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모음집 part 02.5
루이벨라 2018-05-10 6
1. [세하유리] 담백하게
※ 담백하다(淡白--) : 1.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 2. 아무 맛이 없이 싱겁다. 3.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 4. 빛깔이 진하지 않고 산뜻하다.
"좋, 좋아합니다! 사귀어 주세요!"
"..."
'우와...'
몰래 보는 건 취미가 아니지만, 그 장면을 딱 보자마자 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귀엽게 생긴 여자 아이와 세하의 투 샷.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수줍게 고백하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는 매우 커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왜 자기도 모르게 숨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가 느리다고 해도 저 상황을 딱 마주하면 당연히!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지 않는가.
이 영화 같은 상황에서 유리가 감탄할 부분은 딱 한 부분.
'세하...고백도 받는 아이구나!'
유리는 새삼 놀랐다. 세하는 눈에 띄는 아이였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지는 않는 아이였다.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와 배경이 있어서인 듯 했지만, 유리는 그런 거 따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첫 만남 당시 태연한 유리의 반응에 오히려 세하가 더 놀랐다는 후문도 가지고 있다.
고백...뭐, 받아도 이상하지 않지. 객관적으로 보면 세하는 잘생긴 축에 속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성격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요리도 기가 막히게 잘하고..!! 아, 마지막 부분은 웬만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부분이려나. 아무튼 세하가 이리 고백 받는다는 거 새삼스럽게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못 볼거라도 본 것처럼 바로 숨어버리고, 쿨하게 몰래 지나가지 않고 계속 이야기(여자 아이의 고백 목소리 이후로 작게 속삭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를 엿듣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왜 이렇게 신경쓰일까. 원래 남의 연애사가 더 재밌는 법.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라 무언가가 다른 이유가 콕 박혀있는 거 같은데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유리 자신에게 한 가지 또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가슴이 한 구석이 아파...'
찌르르- 무언가가 울린다. 점심 먹은 것이 체한건가. 그런 거치고는 체했을 때 지압하면 좋은 곳을 눌렀는데도 아픔은 가시지 않았다. 그 아픔이 아니고 이 아픔인가 보다. 이렇게 계속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할 바에는 빨리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먼지를 훌훌 털고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너 거기서 뭐하냐?"
"...!!"
세하의 목소리. 바로 옆에서 들렸다. 진작에 그 여자 아이와의 이야기는 끝낸 기색이다. 잘 숨어있던 유리의 존재를 진즉에 알고 있었는지 '유리 네가 왜 여기 있어?!' 라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뒤이어 태연스럽게 물어보는 질문에 의해 그 가설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다.
"다 듣고 있었지?"
"어, 어어?? 아, 아니!!"
'다 듣고 있었네...'
유리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얼굴에 표시가 다 난다. 제 딴에는 열심히 숨겨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세하는 딱 정색했다. 그 뒷부분의 문장은 왜인지 알려져서는 안 될거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고 좀 더 미래에.
유리는 세하에게 사과를 했다.
"내, 내가 들으면 안 되는거였는데, 미안해."
"딱히 상관 없어. 정중하게 거절했으니까."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는 의미로 세하가 손을 들었다. 거절했다는 세하의 말에 유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차피 목적지가 같기 때문에 두 사람은 나란히 갈 수 밖에 없었다.
왜 거절했냐, 는 질문은 입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기쁘기도 한데 무언가 이상한 분노도 같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 분노가 세하에게 향하는건지, 그 여자 아이에게 향하는건지, 아니면 유리 자신에게 향하는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색이 섞여버린 감정에 휩쓸리다 유리는 입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부루퉁하게 갑자기 나가버린 그 말은 다시는 담을 수 없었다.
"나도 세하 좋아하는데."
"..."
"..."
"..."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 말이 뒤늦게서야 생각이 나 유리는 쥐구멍이든 어디든 빨리 들어가고 싶어졌다. 무, 무슨! 이런 멋없는 고백이 세상에 어디 있어!? 아까 그 여자 아이처럼 진심이 크게 담겨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 엄청 분위기가 있는 곳에서 말한 것도 아니고!! 빠, 빨리 세하를 보면 안 될거 같았다. 자칫하다가는 세하에게 '미안해' 와 같은 비슷한 말을 들을까봐.
세하가 유리의 그 말에 답을 해준 건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주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 담긴 채로 세하는 말했다.
"나도 유리 네가 좋아."
"..."
"...말 좀 해. 나도 기껏 용기 내었는데."
"아, 아니, 잠깐, 잠시만요!"
얼결에 존댓말이 튀어나갔다. 귀까지 새빨개진 유리의 횡설수설을 듣던 세하가 살며시 끼여들었다.
"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 서운해하기 없기다?"
"으, 응..."
"이럴 줄 몰랐어. 갑자기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고백 받는 거."
"그, 그래?"
지금 생각해도 참 멋없는 고백이었다. 근데 세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엄청 기뻐하는 표정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눈이 예쁘게 반짝거리는 세하의 얼굴을 보며 유리는 감탄했다.
참 잘생겼다...저 얼굴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져있는지 한 번 만지고 싶은 충동도 같이 느꼈다. 그 생각과 동시에 바로 세하의 뺨을 향하는 손을 세하는 살짝 잡았다. 아, 세하 손은 참 따뜻하다. 군데군데 딱딱한 굳은살의 감촉도 느껴진다.
