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멈춰버렸다
건삼군 2018-10-15 2
꿈을 꿨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꿈을 꿨다는 기억은 있다. 집중해서 생각해보면 대충 어떤 꿈일지 기억할수 있을것 같아 지금 막 일어나 몽롱한 머리를 붙잡고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저 비수같은 무언가가 가슴을 관통한것 같은 느낌이 들 뿐.
결국 꿈의 내용을 떠올리는것을 포기하고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하나 묻어있지 않은 천장은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내고있었다. 마치 얼룩하나 없는 눈밭처럼.
이질적인 천장에서 눈을 떼고 옆을 바라보자 세상이 기울어져 있었다. 이상한 광경을 몇초 바라본 후 나는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마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정신을 못차린 탓이리랴.
그런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져있다고 착각을 한 내 자신을 비웃으며 몸을 일으켜 세우자 깨질듯한 두통이 머리를 엄습해왔다. 숙취, 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나는 그 단어를 무시했다.
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 이유가 대체 뭔지 생각해보았지만 두통이 더 심하게 느껴질 뿐이였다.
지독하게 느껴지는 두통을 뒤로하고 일어난 나는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얼굴에 끼얹졌다. 갑작스런 차가움에 반응한 탓인지 두통이 조금 잦아든다.
머리가 한층 맑아지자 갖같은 기억들이 마음을 후벼판다. 하지만 고통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공허함이 가슴을 채울 뿐.
애써 그 공허함을 떠쳐낸 나는 화장실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 여러가지를 꺼낸후 조리를 가한다. 머릿속은 이무생각도 없지만 몸이 짜여진 프로그램으로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식사가 완성되어 있었다. 딱히 공복감은 없지만 아무래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수저를 들어 눈앞에있는 음식들을 떠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아침에 일어나서 이제 멏번째일지도 모르는 이질감을 찾아내었다.
그릇과 수저가 하나 더 놓여져 있었다.
그 풍경을 보자 분노, 어쩌면 애같은 짜증남이 치밀어 올라서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기분이 아니였기에.
무턱대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작은 선반에 놓여진 액자 하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엇다.
그 액자속에는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웃으며 서있었다.
아니, 액자뿐만이 아니다. 바로 내 앞에도 소녀가 웃으며 서있었다. 매우 따스한 미소와 함께 웃고있는 소녀의 모습은 내 분노를 한층더 자극했다. 그리고 동시에, 허탈한 감정이 분노를 차갑게 밀어냈다.
분홍색머리의 소녀, 이름은, 알고있다. 이슬비. 나와 동갑내기의 소녀. 그리고 지금 이 장소. 혹은 세계에 존재할리가 없는 소녀.
이슬비는 죽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모습은 내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내 삶과 함께 얼어붙어 멈춘것처럼.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내 시간과 함께 정지한것처럼, 내 곁을 맴돈다. 원망일지, 혹은 소녀를 잊지못하는 내 추억일지, 그것을 구분하는것은 무의미하다. 어느쪽이든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에.
이미죽은 사람과 다시 민날수 있는방법은 죽음, 혹은 꿈속에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소녀를 보고있지만 꿈을 꾸고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내 삶, 그 자체가 꿈으로 변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은 그 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보호히기 위해 모든것이 멈춘 시간속에서 삶이라는 거짓이 가득한 꿈을 꾸고있다.
하지만 아무리 삶을 꿈속에 가두어도 내 삶은 폭풍우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그저 더욱 폭풍우를 뼈저리게 체험하며 잊지못할 뿐. 잊고싶다 해도 족쇄가 박힌듯이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있는 추억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도 않고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다, 라는 생각이 하루에 수더없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편해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쇠붙이, 혹은 쥐약 하나로도 이 공허함이 가득한 인생이란 이름의 꿈을 끝마칠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이슬비는 내 눈앞에 나타났다. 슬픈 표정을 지은채.
