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 내리는 그 곳에서 (세하슬비)
firsteve 2018-10-27 9
바쁜 일상에도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은 곳곳에 그들에게 새해를 반기는 분위기를 풍겼다.
벌써 올해도 갔구나….
입김을 불며 걷던 소녀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찰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보이는 인형 같은 외모에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 그녀를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걸으며 그녀의 핸드폰에 온 문자를 연신 확인할 뿐이었다.
“다들 많이 변했으려나….”
어느덧 그들과 만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검은 양 팀 멤버들 중 가장 멀리 떠났던 건 그녀였다.
뉴욕의 총본부의 개편문제의 핵심인력으로 뽑힌 것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망설였다.
매번 신경 쓰이던 한 소년 때문에.
확실히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때문에.
그녀는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뉴욕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일단락 된 뉴욕을 뒤로 한 채…..그녀가, 이슬비가 돌아왔다.
발걸음이 괜히 빨라졌다.
짐은 이미 집으로 붙여놓은 지 오래였기에, 그녀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종종 유리로부터 문자를 통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또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질투가 올라왔다.
어이없게도 몇 번이고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만나면 잔소리부터 할 주제에 바라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번 기회에 돌아오기로 했다.
그게 설령 슬프게 끝날 첫사랑일지라도 그녀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너무 생각에 잠겼던 탓일까, 아니면 기대감에 부풀었던 탓이었을까, 생각보다 빠르게 약속장소에 도착한 그녀가 약속 장소인 음식점의 문을 열었다.
“응? 3등으로 온 사람이
멀리서 온 대장일 줄이야. 놀라운데?”
“제이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뭐….나야 육아에 지쳐가는 아저씨지. 하하…”
제이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품에 안겨서 자고 있는 꼬마아이를 쓰다듬었다.
“유정 언니가 작아진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근데, 속은 나 같아서 걱정이야. 벌써 발현도 되어서 말이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이 조심스러웠다.
너무나도 잘 아는 클로저로서의 삶을 자신의 아이가 겪게 될까 그는 두려웠다.
누구보다 소중한 그녀와 자신 사이의 아이인데, 자신이 겪었던 이면을 보고 무너질까 아버지의 마음이자, 선배로서의 마음으로 그는 걱정에 빠진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슬비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세요, 아저씨. 제가 절대로 안 다치게 만들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번에 대장, 교관으로 온다고
했던가? 뉴욕의 인사과는 어쩌고?”
“그만두고 왔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나두고 가니까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슬비의 미소에 제이가 옆에 있던 칵테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지 그래? 지금
온 사람이라곤 그 도둑 아가씨뿐이니까.”
“어머? 숙녀가 없는 곳에서 뒷담화 하는 건 매너 위반이라고요, 제이 씨?”
하피가 한 손에 카드를 들고 여유롭게 걸어오다가 슬비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어서 와요, 슬비 양. 뉴욕 여행은 어땠나요?
훔치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으로 변했나요?”
“네.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절도는 안돼요. 이제 정식으로 유니온의 클로저 이시니까.”
“후훗…..빡빡한 면은 여전하군요. 유들유들해진 부분도 없진 않지만.”
하피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자, 슬비도 자리에 앉으며 근황을 물었다.
“언제나 그렇죠. 그 남자는 여전히 둔하고 소년 같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모든 걸 안고 가려고 하죠. 티나 양은 언제나 그와 함께 다니는 모양이에요. 정말이지…..너무 둔하다니까요. 같이 가자고 하면 기꺼이 같이 가줄 수 있는데 말이죠.”
하피가 카드를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리자, 제이가 웃음을 지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괴도한테 같이 가자고 말할 남자가 아닌 걸 알잖아? 게다가 그 남자는 당신을 더 이상 상처받게 놔둘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같이 가자고 말을 못했을 거야.”
그림자에서 뒷면에서, 상처를 받아가며, 억지로 어른이 되어버린 소녀를 아는 그 둔한 남자는 분명 그랬을 것이었다.
겨우 빛으로 나와 어딘가 모르게 밝아 보이는 그녀였으니까.
“정말이지….이럴 때보면 당신이나 그 사람이 같은 차원전쟁 출신이라는 게 느껴진다니까요.”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인데…..난 그 남자처럼 요령이 없진 않다고.”
두 사람의 대화에 슬비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걸 원했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는 것도 정말로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외로워졌다.
