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리볼프]죽은 자는 말이 없다

루페르쿠스 2017-09-13 0

역겨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재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벌떡 일으킨 상체를 지탱하기 위해 매트리스를 짚은 두 팔은 아직도 작게 떨리고 있었다.

잊어버릴 만큼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런 불쾌한 꿈을 꾼 것은.


처음의 그 기억은 순간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와의 만남도, 벌써 기억이 흐릿해질 만큼의 과거의 일이 된 것일까.

수면을 취하는 볼프의 방에, 오퍼레이터가 하달한 임무를 대신 전하기 위해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등을 내민 순간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널 죽여주겠어. 죽여버릴 거라고!


옥조인 목에서 갈래갈래 찢어지면서도 터져 나온 그 저주의 단어들은, 말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사지를 찢어발길 수 있었을 끔찍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는 그것조차 삼켜버릴 수 있는 심연처럼 깊고, 공허했다.


다음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했던 그 기억은 갑자기 전환되어, 주변은 어느샌가 뉴욕의 폐허로 바뀌어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볼프의 뒷모습과, 그를 정면에서 마주보는 자신이 있었다.


화를 내는 게 아니에요. 왜 진작 알려주지 않은 거죠?


무덤덤한 목소리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날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2차 승급 심사의 공문이 내려온 날의 기억이었다.


슈브가 진심으로 투항해 온 것이 확실해진 이후, 임시 본부에서 면담을 위해 불려간 그녀를 기다리며 남겨진 그들에게 뜻밖의 승급 심사가 내려왔다. 공문에 따라 재리는 볼프를 큐브로 안내했고, 결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는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은 누구의 소망이었을까. 큐브에 현신한 책의 사념은 그가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한 몇 번이고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잔인하고 또한 지극히 차원종다웠다.


과거에 사고로 선배 클로저를 잃었다는 얘기는 볼프에게서 직접 들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모호하게 얼버무렸던 사건의 전모를, 큐브 속의 차원종은 그의 마음을 찢어 가르고서 적나라하게 끄집어냈다. 언젠가 준비가 되면 그가 스스로 말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그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그 때는 생각도 못했다.


큐브의 폭주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볼프의 등을 바라보는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재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이 그때는 없었던 것임을 묘하게 자각했다.

그런가.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허나 꿈에서까지 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기억들이다. 꿈을 꾸는 것으로,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이 있다는 것은, 이 꿈을 통해 불안을 떨치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의 관리요원이 된 뒤로, 예전의 자신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생각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최우선은 볼프의 의사, 볼프의 안전, 볼프의 목숨, 볼프강 슈나이더 그 자체가 되었다. 한 때는 삶의 이유이자 목표였던 연구도, 지금은 그를 조금이라도 더 안락하게 해 주기 위해 택해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가 자신의 생각을 지배해 갈수록, 전에 없던 막연한 불안이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볼프의 존재는 재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지만, 그의 삶을 바꾸는 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는 그가 잃은 소중한 이들의 몫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볼프의 과거는 그곳에 얽매여 있을 것이다. 재리의 자리는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그의 미래는 복수의 여신에게 바쳐졌다. 과거와 미래가 자아낸 실타래 속에서, 재리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볼프의 현재에 잠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존재들이 지금의 볼프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는 한, 볼프를 변하게 하는 일은 영원히 없겠지.

하지만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재리가 살아 있는 한, 그의 관리요원으로 있는 한 볼프는 반드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죽는 날이 오면, 그때는 그의 과거에 머무를 수 있게 되겠지.


만약 볼프가 먼저 죽는다면, 이라는 가정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마음이 일지 않는다. 왜?


킥킥킥……


등골을 타고 한기가 쫘악, 오른다. 들려온 웃음소리는 기억에 남아 있으면서도 분명 그날의 것과는 달랐다. 어쩐지 즐거워 보였던 그날의 웃음보다 어둡고, 피보다 질척하게 그것은 귓가에 울렸다.


벌써, 잊어버렸나?