정말 바보같다는것은 알고있다. 그저 환상의 잔향때문에 이 무의미한 삶을 끝내지 못하고 계속 같은곳만 맴돌고있다.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무한의 반복이 끝이날까.
어차피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것이였기에 나는 조용히 사고를 잠재우고 소파에 소리없이 앉자 TV를 켰다. 그러자 때마침 사랑과 차원전쟁이 방송중이였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건가, 이 막장 드라마는.
드라마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고지식한 모범생 이미지의 클로저인 여주인공과 그런 여주인공과 정반대인 대충대충이라는 느낌의 뭐든지 노력하지 않고 비협조적인 남주인공이 서로 티격태격 다투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가지만 결코 쉽게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추지 못하다가 가장 위험한 임무를 앞두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해서 사귀는 사이가 되고 마지막에 남주인공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여주인공을 사려내고 남주인공도 극적으로 생환하는, 그런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 뻔한 내용은 내 분노를 정곡을 찌르듯이 일깨웠다.
그 내용이 나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기에, 그리고 이야기속의 주인공은 나와 달리 여주인공을 구하는데 성공했기에. 그랬기에 드라마의 내용이 꼭 나를 조롱하는것 같이 느껴졌다.
결국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는 손에 들고있던 리모컨을 TV에 집어 던졌다. 작은 폭발음과 함께 박살난 TV가 눈에 들어오자 분노가 사그러지기는 커녕 더욱더 커졌다. 하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른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그렇게 집을 나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 걸어가기만 하던 나는 어느새 한밤중의 내가 모르는 공원에 다다렀다. 벌써 저녁 노을이 지던 공원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못하고 더 이상 움직이는것도 싫었기에 나는 그대로 공원의 벤치에 쓰러지듯이 않자 눈을 감았다. 모든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눈을 뜨는것도, 다리를 움직이는것도, 숨쉬는것 조차도.
이대로 모든것을 외면하고 잔다면 객사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속으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 어느때 보다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내 몸을 휘감으며 날 고요한 안식에 빠뜨렸다.
항상 꿈을 꾸면은 꿈속에서의 나는 꿈이라는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인 마냥 꿈에서 행동하곤 했다. 그리고 깨어나면은 꿈속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채 그저 무언의 허무함을 느끼며 알수없는 분노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나는 옛날 그시절, 고등학생 때의 모습을 한채 꿈이라는것을 자각하고 밝은 분위기가 나는 대기실에 작은 체구의 소녀와 함께 앉자있었다. 이게 내가 앞으로 꿀 마지막 꿈이라 그런가, 평소와 달리 분노는 내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채 평온을 유지했다.
“이세하, 뭘 그렇게 꼬운 표정을 하고 있어?”
“왜 대답이 없어? 혹시 내가 게임기 가져갔다고 삐진거야?”
그 시절, 내가 지겹도록 들은 목소리와 말이 너무나도 그립게 느껴졌다. 그 때는 더는 지겨워서 듣기 싫었던 대사도, 날을 세운듯한 날이 선 목소리도, 너무나도 강하게 내 분노가 아닌 무언가를 일깨웠다.
애절, 슬픔, 그리움, 애틋함, 그 무엇도 아닌 감정이 이성을 밀어내고 내 몸을 움직였다.
“이, 이세하?! 갑자기 왜 끌어안는거야!”
당황한듯한 목소리를 낸 소녀는 날 떨쳐내려고 바둥거리다가 이내 한숨을쉬며 내게 물었다.
“..... 무슨 일 있었어?”
조심스레 물어보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있었어... 아주 많이...”
“무슨 일이었는데?”
네가 내곁에서 사라지는 일을 격었어.
“외로웠어?”
어. 세상에 나혼자 남겨진것처럼 슬펐어.
“힘들었어?”
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거라고 생각될정도로 힘들었어.
“... 이젠 괜찮아. 나는 여기있어. 어디에도 가지 않아.”
