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험담 중 일부인 이야기 3-7
한스덱 2018-10-09 0
이 이야기는 실제 게임 스토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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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열린 내 입은 또다시 다물어졌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추론을 듣고 놀라서 그런 건 아니다.
애초에 그녀의 말은 불확실한 추론이 아니라 확신으로 가득찬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도출해낸 단서들은 너무 많았다. 난 그녀가 오기 전부터 이 곳에 갇혀있었다. 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난 그녀에게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걸 오랫동안 망설였다. 방금 전에 벌어진 대결의 시시한 결과는 결정적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확인 중인 그 결론은 바로, 내가 지금까지 숨겨왔던 내 능력의 마지막 한계다.
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를 아무런 부담 없이 조작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난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에너지를 집중력만 유지한다면 모두 맘 편히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엔 내가 조작하면서 부담을 받아야만 하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 에너지는 겨우 두 개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치명적이었다.
그 치명적인 에너지들의 정체는 만천하에 공개된 지 오래다. ‘제 2 위상력’과 ‘오염 위상’ 말이다. 난 저 에너지들을 조작하면서 엄청난 부담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에너지를 조작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어쨌든 그녀의 공격을 반사해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에너지들을 조작하면서 받는 고통은 내겐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내 능력의 세 번째 한계를 ‘사용 조건’이 아니라 ‘한계’에 집어넣어버린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온 몸을 대바늘로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보다 더 아픈 고통을 참아내면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매우 힘들다는 말이다.
이 사실들을 두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녀가 겨우 찾아낸 두 번째 동앗줄마저 썩어있었다.
게다가 첫 번째 동앗줄보다 더 고약하게 썩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확인사살을 묵인해버리자, 그녀는 이야기의 마무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고마워.”
난 그 말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날 돕겠다고 말해줘서 말이야. 정말 힘들었을텐데. 넌 그 결정을 결국엔 스스로 내렸어”
그녀는 내 호의를 꾸며주고 있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아름다운 장식을 손수 걸어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난 멍청이였다.
“전 당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난 내 가식에 잔뜩 걸린 장식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걸 내 손으로 걷어내버렸다. 장식들의 모서리에 찔린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전 당신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 마음이 편해지려고 당신을 돕는 겁니다. 아니… 저는 당신을 돕는 척 했을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이기적으로 말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서야 내가 숨겨놓았던 폭탄들이 일제히 격발했다. 하지만, 그 폭탄들은 모두 불량품이었고, 그래서 불꽃놀이에 쓰이는 폭죽보다도 위력이 더 떨어졌다.
하지만, 불량품이라곤 해도 폭탄은 폭탄이다. 그것들은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장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가식적인 호의로 그 솔직한 심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봉인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혈입성한 내 마음속을 사찰하면서 그것을 밖으로 풀어버렸다. 그 봉인 속에 숨겨진 건, 우스꽝스럽게 생긴 추악함이었다.
“난 당신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이건 올바른 행동이다. 그러니까 난 잘못한 게 전혀 없다. 전 이런 말도 안되는 변명을 지껄이면서 저 지옥 속으로 투신하려고 한 겁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전 그 검붉은 힘을 조작하는 게 너무 힘듭니다. 결국 전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마 안 가 그 힘에 먹힐 겁니다. 그것도 당신과 함께 말입니다!”
불량품이었던 폭탄은 화약 찌꺼기가 불완전 연소를 하면서 생겨난 유독 가스를 밖으로 내뿜기까지 했다. 그 추악한 냄새가 나는 가스는 내 마음속에 가득 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속에는 그녀가 들어와있었다.
“전 당신에게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당신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독 가스가 내 눈으로 들어와버렸다. 나는 그 매운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멀쩡했다.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런 어설픈 악의에 상처받는 나약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녀는 가스를 저 멀리 날려버린 다음, 남은 화약 찌꺼기로 폭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하늘로 쏘아올렸다. 그 폭죽은 펑 하고 터지는 대신, 다음과 같은 폭발음을 냈다.
“그리고, 걱정하지마. 날 믿어줘.”
난 이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 이래봬도 달리기는 제법 빠른 편이야. 100 m 달리기를 하면 너보다 더 빠를 걸? 게다가, 네 도움을 받으면 더 빨리 달릴 수도 있어. 지평선 두 개 넘는 것 따윈 순식간에 끝날거야. 그러니까…”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동시에 그때까지 계속 잡고 있던 내 왼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버린 내 왼손을 향해 자신의 왼손을 또다시 내밀었다.
“날 믿고 조금만 참아줘. 그러면 난 널 끝까지 믿어주겠어.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보답이야.”