고독해져만 갔다.
그렇기에 그녀는 인사과의 일이 마무리 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온기가 있는 한국으로.
자신의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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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자, 모이기로 했던 멤버들이 대부분 모였다.
“역시 동생은 늦는 건가.....하긴, 요즘 따라 많이 바쁠 때이긴 하지.”
“에이~그래도 이럴 때는 빨리빨리 와야 되는 거죠. 오랜만에 슬비가 왔는데. 그렇지, 슬비야?”
“난 딱히 상관없지만…..그래도 오랜만이니까 빨리 왔으면 좋겠네.”
슬비의 말에 유리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오~적극적인 슬비다~!이런 슬비도 귀엽고 좋아~”
“그러니까 덥석덥석 껴안지 말아달라고....”
자신을 껴안은 채 귀엽다는 듯 연신 볼을 비벼대는 유리의 모습에 좋으면서도 싫은 척 하던 슬비가 가게 문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늦어서 미안해요. 내년에
쓸 자료가 뭐 그리도 많은 지 늦어버렸네요.”
“워커홀릭 다 됐네, 동생. 재밌어?”
“힘들어요. 애들 가르치는 게 보통이 아니네요.”
세하가 지쳤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앉더니, 앞에 있는 그녀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이슬비. 얼굴 좋아 보이네.”
“너도 좋아 보이네. 여자친구라도 생겼어?”
“놀리는 거야? 여자친구 없어.”
“그래, 그래. 썸 타는 여자들은 있겠지.”
자신도 모르게 톡 튀어나온 심통 섞인 말에, 슬비는 속으로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질투가 많았나.
하지만, 동시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부터, 쭉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 중 하나였다.
“썸 타는 여자 없어. 요즘에 그럴 여유 없이 일만 했거든.”
어딘가 모르게 어른스러운 그의 대답에, 슬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웬일이야?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시간 많이 지났어. 나도 이제는 20대 후반이잖아.”
10대 후반부터 계속해서 클로저를 해오면서 그도 많이 성숙해졌다.
사람들을, 적들을 만나면서 마음도 많이 부서졌지만, 동시에 다시금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떨림이라는 것을, 헤어짐의 슬픔을, 누군가의 부재를 배웠다.
어느 것 하나 그에게는 버릴 것 없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그는 자부했다.
“이제는 잔소리 못하겠네. 교관
겸 교수라고 했나?”
“아직은 교수라기보단 선생님 수준이지. 그래도 노력하고 있어.”
“네가 노력한다는 소리를 하니까 왠지 죽을 때가 다 된 노인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말 한 번 예쁘게 한다, 진짜…..”
세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칵테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기분 좋은 단 맛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너는 어떻게 지냈어? 뉴욕에서 인사담당으로 갔잖아.”
“그랬지. 뭐, 이제는 신서울에서 교관이나 할까 싶어. 이미, 부서이동 신청은 끝내고 왔으니까.”
“나보다 더 어울리네. 교관이라니. 애들이 FM으로 구르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그 전에 네가 먼저 구를래?”
찌릿하고 그를 쏘아보는 그녀의 모습에, 유리가 배시시 웃으며 슬비를 껴안았다.
“역시 두 사람은 같이 있어야 빛난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잔이나 들어, 유리야. 건배
하자고. 슬비 복귀 기념으로.”
웬일로 먼저 건배 제의를 하는 세하의 모습에 제이가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러면 건배 축사는 동생이 하는 걸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이슬비. 돌아 온 걸 축하해. 오늘은 통금 같은 거 없는 거 알지?”
“다들 취해서 나만 마지막에 남으면 뒷정리 안 하고 갈 거니까 알아서 조절해. 알았지?”
“그래. 자, 그럼 슬비의 복귀를 기념하며 건배!”
건배!
술에 담긴 재회의 기쁨이 그의 선창에 하늘로 퍼져나갔다.
“캬아~역시 이 맛이야~내가 좋아하는 슬비도 있고~나랑 가장 친한 세하도 있고~유정 언니 미**도 있고~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모이니까
술 맛 좋다~”
아저씨 같은 말을 하며 술을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어이없다는 듯 핀잔을 줬다.
“한동안 얌전하더니 슬비 왔다고 고삐 풀렸네….에휴…..적당히 마셔. 네가 취하면 돌려보낼 때 괜히 귀찮아진다고.”
