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험담 중 일부인 이야기 2-7
한스덱 2018-09-23 0
이 이야기는 실제 게임 스토리와는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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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와 나는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온 뒤로 약 3시간 동안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내 안식처이자 감옥에서 가장 큰 감격을 느꼈던 공간까지 다시 돌아온 후, 침상이 아니라 내가 기대어 앉아있던 벽에 기대어 앉아버렸다. 그리고 웅크린 두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차라리 그녀를 딱딱한 돌 침상에라도 눕혀서 쉬게 할 생각이었던 나는 차마 그녀에게 눕기라도 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할 수 없이 그녀의 오른손에 감긴 풀 붕대만 풀어주었다. 절단면이 모두 아물은 것을 확인한 나는 그 풀을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건 블레이드를 가져오는 걸 깜박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내 침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동굴의 출구 근처까지 절뚝거리며 다시 가서 그 제법 묵직한 무기를 왼손에 챙긴 다음, 내 침실까지 다시 절뚝거리며 돌아와 그녀가 앉아있던 벽 옆에다 가만히 세워놓았다. 마지막으로 난 그녀와는 정 반대편 자리인 침상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깊이 숙여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그 제법 오래 걸린 작업들을 고개를 깊이 숙여버리는 걸로 마무리할 때까지는 물론이며, 그 이후부터 3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붕대를 풀기 위해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지금 이 이야기의 시점은 1인칭에 근접했기 때문에 난 그녀의 마음 속을 정확히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 속을 내 보물 1호, 그리고 2호를 모두 걸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녀의 오른손은 침묵의 3시간 동안 조용히 다 자라났지만, 마음 속의 희망의 불씨는 3시간 전에 조용히 사그라졌다. 끔찍하게 넓은 독방같은 지옥 속에서도 활활 타오르던 그 희망은, 끔찍한 지옥 속의 좁디좁은 독방 안에서 새까만 재만 남긴 채 사살되었다. 무려 두 번씩이나 철저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온갖 고통을 받았겠지만, 그 고난의 대부분을 이겨낸 덕분에 병상에서 다시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주쳐버린 이 사상 최악의 고난은 이겨낸다는 도전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녀는 그 때문에 사상 최악의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그 엄청난 고통을 이겨낼만큼 간절한 희망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런 꿈같은 묘약 따위는 없다고 포기해버렸다.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을 그 정신은, 그녀의 인생 모두를 저주로 바꿔버릴 울부짖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우선 제 발로 독방에 갇혀버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것이다. 그 다음엔 그 빌어먹을 지하 3층의 문을 제 발로 열어버린 걸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덧칠들은 끝도 없이 퍼져나갈 것이다.
후회의 회색에 해당하는 덧칠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악마의 추종자한테서 얻은 정보에만 의존하는게 아니었는데.
풍경 따위나 감상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게 아니었는데.
그 악마를 상대할 때 방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그리움의 초록색에 해당하는 덧칠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편지를 보내준 수많은 사람들…
끔찍한 전쟁을 함께 이겨낸 소중한 전우들...
자랑스러운 내 아들…
들… 들… 들…
분노와 원망이 뒤섞인 보라색에 해당하는 덧칠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왜 난 그 문 뒤에 차원 이동석이 있었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왜 난 하필이면 통신기를 먼저 찾아버렸을까.
왜 난 고난들을 이겨내야만 했을까.
왜 난 ~을까, 왜 난 ~을까, 왜 난 ~을까,
그 외에도 더 다양한 색들이 있을 것이고, 덧칠의 예시들 역시 더 많이 있겠지만, 그것들 모두를 여기다 적어버리면 내 이야기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 전부를 저주로 다시 그려내는 것은 위의 세 가지 색만으로도 충분했다.
참모장의 계획에 휘말린 그 사람들을 먼저 구하는게 아니었는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 그 소중한 사람들…
왜 난 그 사람들을 원망했을까.
그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은퇴해 버리는게 아니었는데.
그놈들에게 핍박받고 버림받은 수 많은 전우들…
왜 난 차원종을 상대로만 싸웠을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내 삶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게 아니었는데.
고통, 슬픔, 상실, 불행, 그 많은 것들을 이겨낸 순간들…
왜 난 영웅 따위가 되어버렸을까.