그는,

우리의

것이다.


어디선가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것을 끝으로, 재리는 눈을 떴다.


더러운 꿈을 꿨다는 생각에 불쾌감이 솟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의 꿈인데도 마치 그 주도권을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분노가 치밀었다. 마음이 약해지면 얼마든지 그 빈틈에 파고들 수 있다고 경고를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슈브를 처단한 제물의 밤을 지새우고, 겨우 쪽잠을 청했을 뿐이다. 죽음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까지도 소중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널브러진 채다. 새로운 추억과 물건이 그 상처를 덮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납장 위의 안경을 찡그린 눈으로 어렵사리 집어 걸쳐 쓰고, 재리는 끄응, 하는 작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휠 오브 포츈은 다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의 수용소에서 독일로 돌아와 현재 점검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볼프와 재리 역시 오랜만에 본부의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다. 짧은 휴식이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 쭉 머무르며 다음 임무의 하달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백배는 더 나았다.


정식적으로 대기 명령을 전달받은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는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겠지.

그러나 언제 임무가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본부에서 멀어지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재리와 볼프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근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커피잔을 기울인다는 어색한 광경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한낮의 공원에서 웬 사내 둘이 같은 벤치를 공유하고 있는 그 모습은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양적인 외모에 바른 자세로 앉아 두 손으로 컵을 쥔 짙은 다크서클의 남자와, 의자에 컵을 내려놓은 채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벤치에 축 늘어진, 빛을 받아 은처럼 반짝이는 백금발을 길게 내린 서양적인 남자의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크게 대조를 이루어 괜히 눈에 더 띄고 있었다.


“어색하네요, 이런 건.”


“뭐가? 아. 매캐한 탄내 하나 안 나는 이 공기! 확실히 오랜만이라서 어색하긴 하네.”


벤치 등받이 뒤로 고개를 크게 젖힌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볼프가 작은 탄성과 함께 내뱉은 말에, 재리가 미묘하게 그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폐허의 냄새가 나지 않기는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맑은 공기도 어쩐지 새삼 어색해졌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실은 작전 중에 이토록 한가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게 어색하다고 말하려 한 거지만요.”


볼프는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은 침묵 이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쪽 입꼬리만을 올려 웃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휴가를 보내주면 차라리 나을 텐데 말이지. 뭐가 아쉽다고 이렇게 좋은 날에 남정네 둘이 백수 꼴로 같이 다니는 건지 원.”


“백수라뇨…. 전 제대로 정장도 차려 입었다고요. 휴가는… 조금 아쉽긴 하네요.”


축 늘어져 일어날 생각도 않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재리의 눈이 조금은 크게 뜨였다. 안경알 너머로 비치는 그 작은 눈이 커져 봐야 얼마나 커지겠어, 싶은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네요. 당신의 사복 모습을 보는 건.”


“아무리 유니온 소유라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요원복 차림으로 나돌아 다니는 건 좀 싫은데.”


“이쪽이 훨씬 더 눈에 띄지만요. 혹시 눈에 띄는 게 취향이시라면, 참고하도록 할게요.”


멋대로 떠들라는 볼프의 핀잔에 웃음이 나왔다. 시시한 수다였지만 지금의 그들에겐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이후로는 긴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재리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볼프. 실례인 걸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대답할 의무가 있을까? 게다가 실례라니, 그냥 안 들으면 안 될까?”


“…작전 중에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관찰되고 기록돼요. 하지만 지금은 작전 대기 중이고, 감시의 눈은 없어요. 여기서의 대화는 오직 저만 아는 일이 될 거예요.”


볼프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재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불신이 담겨 있는 냉소였다.


“제아무리 공공장소라지만 결국은 유니온 땅이라고? 어쩌면 지금도 감시당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유니온이 범국가적 조직이긴 해도, 법 위에 설 수는 없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볼프의 말대로 아무도 모르게 감시당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요. 지금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가 없네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선을 과연 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세를 고쳐 바로 앉는 볼프의 모습을 확인하고, 재리는 그가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미 묻기로 결심한 일이다. 이 이상 미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후회하나요?”


