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어느 평온한 가을날

환상향의초요괴탄두 2017-10-09 9

-본 작품은 위상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이며, 원작보다 시간이 더 지나간 시간대입니다.

-고로 고등학생은 여기서는 대학생입니다.

-원작과 다소 큰 설정변경이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입대 전에 올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입니다. 필력에 문제가 있어도 이해해주세요.

-본 작가는 세슬 유저입니다.


<추천 BGM: https://youtu.be/4_-teNonZ_4>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과제 제출 기한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입니다."

오늘자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나-이세하는 신강고를 졸업한 후 국어교육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시간은...'

오후 4시 30분. 아직 시간은 여유롭다. 대학교 동아리도 오늘은 하는 날이 아니고...

'집에 가서 준비하고 출발해도 되겠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전원을 켠다. 평소와 같이 내 기분을 딱 좋게 유지시켜주는 곡이다.

'그때부터 시간이 꽤나 흘렀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나서 단 한번도 연락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다들 자기 시간에 쫓겼기 때문일까.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시간이 다 되었던 것이다.
그 말은 곧, 오늘이 정기 모임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변해있을까? 다들.'

교문을 나서면서 낙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때, 이어폰에서 갑자기 내 전화벨이 들려왔다.

"한석봉...?"

녀석. 프로게이머가 되고싶다고 해서 여러 사이트 찾아가면서 노력했더니 결국은 성공했다지?

"어, 석봉아. 무슨일인데?"

-완전 대박! 시청자들이 코인 많이 주고있어! 어제만해도 얼마를 벌었는지..!

아 그래. 대회쪽으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스트리머 쪽으로 가기로 했었지. 참.

"그러냐? 나도 방송 잘 보고 있어. 이젠 무슨 수를 써도 이기는 건 무리겠더라. 오늘은 뭘 방송할거냐?"

-요번엔 시청자 추천으로 하려고. 오늘 만나러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알겠어. 오늘도 방송 잘 해라."

뚝.

잘 지내고 있네.


"선배님, 저랑 같은 조 해주세요."

"괜히 나에게 빌붙어서 무임승차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게 달라붙는 후배를 손가락으로 스윽 밀어낸다.

"아, 아니에요! 그냥 선배님 부담을 줄여주려고요."

"야, 과수석에게 달라붙지마~나 이미 조원 예약되어있다구?"

"과, 과수석이라니 무슨...!"

"아! 선배님 얼굴 빨개지셨다! 사진 각이에요?"

"야! 폰 안 치워?!"

허둥대다가 교재를 엎을 뻔했다.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한 다음...

"어차피 조원은 전과 다르게 갈거니까 그렇게 알아."

"네에..."

"오늘 모임도 있는데 피곤하게 만들지마."

대학교로 올라오면서 머리를 길렀더니 대학교에서 팬클럽까지 생겨날 기세였다.

"무슨 모임인데요?"

"오랜 친구들 만나러."

"설마 거기 남자친구 있는거 아니에요? 그 검은 머리에 금색 콘텍트렌즈 낀 그 남자랑 꼭 달라붙어서 헬렐레하고 계시던 사진이 여기 있..."

"꺄아아아아악~! 사진 치워어어어!!!"

미안해 이세하. 오늘 오기 전에 벌써부터 부끄러움이 가득 올라오고 있어...


"빠른머리 준비!"

"핫!"

"200개. 시작!"

"하나! 둘! 셋!"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른머리치기 200개로 시작한다. 그 다음은?

"빠른손목 준비!"

"흐앗!"

"마찬가지로 200개 시작!"

빠른손목치기. 다음은 빠른허리치기. 전부 200개로 한다.

"허리!"

200회 빠른허리치기까지 하고 나자 코치인 J씨가 엄지를 든다.

"수고했어. 5분 휴식."

"흐아악. 하악..하아악..."

역시 매일같이 이렇게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하루쯤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럴때면...

"이번에도 트로피 가져오려면 꾸준히 노력해야지? 전국 검도대회 최상위권에 계신 서유리 아가씨?"

"아저씨...틀린 말은 아니라서 부정할 수 없네요..그러니 부정하게 해주세요."

"거절하지."