“괜찮아, 괜찮아~나는 끝까지 남을 수 있어~”
말 끝에 음표라도 붙은 것처럼 낭랑하게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슬비가 웃음을 지었다.
“변함없네, 너희 둘은…..여전히 사이가 좋아.”
“뭐 어쩌겠어. 내 좁디 좁은 인맥에서 가장 편안하게 이야기 가능한 사람은 얘 뿐인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아예 이 참에 둘이서 사귀지 그래?
유리도 너에 대해서는 나쁘게 생각 안 하고, 너도 나쁘게 생각 안 하잖아.”
“편안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달라. 그걸 몰라서 난 부딪혔다가 한 번 깨졌고.”
입가에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 들으려고 질문한 건 아니었는데…..여전히 그 방면에서는 요령이 없구나.”
“너도 요령 없잖아. 출국 전에 첫사랑한테 고백도 못하는 바보 주제에.”
“그러게. 내가 할 말은 아니네.”
슬비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세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뉴욕에서 좋은 사람 없었어?”
“좋은 사람은 많았지. 고백해오는 사람들도 좀 있었고. 다만
내 입장에서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 사람은 없었어.”
“너도 은근히 죄 많은 인생이다….”
“난 순애보야. 첫사랑을
지킬 거야.”
슬비의 의지가 담긴 말에 세하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첫사랑 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
나는 첫사랑이 날 안 좋아하니까.”
“그러길래 있을 때 잘하지….결국 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쪽이 됐잖아.”
“그런가…..아, 꿀꿀해. 빨리 마셔. 오늘은
끝까지 나랑 어울려 줘야겠어.”
“술 취하면 버리고 갈 거야. 알아서 마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잔을 부딪혀주는 슬비의 모습에 세하가 술을 마시고 웃음을 지었다.
“그런 면은 하나도 안 변했네. 툴툴대면서
해줄 것 다 해주는 그런 점.”
“너도 안 변했네. 매사 귀찮아하면서 사실은 제대로 주변을 보고 있는 점.”
“그래야 더 뒹굴거릴 수 있잖아.”
“…..그런 말, 애들 앞에서 하는 건 아니지? 아니길
바래. 애들이 뭘 배우겠어….”
“걱정 마. 애들 앞에서는 하루의 모든 성실함을 담아서 행동하니까.”
“네, 네. 그런 근면성실을 위해 건배.”
“건배.”
안주가 돌고 술병들이 쌓여갈수록 하나 둘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은근히 잘 마시네, 너…..뉴욕에서 술 많이 먹었어?”
“언제나 마지막에 남는 건 나였지.”
“…..대체 인사과에서 일하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한량들에게 감봉이나 한직으로 보내버리기, 덤벼오는 불순한 생각을 가진 남자들 이겨버리기
같은 사소한 것들?”
“경의를 표한다, 진짜…..넌 진짜 모태FM이야.”
“남자들에게는 인기 없는 요소만 모아놔서 미안하네요. 키 작고 못생기고 성격 안 좋은 거 다 합친 게 나라는 사람이네요.”
슬비의 퉁명스러운 말에 세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만졌다.
“그렇지도 않은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안 봐.”
“…..은근히 작업 건다? 나 쉬운 여자…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했지만 떨리는 마음을 완전히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 목소리가 떨리고 말할 때마다 조금씩 시간차가 생겼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
허튼 소리는 안 하는 거 알지?”
“그런 대사로 얼마나 많은 여자애들을 홀린 거야?”
“홀린 적 없거든. 아무한테나 이런 소리 안 해.”
마치 그녀가 특별하다는 듯 말하는 그의 말투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참 변함없이 나한테는 잘해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응석 부리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어…..”
“응석 부려. 너 하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그건 좀…..취향인 말인데.”
슬비의 솔직한 말에 세하가 미소를 지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그녀를 보아서 그런지 평소엔 거의 열리지 않던 그의 마음이 그녀를 향해 열려갔다.
“우아아아~!!커플이다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커플로 꽁냥꽁냥거려~커플지옥 솔로천국~”
“……여전히 취하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안기려고 하는 건 여전하네….”
“난 포기했어….나중에 하피 누나한테 부탁하든지 해야겠어…..”
슬비를 껴안은 채 볼을 비벼대는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하자 이번엔 유리가 그에게 엉겨 붙으며 술주정을 해댔다.
