠금장치를 잘라내고 문을 열었어. 너를 데리고 나오자마자
 
쓰러졌는데, 조금 전에 너보다 먼저 의식을 되찾았지만.... 결국 위상력 상실 판정을 받았....어.... 그래도 숨이 붙어있는것만
 
해도 다행이라지 뭐니....."
 

우울하게 소식을 전하는 김유정을 뒤로하고 침대에서 내려가 병실을 뛰쳐나갔다. 세하, 세하가 위상력 상실 판정을
 
받았다면 분명 이 병원에 있을 터였다. 어디지?
 

"야, 야...! 이슬비! 기다려!"
 

누가 간호인용 의자를 창가쪽으로 둔거야! 등의 부질없는 투정을 부리며 슬비를 따라 뛰어나가는 김유정이었다.

* * *

세하는 병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급성 위상력 상실증. 각오는 했지먼 막상 병명을 듣고 확진판정이 나
 
니까 이 심란함은 어떻게 할수가 없다.

덜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 않았다. 가볍지만 빠른 발걸음. 여자다. 유정 누나겠지. 발소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이세하. 그렇게까지 해야했어?"
 

....슬비였나. 내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살아서 다행이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어색한 침묵을 깬 쪽은 슬비였다. 창가, 그러니까 세하의 시선 방향으로 걸어가 그를 끌어안은 것이다.
 

"왜....왜 그런거야...왜 나 때문에.......네가..."
 

슬비는 말을 더듬다못해 기어코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방울져 세하의 어깨를 적셨다. 세하는 손을 들어 슬비의 가녀린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네가 없는 세상보단 이쪽이 분명 나을테니..."
 

슬비는 다짐했다. 그가 나를 위해 그의 전부를 바쳤으니, 나는 평생을 그의 의지로 움직이는 검으로써, 그를 지켜주는
 
방패로써 살겠다고.
 

"응....그래. 앞으론 내가 널 지켜줄게. 영원히."
 
 
울고 있었기에 완벽한 발음은 내지 못했지만 세하가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고마워."
 

둘은 그 상태로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사람의 온기... 세하의 온기는 슬비의 울음을 그치게 했고 슬비의 온기는 허무한 표정의
 
세하를 미소짓게 했다. 그러고도 두 사람 다 한참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열려진 병실 문 틈으로 그 장면을 보고있던 김유정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문을 닫았다.
 
 
 
 
 
 
---------------------
2024-10-24 22:23:4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