세하가 물었다.
"손 잡고 걸어도 돼?"
"응."
나도 좋으니까, 괜찮았다. 근데 이 손 잡은 걸 언제 풀어야하는지 서로 몰라서 한참 동안 그러고 갔다.
그래도 좋으니 괜찮았다.
공백포함 : 2,679자/공백미포함 : 2,017자
2. [세하유리] 쉼표 하나
뉴욕 총본부로 옮긴지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은 바빠서 신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제대로 못 했기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뒤늦은 안부를 전하기로 했다.
막상 전화를 하자니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색한 침묵을 몇 번이고 반복해**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는 편지를 쓰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편이 훨씬 나았다는 걸 편지를 쓰는 중에 깨달았다. 전화 상에서는 차마 길게 전하지 못했을 여러 말이 두서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문장이 하나 둘씩 늘어날 때마다 그에 담긴 기억이며 추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며칠의 시간을 보내 마지막 편지의 맺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불현듯 미국 출신의 한 클로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냥 흘러들었고, 영어도 유창한 편은 아니라 그게 내 기억에 남겨져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떠올라 당황스러웠다.
-편지 인사말에 말이야, 보통은 이렇게 쓰잖아...? 그런데 이렇게 쓰면...
"..."
막힘없이 써내려가던 볼펜의 촉이 멈추었다. 편지를 중간에서 멈추고 맨 처음에 썼던 인사말 부분으로 돌아갔다. 잠시 망설여졌다. 그제야 내가 왜 그 건성으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애꿎은 볼펜 심만 편지의 공백 부분에 꾹꾹 눌렀다.
한 가지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이거 웬만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까...사실일테니까 딱히 눈치 채지 못할 거야.
응...그러니 넣자.
나는 편지 제일 앞에 썼던 'dearest' 와 'Yuri' 사이에 반점(,)을 찍었다. 겨우 한끝의 차이를 바꾸는 건데 이렇게 많은 고민을 했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쉼표의 유무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나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유리는 그 의미를 알까. 아마 모르지 않을까. 그러니 이런 짓궂은 방법으로 슬쩍 상대방 마음을 떠보는 것. 그런데 그 방안이 참 비참하다. 내 솔직한 감정을 벗겨내어 도마 위에 올린 꼴이 아닌가.
쉼표 하나로, 몰래 마음을 전할 수 있다니. 쉬우면서도 어려운 방법이다.
그리고 비겁한 방법이다.
※ My dearest OOO = 친애하는 누구에게
My dearest, OOO =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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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하유리] 아이스크림
"덥다."
"응."
땅거미가 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기는 여전히 습하고 후끈했다. 초여름에는 그래도 저녁 때가 되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 겉옷을 챙겨도 될 정도였는데, 여름이 다 가는 이 시점에서 여름은 자비 따윈 결코 주지 않겠다는 듯이 한창 더위를 흩뿌리고 있었다.
말이 좋아 흩뿌린다고 했지, 인정사정 없이 열기와 습기가 온몸을 공격하고 있었다.
여름은 자애롭지 않았다. 일부러 해가 지는 걸 보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더웠다. 방금 전까지 에어컨을 시원하게 튼 동아리방에서 냉기를 충전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견딜 수 없었다.
이제 겨우 반절 왔는데...집에 가는 길이 참 멀었다.
톡톡- 그런 유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세하. 아주 좋은 걸 발견한 목소리다.
"서유리."
"응...?"
"저기 갈래?"
세하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유명 브랜드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었다. 저곳은 말하자면 이 더위 속에서 찾은 천국?!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저녁 식사 때가 다 되어가 지금 군것질을 하는 건 잠시 망설여질 행동이었지만, 유리는 잠깐 동안의 피난처를 우선적으로 선택했다. 저 장소를 찾은 장본인과 눈이 마주치는데, 두 사람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대로 돌격!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차가운 냉기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활짝 웃으며 세하와 유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아, 저..."
맛도 많아서 무얼 시켜야할지 참 고민이었다. 이것도 맛있을 거 같고, 저것도 맛있을 거 같고! 그래도 역시 최애(最愛)의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면 당연히...!!
""초콜렛이요(으로 주세요).""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했다. 당사자들도 놀라고, 주문을 받던 직원도 놀랐다. 직원은 새빨개진 두 고등학생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참 귀엽네, 라고.
"안녕히 가세요~"
세하와 유리는 각자의 손에 아이스크림을 지닌 채 마저 가던 길을 갔다. 갓 퍼낸 아이스크림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하얀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리는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아아, 행복해!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무는 것에서부터 이렇게 행복하다니!
옆을 힐끗 보니 세하도 유리 못지 않게 아이스크림에 푹 빠진 표정이었다. 예쁘게 반짝이는 세하의 눈동자를 훔쳐보며 유리가 말했다.
"시원하다."
"응."
"입안에서 별이 팍! 튀는 거 같았어."
"그래?"
그만큼 지금 서로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참 위안이 되었다는 거겠지. 세하는 옅게 웃었다. 어느 정도 수긍한다는 의미. 유리는 기분이 괜스레 좋아졌다.
이 작은 한 입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이 아이스크림 안에는 정말 자그마한 별들이 꼭꼭 숨어있는 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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