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no 00. prologue
루이벨라 2017-07-24 2
※ 배경은 중세 ~ 근대유럽 모티브로 한 페럴레 공간입니다.(유녀전기 배경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 볼프강 로열로즈 C타입 일러보다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뱀파이어물 연성
※ 장편은 무리고 중편 정도로 마무리할 예정
"...이곳은 변한 게 없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다짐까지 했는데 말이야. 뭐, 어쩌겠어. 내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줄 아나.
...빌어먹을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온 거지.
"이봐, 벨."
-...
...정말 더럽게 일 안하는 주인님이시군. 가성비가 최악이야, 아주 그냥...
나는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검은색의 표지인 책을 펼쳤다. 그냥 아무 페이지를 펼쳐가지고 그 위로 손가락을 깨물어 내 피를 떨어뜨렸다. 피가 한방울씩 책 위로 떨어졌다. 보통 책이라면 핏자국이 남을 법도 한데 이 책에는 그런 자국이 남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먹이로 삼는 듯이 흡수를 하고 있었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책에서 멋대로 글자가 써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정성들여쓴 이 고급스럽게 보이는 필체를 보면 사람들은 너무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내뱉겠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운 것도 너무 자주 보면 무덤덤해지기 나름이다.
-...흐음...
"이제 일어나셨군?"
-...볼프군.
"당연히 나지. 널 부를 사람이 나말고 또 누가 있겠냐?!"
누가 보면 책이랑 대화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할 수 있겠지만, 난 책이랑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책에 담겨진 어떤 '사념' 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그거나 그거나인가?
-드디어 도착한건가.
"그래, 도착했다. 넌 아주 편~히 내 가방 안에 있으면서 왔겠지만, 난 정말 힘들었다?"
-어차피 별로 힘들어하지도 않았으면서.
명백한 놀림조. 확 그냥 이 책을 저기 보이는 강 위로 던져버릴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런 일 한 두번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도 다 이 벨 녀석 덕분이었다.
아, 참고로 '벨' 은 내가 너무 길어서 줄여부르는 이름이다. 본명은 '벨리알(Belial)' 이라고 했던가? 사실 그 뒤에 뭐 엄~청 긴 미들네임이며 발음하기도 어려운 성(姓)도 있었지만 그건 이제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다. 녀석도 이제는 그게 익숙해졌는지 초반에 말하던 '벨리알 님' 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걸 그만둔지 오래였다. 참고로 이 녀석은 날 '볼프' 라고 부른다.
볼프강 슈나이더(Wolfgang Schneider). 그게 내 이름이다. 원래는 미들네임도 있는 '나.름' 고귀한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미들네임은 필요없는거나 마찬가지니 그냥 볼프강 슈나이더만 알면 된다.
-이 나라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볼프.
"그래, 오랜만이지만...빌어먹게도 향수 따위는 안 느껴지는군."
애초에 내가 이렇게 된 원흉 중 하나가 내 고향 나라였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이 삶, 끝난다고는 해도 다른 나라에서 죽자고 다짐했던 나이기에 다시 이 나라로 온 건...
...매우 끔찍했다. 아무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끔찍했다.
-네가 이 나라를 끔찍하게 여긴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
-하지만 우리는 프로이지 않은가. 공은 공, 사는...
"사지...그래, 그렇다고..."
벨이 봉인을 당한 곳도 이 나라라고 했다. 벨도 나만큼이나 이 나라에 대해 아주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프로였다. 공은 공, 사는 사. 일에 집중하는 프로.
"...그나저나 여기는 아주 오랜만에 오기는 했지만..."
-...
"...검은 머리가 희귀한 건 여전하군."
기껏 오랜만에 온 고향에 대한 내 감상은 이게 끝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는데도 왜 이 나라는 아직도 흑발 자체가 귀한 건지 모르겠다.
* * *
"...이 나라는 아직도 황제가 다스리는가 보구나."
구시대적인 마인드 참 보기 좋다. 이 작은 대륙에는 어찌나 많은 나라가 있는지 이곳저곳을 다 돌아보는데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덕에 별로 외롭지는 않았다. 나라마다 저마다 다른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묻어가는 것이 나름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난 시간이 넘쳐흐르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느긋한 여행 정도는...별 해가 없었다.