이젠 괜찮다는 이슬비의 말을 듣자 여태껏 마음속 깊이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역류하며 나는 이슬비에게 매달린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슬비는 나를 아이를 대하듯이 감싸 안으며 내 머리를 천천히 토닥였다.
“참지 않아도 되. 울고싶으면 맘껏 울어.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거니까.”
아아... 거짓말이다. 결국 너는 내가 눈을뜨고 꿈에서 깨면은 내 곁을 떠날거야. 그게 바로 현실이니까.
“아니야,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네 곁에 있을거야.”
어떻게? 너는 이미 내 삶에서 떠나간지 오래인데.
“걱정마. 네 말대로 내가 이 세상을 먼저 떠나간다고 해서 내가 네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떠나간 세계에서 난 네 곁에 언제나 있었잖아?”
그건 그저 널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그저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기 위한...
“아니야. 내가 네곁에 계속 나타났던 이유는 네 기억속에서 나는 제대로 존재하며 살아있기 때문이야.”
이슬비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제대로 내 기억속에서 살아 숨쉬며 존재한다고. 내눈에 보였던 자신의 모습은 도피처가 아닌 내 기억속에서 존재하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느끼고있는 이슬비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인간이 수면을 취하면서 겪게되는 기억과 심리의 집합체다. 결국 이슬비가 한 말은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나 다름없다.
그래. 그저 꿈에 불과하다. 꿈에...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거지?
“그동안 슬펐지?”
슬펐다고? 그건 당연한거야.
“힘들었어?”
모르겠어.
“그래...”
어딘가 서글프게 대답하는 이슬비. 그런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안기며 나는 그녀가 살아있었을때 하지 못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곂쳤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함께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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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한 남자가 공원에서 죽은체 발견되었다. 행복한 표정을 지은체로. 한때 클로저이자 한 사람의 연인이였던 그의 죽음은 세간에 공표 되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잊혀졌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그렇게, 그는 잊혀졌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는 한가지 문장이 세겨졌다.
-다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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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꿈을 꿨다는 기억은 있다. 집중해서 생각해보면 대충 어떤 꿈일지 기억할수 있을것 같아 지금 막 일어나 몽롱한 머리를 붙잡고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저 비수같은 무언가가 가슴을 관통한것 같은 느낌이 들 뿐.
결국 꿈의 내용을 떠올리는것을 포기하고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하나 묻어있지 않은 천장은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내고있었다. 마치 얼룩하나 없는 눈밭처럼.
이질적인 천장에서 눈을 떼고 옆을 바라보자 세상이 기울어져 있었다. 이상한 광경을 몇초 바라본 후 나는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마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정신을 못차린 탓이리랴.
그런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져있다고 착각을 한 내 자신을 비웃으며 몸을 일으켜 세우자 깨질듯한 두통이 머리를 엄습해왔다. 숙취, 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나는 그 단어를 무시했다.
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 이유가 대체 뭔지 생각해보았지만 두통이 더 심하게 느껴질 뿐이였다.
지독하게 느껴지는 두통을 뒤로하고 일어난 나는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얼굴에 끼얹졌다. 갑작스런 차가움에 반응한 탓인지 두통이 조금 잦아든다.
머리가 한층 맑아지자 갖같은 기억들이 마음을 후벼판다. 하지만 고통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공허함이 가슴을 채울 뿐.
애써 그 공허함을 떠쳐낸 나는 화장실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어 여러가지를 꺼낸후 조리를 가한다. 머릿속은 이무생각도 없지만 몸이 짜여진 프로그램으로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식사가 완성되어 있었다. 딱히 공복감은 없지만 아무래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수저를 들어 눈앞에있는 음식들을 떠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아침에 일어나서 이제 멏번째일지도 모르는 이질감을 찾아내었다.
그릇과 수저가 하나 더 놓여져 있었다.
그 풍경을 보자 분노, 어쩌면 애같은 짜증남이 치밀어 올라서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기분이 아니였기에.