“우우….세하 바보…..정미한테 상처 준 나쁜 놈…..이럴 거면 받아주지 말았어야지…..비슷한 느낌에 사귀지 말았어야지….뭐야, 정말…..난…..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이게 뭐냐고…..”
술기운을 빌어 흘러나오는 그녀의 이야기에 세하가 한숨을 쉬고는 옆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하피를 불렀다.
“누나. 얘 너무 취해서 그런데 유리 집까지 같이 가주시면 안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얘 혼자 보내기는 좀 그래서.”
“어머? 그럼 전 안 위험하다는
소리인가요? 그렇게 나오면 누나, 상처 받는답니다?”
“또 그러신다….부탁 좀 드릴게요. 전 얘 집에 데려다 주려고요.”
세하가 슬비 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리자, 하피가 웃음을 지었다.
“택시비는 전부 세하 씨한테 청구할게요. 누나를 부려먹은 만큼 비싸게 책정할게요.”
“얼마든지 청구하세요.”
능글맞게 대답하는 그의 말에 하피가 알겠다며 그녀를 부축한 채 택시를 잡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슬비야. 더 마실 거야?”
“아니. 술은 적당히 마시는
게 좋아. 과음하면 다음날이 괴롭잖아.”
“동감이야. 그럼 슬슬 정리하고 갈까?”
세하가 천천히 일어서자, 때마침 제이가 위층에서 아이를 안고 내려왔다.
“동생이랑 대장, 가려고?”
“네. 너무 많이 마시면 좀 그렇잖아요. 이제는
슬비도 계속 한국에 있을 테니까, 종종 만나서 같이 마셔요.”
“그래. 그러자고. 동생. 대장의 에스코트, 맡겨도 되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 뒷정리는 도와드릴게요.”
세하가 테이블을 치우려고 하자, 제이가 손사래를 치며 그를 그녀에게로 밀었다.
“대장이나 잘 데려주고 와.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제가 뭐라고 해도 고집 안 꺾으실 거죠?”
“당연하지.”
싱글싱글 웃는 제이의 표정에 세하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저랑 슬비는 그만 들어갈게요.
오늘 감사했어요, 아저씨.”
“다음에 또 올게요.”
“자주 오라고. 올 때 재미있는 안주거리용 이야기를 들고 오면 더 좋고.”
제이의 넉살에 두 사람이 웃음을 지으며 가게를 떠나자, 제이가 그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돌고 돌아서 이제야 겨우인가….정말이지…..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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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새해가 다 되어가는 것에 맞추어서 새해를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들이 곳곳에 생겨나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여전히 거북한 그는 코트의 양쪽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춥다, 그치?”
“뉴욕보단 안 추운데, 뭐….그래도…..춥긴 춥다…..좀 붙을게.”
슬비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자, 세하가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냐….더
붙어. 춥겠다.”
“그럼 사양 안하고.”
슬비가 팔짱을 낀 팔을 더욱 그녀의 쪽으로 끌어당겨 꼭 껴안았다.
포근했다.
옷의 감촉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따뜻함이 느껴졌다.
말 없이 걷는 이 길 조차 두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좀 변했네, 이세하. 예전에는 팔짱 끼려고 하면 질색을 하면서 도망가더니.”
“그 때는 좀 쑥스러웠으니까. 지금도 조금은 그렇지만.”
자신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그녀는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은…..이제는 내가 편하다는 거네? 아, 정말…..난 여자로 요만큼도 생각 안 하지?”
“무슨 말이야, 그게?”
“여자로 느끼면 이렇게 달라붙는 시점에서 너, 당황해서 도망가려고 하잖아.”
슬비의 눈빛에 세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위로 눈물범벅인 얼굴로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자신이 상처 준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내가 바보였어…..슬비랑 닮은 나니까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아무리 해도….난 슬비처럼 네 마음 속에 있을 순 없나 봐.
바보 같은 자신을 믿어준 정미의 소중한 마음이 그의 마음을 재촉했다.
답은 나와 있잖아.
마음 속에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더 잃으면 무너질 것 같은 얇디 얇은 감정은 너무나도 연약했다.
“…..무너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입 밖으로 내어버린 그 말에 세하는 스스로 놀랬다.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나 복잡한 마음에서 이렇게도 명확한 말이 나올 리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는 말하기로 했다.
비록 취중진담이라고 할 지 몰라도.