그 많은 나라의 약 절반을 여행했을 무렵, 일거리가 들어왔다. 의뢰 장소는 무려 내가 이 여행을 처음으로 떠난 출발지인 G의 나라였다. G라는 첫글자를 듣자마자 난 이 일은 못하겠다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하지만 재리는 그런 날 설득했다.
-볼프, 이건 당신이 안하고 싶어서 안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아주 심각하다고요.
-...
시대가 바뀌었다. 신을 섬기던 인간들은 이제는 석탄으로 움직이는 차가운 기계를 숭배하게 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과학이 발전하고, 사람들은 뜬 소문이라는 이야기에 이제는 전설뿐일거라고 여기리라 생각했는데 그 속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구시대적 마인드가 또 있었다.
-...흡혈귀 사냥꾼?
-네. 요 근래 들어 G의 나라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G의 나라 중심으로 대량의 학살사건이 일어났고, 그게...
-...그걸 흡혈귀의 소행이라고 몬다고?
어이가 없다. 아니, 조용하게 사는 것도 모자란 흡혈귀들이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한다고?! 내가 만나본 대다수의 흡혈귀들은 의외로 심신이 매우 연약한 종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혈 흡혈귀는 매우 희귀하다.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던가, 나와 같이 계약으로 후천적으로 흡혈귀가 된 케이스가 대다수였다. 그들은 한때는 '인간' 이었고, 인간들 속에서 묻어가는 일족이었다.
재리도 그런 케이스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흡혈귀인 아버지와 인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또 다른 흡혈귀와 계약을 한 복잡한 케이스지만.
-그러니 볼프 당신이 가주세요. 가서 이게 정말 흡혈귀의 소행인지 아니면...
죄없는 흡혈귀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인간들의 소행인지...
재리의 부탁이었다. 그한테는 이것저것 신세를 진 게 많기도 했고, 뭐 난 여행 경비 벌으러 가는 거니까.
탁자를 내려다보니 내가 방금 전에 시킨 맥주가 나와 있었다. 이걸 가져다준 이 집 주인이란 사람...아마도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의 몇대손이겠지? 얼굴 속에 닮은 구석이 몇 군데 보였다.
"...이 집 맥주 맛은 변함이 없네."
새삼 이렇게 싫어하던 나라에도 추억에 잠길만한 요소 하나가 있다는 게 우습다. 본격적인 임무 수행은 내일부터니 오늘은 이렇게 느긋하게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한숨 돌릴 틈은 주고 일은 시작하게 해야지...나 원 참...여행에 대한 여독을 풀게 만드는 예의 따위는 없는거야?!
맥주 값을 치루고 짙은 혈흔 냄새를 따라갔다. 벨 녀석도 강하게 느껴졌는지 직접적으로 피를 준 것도 아닌데도 책이 세게 공명했다.
"...야, 벨...이거 설마..."
-...틀림 없다.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사실 재리에게 의뢰를 받았을 때만 해도 난 후자 쪽, 즉 인간들이 무참히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아무 힘도 없고, 의견 내세울 수도 없는 우리에게 덮어씌우려는 거고. 하지만 그 생각은 이제 완전히 깨졌다. 이건 분명 흡혈귀의 소행이었다. 그것도 아주 예의 하나 없는, 본능에만 충실한 그런 자의 소행.
"...너."
깊숙해서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캄캄한 골목 안에는 흡혈귀로 추정되는 생물체 하나가 있었다. 지금으로 봐서는 저 녀석은 99.99%로 흡혈귀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흡혈귀들은 이러지 않았다. 그들은 생각보다 우아하고 그들만의 철칙을 충실히 지키면서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러니 가끔씩 인간과 흡혈귀의 혼혈도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너무도 심각하지 않은가. 짐승이 한 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 처참한 광경. 너무도 당연했던 사실과 정 반대인 케이스가 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정말...흡혈귀냐?"
[작가의 말]
http://cafe.naver.com/closersunion/240285
볼프강 로열로즈가 너무 뱀파이어 느낌이 물씬나서...저질러버렸습니다.
후편은 천천히 나올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