힘, 의지, 성격 등의 강렬한 색깔들 덕분에 가까스로 축복에 더 가까운 방향으로 그려졌을 그녀의 굴곡진 인생은, 그녀를 가둬버린 저 검붉은 지옥보다 더 불길한 색깔들로 다시 칠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고난들을 이겨낸 영광스러운 순간들은, 차라리 그때 포기해버렸다면 지금은 편해졌을지도 모른다는 무의미한 안식에 대한 갈망으로,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지켜낸 수 많은 것들은, 정작 자신의 인생을 지켜내주진 못할망정 방해만 한 적들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의 반짝거리던 축복들이 어둡고 칙칙한 저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단 한가지를 망쳐버린 것 때문에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검은색으로 번해버리기 일보직전 이었다.
그녀가 망친 그 한 가지는 바로, 자신의 모험담의 결말이었다.
그 모조리 비극으로 장식될 결말들 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최후가, 다리를 절고, 온 몸에 흉터를 입은데다가, 눈마저 제대로 안 보일 뿐더러, 제대로 된 말 한 마디조차 안하는 차원종과 영혼의 단짝이 되서 수명이 다 할 때까지 그 동굴 속에서 같이 살다가 그 친구에게 자신을 영원히 잊지 말아달라는 잔인한 유언을 남겨버린 채 이 세상과 쓸쓸히 작별하는 것이였다. 그리고 그건 그저 최악이 아닌 차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나마 마음에 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그 최후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게 틀림없다. 애초에 그런 비교적 안락한 최후 따위는 그녀에게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운명이었다.
그 이유는, 난 그녀와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사는걸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게 두 번째다.
그리고 첫 번째는, 지금의 난 그녀와 영혼의 단짝이 되기는 커녕 그 어떤 연도 맺고 싶지 않았다.
내 생각이 드러난 참에, 그녀의 마음은 그만 훔쳐보고 내 생각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
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내 손으로 헤엄쳐서 건너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그 강을 건너게 만들어버린 원인은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더 원망스럽다.
밉다. 증오스럽다. 꼴도 보기 싫다. 그리고, 부러웠다.
혼자서 절망의 나락으로 향하는 구덩이를 파고 있는 그녀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녀를 반드시 말려야만 하는 운명이다.
그 운명이 내가 건너버린 강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되었던 그 강을 건넌 건 분명 나였다.
그저 싫었고, 두려웠고,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그 물은 아까 내가 헤엄친 강 속에 섞여있었다.
난 그 침묵의 3 시간동안 그녀의 모습을 슬쩍 지켜봤었다. 그리고 내가 소문으로 들었던 그 ‘재앙’도, 아무런 해답이 보이지 않는 위기 속에서는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실 난 ‘재앙’과 같은 그녀라면,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에 갇혀버리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살아보려 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허구의 존재가 절대 아니었다.
그녀 역시 고통을 느끼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냉정한 현실에 절망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정보만으로 추측했던 내 상상 속 그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난 군단과 맞서 싸워서 영웅이 된 존재라면, 그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어떤 적과 만나더라도 가뿐히 물리쳐버리는 ‘재앙’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앙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었다.
나는 그녀가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덕분에, 내 상상 속의 그녀를 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다시 그릴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재앙’같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적이 아닌 자를 배려해 주고, 그 자가 준 호의에 감동을 느끼며, 지옥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결국엔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감옥 속에 갇혀버린 채 깊은 절망에 빠진 인간 영웅이었다.
그리고 난, 그녀가 절망에 빠져버린 모습을 계속 지켜보는 게 정말로 괴로웠다.
그 괴로움은 내가 싫었고, 두려웠고,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도 더 컸다.
사실 난 3시간보다는 훨씬 더 빨리 이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난 당연히 해야만했던 그 결정을 내리는 걸 정말로 많이 망설였고, 그 덧없는 망설임 때문에 그녀가 끔찍한 고통을 외롭게 느끼는 걸 내버려두고 말았다.
난 이미 그녀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니 난 그녀에게 속죄해야만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렇게 난 3시간의 깊은 고뇌를 끝내고, 여전히 싫었고 두려웠고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그것과 마주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