난 고약하게 썩어버렸는데,
그녀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것이다.
난 그녀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난 그녀에게 그 어떤 믿음도 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런 나에게 믿음을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끝까지 멍청이였다. 그녀가 내민 것을 받기만 하면 끝났는데, 그걸 또 망설여버렸다.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아까보다 더 펑펑 울고 있었다.
“이런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괜찮아.”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엔 멍청이를 조롱하는 비아냥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네가 나에게 뭘 바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네가 준 선물들에 보답하고 싶을 뿐이고, 게다가 나도 여기서 반드시 나가야만 해. 그래서 널 돕는거야. 다른 이유는 없으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그녀는 이 다음 문장을 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함께 이 지옥에서 멋지게 달아나보자.”
나는 그런 꿈 같은 희망은 이미 포기해버린지 오래였는데,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지가 꺾여버린지 오래였는데,
나는 스스로가 추악해서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지은지 오래였는데,
그녀는 그런 나에게 괜찮다고,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마침내 진짜 그녀를 깨달았다.
나는 재앙이나 영웅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스케치북에다가 그녀의 모습을 제멋대로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너무 작았다. 저 따위 스케치북에다가 진짜 그녀를 그려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의 손을 맞잡기 전에 해야만 하는, 아니,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의 모습을 가려버리는 고글을 벗어버렸다.
렌즈의 뒤에 숨어있던 내 눈이 바깥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 눈동자는 아직 커튼을 걷지 않았다. 흠뻑 젖어버린 커튼 뒤에는 물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왼손으로 꼼꼼하게 퍼냈다. 내 시야를 가로막는 방해물은 이제 눈꺼풀 뿐이다.
그리고, 난 마침내 두 눈을 활짝 떴다.
에너지의 모습들이 내 눈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하지만, 난 그 정도 아픔 따위는 참아버렸다. 에너지 때문에 선명하게 바라볼 순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내 두 눈만으로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연보라색이고, 눈동자는 황금색이었다. 아마도 위상력을 각성하면서 얻게된 색깔일꺼다. 위상력이 없었을 때는 어떤 색을 가졌을까?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동안이었다. 차원 전쟁이 벌어진 지 20년 가까이 지난데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찬란한 인생과 맞먹는 미모를 가졌다.
내 두 눈은 제발 이 고통을 끝내달라고 나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해줘야만 한다. 그녀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녀가 나에게 끝까지 손을 내민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난 인간이 아닌 차원종이니 ‘좋은 사람’이라는 말보단 ‘좋은 인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사소한 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서지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저 ‘좋은’이라는 형용사엔 그 어떤 긍정적인 수식어도 모두 갖다붙일 수 있었다.
서지수는 강한, 당당한, 정이 많은, 굴하지 않는,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웅, 알파퀸, 차원종의 재앙 같은 호칭들은 그녀의 일부를 표현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인간들에게 저런 낯간지러운 호칭들로 불리며 칭송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저런 칭송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남들에게 칭송을 받을 자격이 충분할만큼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붙은 호칭들만을 바라보면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조각내버렸다. 그리고 난 그 덩어리가 그녀의 실체라고 멋대로 상상해버렸다. 내가 그렸던 그녀들은 정답에 점점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 덩어리들은 진짜 그녀와는 한참을 빗나간 오답들을 체크한 빨간선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드디어 그 오답에서 벗어났다. 게다가 나를 옥죄던 감옥에서도 벗어났다. 그녀는 내가 갇혀 지내던 방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나를 향해 밖으로 같이 나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을 가득 빛추는 빛에 눈이 멀 것만 같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그녀가 내민 손 안에 들어있던 선물 덕분이었다.
나는 고글을 다시 썼다. 그녀의 모습은 다시 에너지의 덩어리로 바뀌었지만, 그녀의 진짜 모습은 내 두 눈과 기억 속에 화끈거릴 정도로 강렬하게 남았다. 그녀는 자신이 구한 그 사람들을 깜박 잊어먹었지만, 나는 그 사람들처럼 그녀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나 때문에 제법 놀랐나 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을 드디어 맞잡았다.
“알았어요. 여기서 함께 나가요…!”
그녀도 마침내 가장 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다음 걱정거리를 해결해볼까? 배고파! 밥해주라.”
난 이번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웃고 있었다.
밭의 중심은 엉망이 되었지만 주변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난장판에서 여전히 손을 맞잡은채 활짝 웃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지수에게 마음을 열게 된 과정이다. 시간상으로는 7 일째 하루가 시작된지 2시간 남짓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