나-서유리는 검도와 태권도를 동시에 배우고 있다. 검도는 내가 원해서, 태권도는 제이 아저씨(정작 그는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코치라고 불러달라고 하지만 깔끔히 무시하고 있다)가 권유해서.

"아, 오늘 오랫만에 친구들 보는 날이네요."

"아아. 그렇지. 몇년만이지?"

J씨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날 곳에 가기로 했다. 동아리 지도교사였던 김유정 선생님도 오실 예정이라서인가?

"유정쌤 보러가시는 게 아니구요?"

"쿨럭. 켁. 어떻게 알았지?!"

"표정 보면 다 나와요. 코치님."

"그래그래. 그럼 일어서서 죽도는 저기 두고 와. 체조 들어간다."

"Yes Sir!"


툭.

"이번 숙제도 여기서 끝...단 게 필요해..."

잔잔한 클래식음악을 틀어둔 방에서 나와 부엌 쪽의 핫초코 스틱이 가득 담긴 통에서 스틱 하나를 꺼낸다.
물이 끓자 그대로 핫초코를 담아서 방으로 가져온다.

"역시 고등학교 수학은 조오금 어렵네..유정이 누나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나..?"

신강고로 들어가기 위해선 공부를 좀 더 철저히 해야했다. 워낙 학교가 좋은 위치에 있어서 가고 싶은 학생이 많았기에 갈 확률은 타 학교에 비해서 상당히 적은 편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성적을 조금이라도 더 올릴 필요성이 있었다.

'세하 형이나 슬비 누나..유리 누나도 열심히 했겠지..?'

아, 유리 누나는 대학교는 포기하고 운동 쪽으로 빠졌지.
잠시 침대에 누워서 조금 쉴까.
핫초코가 지금은 너무 뜨거워서 좀 식혀야할 것 같으니.

'오늘 다같이 만날 날이네.'

오늘은 단축수업이고 내일은 개교기념일. 그래서 지금이 낮이지만 집에 있는 것이다. 뭐, 정확히는 내가 유정이 누나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거지만.

'다들 어떤 모습일까...'

분명 모두 빛나는 모습일거야. 아마도!

"웃차.."

자, 어느 정도 쉬었으니, 이제 슬슬 숙제를 마저 끝내볼까. 고등학교 과목들은 대체로 다 어렵단 말야.


-실기에서는 아주 고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필기에서 불합격하셨습니다. 다음번엔 더더욱...

"쳇..."

이건 벌써 2년전의 말.
허나 지금은.

슥...휘릭. 슥.

"....좋아."

직접 조각한 소형 석고상과 나무조각을 적당히 두고, 수채화로 담아낸다.

"짜식들이 내 거 보고 분해하는거 아냐? 키히힛..마음에 들어!"

재수를 거쳐서 가까스로 합격한 다음엔, 수많은 과제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 속을 풀어내기엔 훌륭한 시간이었다.

미술을 하는 동안에는, 이 공허함을 채울 수 있으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직업군인. 학교폭력에 자주 시달려왔기에, 나는 친구가 매우 적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그래. 그 망할 악우들과 만날 날이네. 원수같은 놈들도 오랫동안 안 보면 그리워지는 걸까. 유독 보고 싶어지네.

'어서 끝내고 그 망할 얼굴 좀 보러갈까.'

생각을 다시잡고 새로 캔버스를 올린 뒤 스케치를 위해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아~아아~~!"

좋아. 목의 상태는 아주 양호한 상태야. 일단 천천히, 목을 풀면서 보컬 트레이닝을 하는거야.

"~♬♪"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훌륭해.

"자, 박자 맞춰서 이렇게."

따로 초청 강사까지 불러서 댄스 실력도 가꿔나간다.
하고 나면 온몸이 늘어질 정도로 지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습생 생활 참 힘들지?"

선배가 옆에 앉아서 스포츠 드링크를 건넨다.

"ㄴ, 네."

갈증이 심했기에 그자리에서 쭈욱 마신다.

"안타깝네. 오늘 같이 만날 예정이었던 애들과 연락했어?"

"네, 어제 연락을 했어요."

원래 오늘은 오랜 친구들과 만날 날이었다. 하지만 연습생에게 있어 밖에서 친구들과 놀러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파기할 수 밖에 없었다.