“…….”


“당신이 검은 책을 펼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볼프가 한쪽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각오한 반응이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묻지? 의도가 뭐야?”


“당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볼프.”


낮은 비웃음이 들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 볼프가 있고, 볼프에겐 책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만약 책이 당신을 원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책을 펼치는 일은 없었겠죠. 당신은 평범한 클로저로서 살아갔을 거고, 그랬다면 분명 당신의 손으로 선배 클로저를, 그리고 슈브를 죽이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아니. 그럴 일은 절대 없다. 검은 책의 하수인들은 그 날 그의 선배가 아닌 볼프를 택했다. 그들의 의지가, 볼프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볼프 한 사람의 의지로는 거스를 수 없는, 강대한 흐름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아, 자신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다.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상처를 들쑤시고 그 속을 눈앞에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욕망에서 끔찍한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지독하게 감미롭고 추악한 향기가. 그를 몰아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으면서. 상냥한 그가, 끝내는 대답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재리. 만약이란 건 없어. 내게는 아직도 책이 있고, 선배는, 슈브는… 이제 없지. 단지 그뿐이라고.”


“…그게 당신의 대답인 거군요.”


돌이킬 수 없는 걸 후회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지. 내가 살아있는 한, 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할 거야.”

 

그 의무를 다하고 나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가요?”

 

볼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구태여 볼프가 있는 쪽을 바라보려 하지는 않았다. 결코 같은 곳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몇 점 흘러가고 있었다. 맑은 하늘이 낯설지 않게 된 건 분명 그의 관리요원이 된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알려줄래요?”


“…….”


“볼프. 당신보다 제가 먼저 죽으면, 그땐 절 잊어줄 수 있나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무책임한 소리는 하지도 마.”


고개를 돌려 마주한 눈빛이 따가웠다. 역시 화를 내고 있었다.


“볼프… 행복해지고 싶나요?”


침묵이 길어졌다. 볼프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자조로 허무하게 뒤틀린 웃음을, 볼프는 우는 듯한 눈으로 그리고 있었다. 하, 하는 기가 차는 웃음을 터뜨린 볼프가 대답했다.


“웃기는 질문이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만 있다면.”


재리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차분하게 눈꺼풀을 내리깐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두 개의 커피 잔은 이미 텅 빈 지 오래였다. 직접 내리지 않은 커피를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재리는 망설임이 묻어나는 눈을 하고,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다면 제 방으로 오지 않으실래요? 방금 전의 무례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저녁이라도 대접할게요.”


경직된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 금세 볼프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재리, 요리 잘 해?”


“독일에는 혼자 왔으니까요. 게다가, 연구원 시절엔 주변 사람들 중에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건 인간이 먹을 게 못 돼요, 라며 뭔가를 떠올린 듯 침울해하는 재리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볼프가 유쾌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어느 정도인지 내가 직접 평가해 주지! 가자고!”


빨리 안내하라고 재촉하는 그를 향해, 재리가 곤란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걸어간다. 살면서 이 정도의 만족감으로 가슴이 가득 찼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아침의 우울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얻어낸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절대 너희의 것이 되지 않아.





-사냥터지기 시즌1 종막, 애쉬와 더스트 처치 작전이 궤도에 오르기 전 막간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마 연구, 관리직 계열 요원들은 전용 기숙사가 있지 않을까요? 아마 이 이후 두 사람은 식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쇼핑에 나섰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작전을 수행하느라 냉장고에 사 뒀던 것들은 다 못 쓰게 되지 않았을까요?

별로 기대 안했는데 재리의 한정식 백반 상차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볼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속의 재리는 위험한 남자입니다. 볼프는 위태로운 남자이지요. 엘리고스의 집착이 무섭습니다.


이 글의 느낌이 휘성의 '놈들이 온다'와 은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들었는데 그럴싸한 느낌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10-24 23:17:1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