무턱대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작은 선반에 놓여진 액자 하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엇다.
그 액자속에는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웃으며 서있었다.
아니, 액자뿐만이 아니다. 바로 내 앞에도 소녀가 웃으며 서있었다. 매우 따스한 미소와 함께 웃고있는 소녀의 모습은 내 분노를 한층더 자극했다. 그리고 동시에, 허탈한 감정이 분노를 차갑게 밀어냈다.
분홍색머리의 소녀, 이름은, 알고있다. 이슬비. 나와 동갑내기의 소녀. 그리고 지금 이 장소. 혹은 세계에 존재할리가 없는 소녀.
이슬비는 죽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모습은 내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내 삶과 함께 얼어붙어 멈춘것처럼.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내 시간과 함께 정지한것처럼, 내 곁을 맴돈다. 원망일지, 혹은 소녀를 잊지못하는 내 추억일지, 그것을 구분하는것은 무의미하다. 어느쪽이든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에.
이미죽은 사람과 다시 민날수 있는방법은 죽음, 혹은 꿈속에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소녀를 보고있지만 꿈을 꾸고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내 삶, 그 자체가 꿈으로 변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은 그 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보호히기 위해 모든것이 멈춘 시간속에서 삶이라는 거짓이 가득한 꿈을 꾸고있다.
하지만 아무리 삶을 꿈속에 가두어도 내 삶은 폭풍우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그저 더욱 폭풍우를 뼈저리게 체험하며 잊지못할 뿐. 잊고싶다 해도 족쇄가 박힌듯이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있는 추억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도 않고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다, 라는 생각이 하루에 수더없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편해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쇠붙이, 혹은 쥐약 하나로도 이 공허함이 가득한 인생이란 이름의 꿈을 끝마칠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이슬비는 내 눈앞에 나타났다. 슬픈 표정을 지은채.
정말 바보같다는것은 알고있다. 그저 환상의 잔향때문에 이 무의미한 삶을 끝내지 못하고 계속 같은곳만 맴돌고있다.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무한의 반복이 끝이날까.
어차피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것이였기에 나는 조용히 사고를 잠재우고 소파에 소리없이 앉자 TV를 켰다. 그러자 때마침 사랑과 차원전쟁이 방송중이였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건가, 이 막장 드라마는.
드라마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고지식한 모범생 이미지의 클로저인 여주인공과 그런 여주인공과 정반대인 대충대충이라는 느낌의 뭐든지 노력하지 않고 비협조적인 남주인공이 서로 티격태격 다투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가지만 결코 쉽게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추지 못하다가 가장 위험한 임무를 앞두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해서 사귀는 사이가 되고 마지막에 남주인공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여주인공을 사려내고 남주인공도 극적으로 생환하는, 그런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 뻔한 내용은 내 분노를 정곡을 찌르듯이 일깨웠다.
그 내용이 나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기에, 그리고 이야기속의 주인공은 나와 달리 여주인공을 구하는데 성공했기에. 그랬기에 드라마의 내용이 꼭 나를 조롱하는것 같이 느껴졌다.
결국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는 손에 들고있던 리모컨을 TV에 집어 던졌다. 작은 폭발음과 함께 박살난 TV가 눈에 들어오자 분노가 사그러지기는 커녕 더욱더 커졌다. 하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른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그렇게 집을 나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 걸어가기만 하던 나는 어느새 한밤중의 내가 모르는 공원에 다다렀다. 벌써 저녁 노을이 지던 공원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못하고 더 이상 움직이는것도 싫었기에 나는 그대로 공원의 벤치에 쓰러지듯이 않자 눈을 감았다. 모든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눈을 뜨는것도, 다리를 움직이는것도, 숨쉬는것 조차도.
이대로 모든것을 외면하고 잔다면 객사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속으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 어느때 보다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내 몸을 휘감으며 날 고요한 안식에 빠뜨렸다.