"좀 더 쉬었다가 마저 연습하자. 웃으면서. 친구들과 연락하는 건 나중에 영상통화로도 실컷 할 수 있잖아? 오늘은 연습 일찍 빼달라고 부탁할게. 오늘 하루종일 통화해도 좋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가, 감사..합니다.."

"울기는...자, 여기 손수건. 조금 있다가 다시 하자. 레비아."

"네! 선배님!"

손수건에는 귀여운 늑대소년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다녀왔습니다~참. 나 독신이지."

어중간한 대학교를 어중간한 성적으로 졸업한 내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수에 가까웠고, 취업공부를 꾸준히 하고 자격증도 서너개 더 땄음에도 취업의 길은 힘들었다.

지금은 아직 백조. 하지만 며칠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응시했던 기업면접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제 결과를 기다리면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으면 돼."

아예 다른 인격을 보여줄 정도로 포커페이스를 연습했고, 취업을 위해서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최대한 아끼고 그 돈으로 자격증시험대비를 위해 투자했다.

"그러고보면 이런 생활이 더 좋을 수도 있네요."

면접에 더 신경을 쓰기 위해 운동을 더 자주하고 돈을 아끼게 되자, 여윳돈이 생겨난 것은 물론, 건강상태도 상당히 좋아졌다는 결과를 받았다.
힘들게 공부해서 자격증을 얻었을때 느끼는 그 짜릿함이 한 잔의 술보다 더욱 시원했다.

'아, 오늘은 모임 약속이 있었죠.'

무심코 눈에 들어온 달력에, 오늘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었다.

'원래같으면 오늘도 힘들게 들어와서 침대에 바로 누워버릴 것만 같지만..오늘 하루쯤은 내게 허락한 휴일이니까.'

잠깐, 그것보다 이전에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데...

"에이, 그때 가보면 알겠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가서 몸을 씻는다.
냉수가 몸에 닿자 정신이 천천히 다시 맑아지기 시작했다.

분명 다들,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 와 있을테니까.


"안전장비는 필수로 갖추고 실험에 응해라."

"네에. 알겠습니다. 꼬마조교아악?!"

"나는 꼬마가 아니다. 괜히 매를 버는 소리는 하지 마라."

"네 꼬마조교캬악!"

어이쿠. 또 실수로 부채로 학생 머리를 쳐버렸네.
진짜 이 손버릇은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나-티나는 공과대학교의 실험 조교를 맡고 있다. 이슬비가 있는 수업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수업에서 이런 불상사가 몇 차례나 발생한다.

내가 꼬마조교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이에 비해서 지나치게 어려보이는 모습 때문이다. 덕분에 말투도 웅변교육을 통해 몇번이나 교정을 했고, 호신술도 익혀서 상당히 딱딱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 동안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다보니 꼬마조교라고 불리는 것에 민감해지게 되었고, 결국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게 되었다. 본능이 되어버린 것이지.

"요번 실험은 상당히 어려운 실험이었는데 결과가 잘 나와서 만족한다. 다음 강의일 이전까지 리포트 제출하도록. 이상."

서류를 챙기고 실험기구를 정리한다. 책상위에 소독제를 뿌려서 닦은 다음, 실험에 사용한 약품을 꼼꼼히 정리하고 나오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있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군..'

저녁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일찍 나오도록 며칠간 스케쥴을 꽉 잡았기에 안심하고 갈 수 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뒤에서 날 꽈악 껴안고 들어올리는 일이 발생했다.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화끈거린다.

"죄송해요죄송해요! 이거 벌칙이에요!"

하지만 순간적으로,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뭐, 뭐야 이거.'

"한번만 봐주세요! 그럼 이만~!!"

"야? 야! 거기 안 서?!"

평소에 냉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쓰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원래 말투가 나와버리면서, 주변의 학생들에게는 충격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방금...꼬마조교님..말투가?"

"와...꼴린다. 그치?"

주위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오늘 다 끝내버린다!!"


"회장님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

오늘도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 인원이 많아 종합강의동에서도 큰 교실을 빌려서 하는 발표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오늘도 훌륭하게 해냈다.

"아가씨. 차 준비했습니다. 다음 발표까지 정확히 25분 38초 남았습니다."