정말 최악인 고백이라고 할 지라도.
로맨스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덤덤한 고해성사 같은 말이라고 할 지라도.
“너를 좋아하는데…..그런 말을 해버려서 내가 날 거절하거나, 나중에 헤어지기라도 하면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을 만큼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랬어. 널…..잃고 싶지 않았어.”
주머니 속 세하의 손이 떨렸다.
그만하라는 마음과 말하라는 마음이 격하게 뒤엉켰다.
“첫사랑이라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서, 이기적인 마음이라서 미안해. 그래도…..좋아해. 좋아해, 이슬비.”
그것은 내리는 눈보다 느리게 그녀의 귀에 내렸다.
불안함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그거 고백이야?진짜 뜬금없다, 너…..”
“……알아…..하지만…..이번이 아니면 영원히 말 못 할 것 같았어.”
무너지기를 각오한 도전이었다.
술기운을 빌린 무모한 도전이었다.
지켜왔던 첫사랑을 위한 말이었다.
상처를 줬는데도 자신을 밀어준 첫 연인에 대한 마지막 의리였다.
그 모습에 슬비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하아…..정말…..뭐 하는 거야, 이세하….그
말 들으려고 내가 몇 년을 기다린 건데?”
순간, 귀를 의심했다.
몇 년을 기다렸다는 그 말에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하긴…..나도 내 마음을 안 지 얼마 안됐으니까…..나보다 더 둔한 네가 네 마음을 알 리가 있겠어?”
“슬비….야….?”
떨리는 세하의 목소리에 슬비가 그의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그리운 그녀의 온기였다.
“뭐해, 안 잡아? 안 잡으면 고백 안 받을 거야.”
어서 잡으라는 듯 그의 손을 툭툭 건드는 그녀의 행동에 세하의 얼굴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세게 잡지 마. 너랑 나랑 손 차이가 얼마인데.”
“그러게…..그렇네….”
자신의 손에 담긴 작은 손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넌 내 거야. 선배님이 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술기운 때문에 얼떨결에 받는 것도 아니야. 난 이세하를 좋아하기에 받는 거야. 그것만 알아둬.”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보석 같은 눈에 그가 차오르는 감정에 그녀를 꼭 껴안았다.
“잘 할게. 내 고백을 받아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고백해줘서 고마워. 비록 좀 쌀쌀맞은 성격이긴 해도, 최선을 다해서 널 좋아해줄게.”
그녀를 껴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몸집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고개 숙인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돌고 돌아 도착했다.
그녀의 곁에.
사랑하는 그녀의 곁에.
이슬비가 내리는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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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firsteve입니다.
이번엔 약속대로 세슬을 준비했습니다.
극적인 것보단 좀 더 잔잔한 그런 걸로 준비해봤는데 어떤가요?
다음 거에도 세슬로 갈 예정입니다. 근데 베리에이션이 너무 많아서 독자분들께 물어볼게요.
1. 세슬(당신의 곁에)(단편/세하가 다른 지부로 발령 받는 시점의 사건입니다.)
2. 세슬(축제 끝에서)(단편/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축제때 밴드를 하며 나타, 세하, 유리, 슬비가 멤버입니다.)
3. 세슬(선율의 조화)(단편/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축제(할로윈) 때, 벌어지는 세하와 슬비의 이야기입니다.)
4. 세슬(미정)(단편/예전부터 틈틈히 쓰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을 각색했습니다.조금 재미없을 가능성도….)
5. 세슬(이세계이야기 6화)(세하 집에 슬비가 갑니다. 정미가 옵니다. 같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베리에이션입니다.
이 중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적어주세요.
(p.s.1. 2번의 경우에는 유리의 포지션을 써주세요. 참고로, 현재 제가 생각중인 밴드 포지션은 나타(보컬), 세하(일렉기타 겸 서브보컬), 유리(베이스 겸 서브보컬), 슬비(바이올린) 입니다. 2번과 3번은 차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기에, 세하는 참전군인의 아들(서지수 소령의 아들입니다)겸 피아노나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글을 쓰는 아이, 슬비는 바이올린리스트, 유리는 검도 부장, 나타는 조각 특기생 겸 책을 좋아하는 아이(보컬 능력 출중-성우님의 목소리가 좋아서….))
(p.s.2. 2번,3번,4번은 제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소설들을 각색하다보니 조금 캐릭터 성격에 안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