항상 꿈을 꾸면은 꿈속에서의 나는 꿈이라는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인 마냥 꿈에서 행동하곤 했다. 그리고 깨어나면은 꿈속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채 그저 무언의 허무함을 느끼며 알수없는 분노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나는 옛날 그시절, 고등학생 때의 모습을 한채 꿈이라는것을 자각하고 밝은 분위기가 나는 대기실에 작은 체구의 소녀와 함께 앉자있었다. 이게 내가 앞으로 꿀 마지막 꿈이라 그런가, 평소와 달리 분노는 내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채 평온을 유지했다.
“이세하, 뭘 그렇게 꼬운 표정을 하고 있어?”
“왜 대답이 없어? 혹시 내가 게임기 가져갔다고 삐진거야?”
그 시절, 내가 지겹도록 들은 목소리와 말이 너무나도 그립게 느껴졌다. 그 때는 더는 지겨워서 듣기 싫었던 대사도, 날을 세운듯한 날이 선 목소리도, 너무나도 강하게 내 분노가 아닌 무언가를 일깨웠다.
애절, 슬픔, 그리움, 애틋함, 그 무엇도 아닌 감정이 이성을 밀어내고 내 몸을 움직였다.
“이, 이세하?! 갑자기 왜 끌어안는거야!”
당황한듯한 목소리를 낸 소녀는 날 떨쳐내려고 바둥거리다가 이내 한숨을쉬며 내게 물었다.
“..... 무슨 일 있었어?”
조심스레 물어보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있었어... 아주 많이...”
“무슨 일이었는데?”
네가 내곁에서 사라지는 일을 격었어.
“외로웠어?”
어. 세상에 나혼자 남겨진것처럼 슬펐어.
“힘들었어?”
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거라고 생각될정도로 힘들었어.
“... 이젠 괜찮아. 나는 여기있어. 어디에도 가지 않아.”
이젠 괜찮다는 이슬비의 말을 듣자 여태껏 마음속 깊이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역류하며 나는 이슬비에게 매달린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슬비는 나를 아이를 대하듯이 감싸 안으며 내 머리를 천천히 토닥였다.
“참지 않아도 되. 울고싶으면 맘껏 울어.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거니까.”
아아... 거짓말이다. 결국 너는 내가 눈을뜨고 꿈에서 깨면은 내 곁을 떠날거야. 그게 바로 현실이니까.
“아니야,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네 곁에 있을거야.”
어떻게? 너는 이미 내 삶에서 떠나간지 오래인데.
“걱정마. 네 말대로 내가 이 세상을 먼저 떠나간다고 해서 내가 네 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떠나간 세계에서 난 네 곁에 언제나 있었잖아?”
그건 그저 널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그저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기 위한...
“아니야. 내가 네곁에 계속 나타났던 이유는 네 기억속에서 나는 제대로 존재하며 살아있기 때문이야.”
이슬비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제대로 내 기억속에서 살아 숨쉬며 존재한다고. 내눈에 보였던 자신의 모습은 도피처가 아닌 내 기억속에서 존재하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느끼고있는 이슬비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인간이 수면을 취하면서 겪게되는 기억과 심리의 집합체다. 결국 이슬비가 한 말은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나 다름없다.
그래. 그저 꿈에 불과하다. 꿈에...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거지?
“그동안 슬펐지?”
슬펐다고? 그건 당연한거야.
“힘들었어?”
모르겠어.
“그래...”
어딘가 서글프게 대답하는 이슬비. 그런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안기며 나는 그녀가 살아있었을때 하지 못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곂쳤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함께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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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한 남자가 공원에서 죽은체 발견되었다. 행복한 표정을 지은체로. 한때 클로저이자 한 사람의 연인이였던 그의 죽음은 세간에 공표 되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잊혀졌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그렇게, 그는 잊혀졌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는 한가지 문장이 세겨졌다.
-다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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