"초단위까지 세는 건가요? 훌륭하군요."

"완벽한 아가씨 곁에 있는 집사는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완벽해야합니다."

"후훗. 그럼 이동하도록 하죠. 하이드."

고급차가 그대로 도로를 미끄러져서 다음 강의동으로 향한다.
강의동에 도착하자마자 하이드가 리포트로 가득한 서류가방을 들고 옆을 따라온다.

"하이드. 발표 이후에 일행들을 초대한 레스토랑은 준비되었죠?"

"준비됬습니다. 아가씨. 식대비는 전부 지불해두었고, 지금 세팅에 들어갔답니다."

"완벽하군요. 그 이외에는?"

"최대한 그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습니다. 아가씨도 분명 기뻐하실겁니다."

"훌륭해요. 하이드. 수업 들어갈테니 계속 부탁할게요."

"분부대로."

하이드가 사라지자, 나는 강의실로 들어와서 두툼한 유인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내 분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배..아니, 회장님. 내일 총학생회 회의가..."

"그렇네. 회의자료는 이따가 보낼게."

자, 이제 슬슬 수업 시작이다. 잘 하고 가야 오늘 모임이 기분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8시.

"건배~!"

째앵-!

"다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기쁘다!"

고등학교에서 각자 돈을 모아서 갔을때는 탄산음료로 했지만, 이젠 어엿한 성인이다. 술도 합법적으로 주문해서 즐길 수 있다고!

"이런 좋은 곳에 초대해도 되는거야, 바이올렛?"

"상관없어요. 저희 쪽에서 모든 금액을 지불했으니 사양말고 드셔도 됩니다."

상파뉴가 든 잔을 한 손에 들고 연미복을 곱게 입은 바이올렛(본명이 따로 있지만, 우리는 이런 별명이 더 입에 붙어서 그리 부른다)이 말했다.

나-이세하 역시 답답하지만 새로 맞춘 정장 차림으로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었다.

"동생. 오랜만에 보는데 말이 너무 없는 거 아냐?"

람부탄과 망고스틴 등 열대과일과 카프레제(토마토를 썰어서 그 위에 모짜렐라 치즈와 바질을 올리고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를 접시에 담은 제이 씨가 어느 새 옆에 있었다.

"아, 아니, 그. 그게."

"뭐냐. 동생. 설마 슬비의 드레스에 홀랑 넘어간거냐?"

"아저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네.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결국 지나치게 강한 부정을 해버린 탓에 결국 속내를 털었고, 이슬비는 내 앞에서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세, 세하야. 그렇게 좋..은거야? 따로 준비하지 못해서 티나 조교님과 오늘 막 맞춘건데..."

"으, 응. 어울리고 말고."

"....."

슬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슬비는 아름다웠다. 순백에 금자수가 들어간 연미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어때. 나타. 오늘 모습은 어때?"

"쳇. 꼴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네."

"에이. 말은 거칠게 해도 사실은 좋은거지? 눈이 흔들리고 있다고~?"

"개, 개소리 하지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리고 나타라고 부르지마! 나한텐 최지훈이라는 이름이 있어! 그렇게 부르라고!"

"하지만 모습이 이름과는 영 매치가..."

"에, 에이잇! 시끄러! 됐어!"

나타, 아니 최지훈은 서유리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접시에 코를 박듯이 들이대고 가져온 음식을 비우는데나 집중했다.

"켁..!"

저런. 사래들렸네. 천천히 먹지.

"거봐. 솔직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된다니깐."

등을 차분히 두드려주는 유리다. 둘이 어떻게 보면 어울린다니까.

"미스틸. 돌아가고 싶으면 말하렴. 우리는 꽤 늦게 돌아갈 거 같으니까 돌아가고 싶을 때 말해. 내일 학교 가야하는 거 안 잊었지?"

"누나..내일은 개교기념일이라서 학교 안 가요.."

"어라라? 어머. 진짜네. 내 정신 봐..."

지금은 유정이 누나 집에서 묵고 있는 미스틸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모습이 거의 없다. 달라진 거라면 모습 뿐일까. 길렀던 머리도 조금 짧게 잘랐던 것이 제일 크지만.

"레비아는 오늘 못 온대요?"

"아이돌 연습생이 어디 쉽나요. 이따가 영상통화로 올테니까 괜찮을거에요."

하피 씨도 따로 주문한 양갈비 스테이크를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슬슬 전화가 올 것이다. 영상전달기기는 여기있다."

티나 씨가 올려둔 기기에서 잠시 뒤 전화가 왔고 레비아가 영상에 나왔다.

-와아..다들 좋은데서 만나고 있네요. 저도 거기 있는 거 같아요.

잦은 연습 때문일까, 레비아 옆에는 목캔디와 가글, 파스가 가득 있었다.

"레비아. 연습은 잘 되고 있어?"

-네. 오늘은 잘 됬어요. 오늘 가지 못해서 죄송해요.

레비아의 손은 상처와 붕대로 가득했다. 정말 혹독하게 연습하나보네.

"연습도 좋지만 네 몸 관리도 잘하라고. 몸 상하면 네 모든 게 꽝이니까 말야."

-제이 씨. 걱정마세요. 저도 자주 관리 받는걸요.

레비아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연습의 결과로 발성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게 한번에 보일 정도이다.

"연습생 되고 아무것도 못 먹고 사람도 제대로 못 만나지?"

-주의가 필요해서요. 전 괜찮아요.

"다음에 나오면 상금 털어서 밥 좀 제대로 먹여줄게. 아쉬워하지마."

"그거 지금 말할 때야?"

유리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빵 터졌다. 그도 그럴게, 이 성대한 연회급 식당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거의 조롱이나 다를게 없으니까. 하지만 레비아는 개의치 않았다.

"이슬비. 오늘 즐길 때 즐기더라도 과제는 잊지 마라."

"걱정마세요. 조교님. 과제는 안 까먹었다구요."

다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네. 나는 누구랑 대화를 할까.

"야, 이세하. 또 말하게 하지마. 혼자서 이렇게 조용히 있기야?"

"우왓. 깜짝야. 이야기하는게 좀 서툴 뿐이라고."

이슬비는 아무나 잡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저씨도 유정이 누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고, 테인이는 지훈이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고 하피 씨는 바이올렛과 떠들고 있다.
나는...이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도 식사도 어쩡쩡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유럽 독일 지부에서도 추가로 원하는 장비가 있다고 합니다. 그쪽에 관해서는 저도 몇가지 거들 게 있거든요. 하피 씨는 나중에 이런 쪽을 노려서 공부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독일 측에서 뭘 요구할 지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지요. 독일 측에선...어머, 잠시만요."

하피 씨가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휴대폰을 꽉 잡고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면서 들어왔다.

"여, 여러분..."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여, 여기..."

그녀가 자기의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축하의 소리가 식당 전체를 울렸다.
그녀가 그렇게 염원하던 기업에 합격한 것이다.

"축하해요. 하피 씨. 여기 축배주입니다."

째앵-

"하하..하..정말로, 눈물이 나오네요."

사실 하피 씨가 지원했던 기업은 평범한 중소기업이 아니라 벌처스가 자주 하청을 맡기는 업체 측이었는데, 상당히 최측근에 드는 기업이라 중소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업이 쉽지 않았던 곳이라고 한다.

"정말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그렇게 또 다시, 우리는 축배주를 들었다.


"딸꾹..좀 많이 마셨나."

"유정 씨. 그러니까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유정이 누나가 과음을 한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하이드. 오늘 초청한 손님들과 친구들을 모두 가까운 호텔로 옮겨주세요."

그래서 지금은 호텔에 다들 와 있다. 몇몇은 벌써 과음을 했는지 씻고 자리에 누운 모양이고, 몇몇은 여전히 호텔 상층에 있는 바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나는...

"후아아.."

2인실에서 욕조에 입욕제를 풀고 목욕을 즐기고 있다. 입욕제도 상당히 좋은 것이라, 엄청나게 좋은 기분을 주고 있었다.

"이세하. 들어가도 되지?"

밖에서 슬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응. 들어와."

딸깍.

목욕 가운을 걸친 이슬비가 들어왔다.

"...."

좀 어색한 공기가 돌았다.

"자, 잠시 눈감고 있어..."

"응..."

눈을 감았다. 그리고 뭔가가 풀리고 물소리가 살짝 나더니,

"이제 떠도 괜찮아."

아아, 다행히 평범한 수영복을 걸치고 들어왔구나. 그럼 그렇지. 다행이야.

"뭘 기대하고 있었어..? 바보..!"

"아, 아무 생각도 안 했다니까?!"

물소리가 욕실 문 밖으로 들려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또 지나서,

"세하야..."

"응?"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어?"

"응. 전화번호도 있었는데 왜 전화를 제대로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연락하면 거절하고."

"사실...그게."

슬비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전화를 받거나 걸려고 할때마다, 손이 떨려서,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서,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했어."

"...그, 래?"

갑자기 슬비가 날 꽉 안았다.

"저, 저기 슬비야..?"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이세하..?"

슬비는 살짝 젖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좋아했어. 널. 정말로. 지금도 널 사랑해. 이세하."

"슬, 슬비야..?"

"좋아했다고. 이 바보야..! 부끄럽게 두번이나 말하게 만들지 마아..!"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그대로 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란스럽기도 했고, 지금 뭣보다 나도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슬비를 꼬옥 안아주었다.

"우읏...?"

이제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팔로 꼭 안아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옅은 분홍색의 머리에서 살짝 나오는 달콤한 샴푸 냄새가 정신을 약간 몽롱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도."

"뭐?"

"나도, 널...사랑해. 슬비야."

가슴팍이 뜨거워졌다.
이내 고개를 들어올린 슬비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응...고마워...세하야.."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한다...이내, 첫 눈이 길을 덮듯이, 입술이 서로 닿았다.
시간이, 일시적으로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하야."

침대가 두개였지만, 침대가 상당히 컸기에 두명이 누울 정도는 충분했다.

"으응.."

지금 우리 둘다 가운 안에 아무것도 안 걸친 상태다.
평소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텐데, 지금 기분은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다.

"...괜찮겠어?"

"괜찮..을거야. 아마."

"아마는 뭐야. 바보."

딱콩.

"아파!"

"푸흣..."

천천히 침대 위에서, 꼬옥 껴안고 다시 입을 맞춘다.
살짝 들려오는 야릇한 소리 때문에 이성을 유지하기 조금 힘들어졌다.
꼭 안은 팔에 힘을 주고 가운의 끈을 풀려는 순간-

"동생, 아까 말하려다가 만 거 이제 생각이 났는ㄷ-"

아뿔사. 잠시 키카드를 빌려준 것을 잊었다.

"흠흠...동생. 뜨거운 밤을 보내려다가 깬 건 미안해. 이따가 이야기하도록 하자고. 그리고..."

아저씨는 망설이다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작은 종이상자를 던져주었다.

"도움이 되길 바란다. 동생."

아저씨?!!! 이거 편의점에서 파는 그거잖아요?!

"흐아아아악!!"

결국 이슬비도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궈버렸다.

"아저씨!!"

"좋은 밤 보내라. 이따 보자. 일 끝나면 나와라."

덜컥.

키카드를 돌려주고 아저씨가 나갔을 때, 슬비는 반쯤 울먹이는 소리로 문을 열고 고개만 삐죽 내민채로..

"나 이제 시집 어떻게 가..."

킁...

결국 이 분위기가 깨져버린 덕에, 쓴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몇몇을 떠나보내고, 캠퍼스로 향하는 차량에 몸을 맡겼다.

"30분 거리면 충분할 겁니다. 세하 군."

비서 하이드 씨가 운전으로 직접 캠퍼스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량에서, 슬비는 평범한 옷을 입고 내 어깨에 기대 졸고 있었다.

"...."

어느 새 거리의 단풍나무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서 하나 둘 씩 잎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성공해서, 꿈을 이루고 있을까.

절대로 실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친구 이상의 우정을 나누고 있으니까.

"하아..."

조금 쌀쌀해진 날씨였지만, 나는 전혀 춥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 옆에 있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언제나 옆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가을이 되어서,

하늘도 새 종이처럼 맑고 깨끗한 날.

우릴 싣고 가는 차 위에는,


양모양의 하얀 구름이 검은 구름과 하나로 달라붙고 있었다.



-Fin.








조금 길지만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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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23:17:2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