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길을 걷다가

거품구슬 2017-02-02 2

윤종신 - 오래전 그날을 들으시면서 보면 더 좋을것 같습니다.




문득 길을 걷다가 분홍색 머리를 하고 체육복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뛰고있는 여자를 봤다. 혹시나 너일까 싶어 고개를 돌려 쳐다봤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반대로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 아마도 너와의 설레였던 많은 추억들이 떠올라서가 아니였을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너를 좋아해서였을까.


이 두근거리는 느낌은 집에 와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언제 사다놓은지도 모르는 맥주 한캔을 꺼내 급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벌써 몇년전인지도 모르는 그 예전 일들. 바쁜 사회속에서 잊어버린줄 알았는데 고작 비슷한 여자 한명을 본것만으로도 그 추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너도 아직 나와 비슷한 남자를 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까? 그랬으면 좋겠어. 너는 그런 여자니까.


얼마나 맥주를 먹었을까. 더이상 냉장고속에 맥주가 없다는것을 깨닫고 허탈함을 느꼈다. 이렇게 먹을줄 알았으면 아까 나갔을때 사왔어야했는데. 다시 사가지고 올까 하는 맘도 들었지만 귀찮은 마음에 자리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러다 보이는 책상 위 앨범. 그래. 고등학교 앨범에는 아직도 너가 그시절 그때의 모습으로 남아있겠지.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가 가득 쌓인 고등학교 앨범을 꺼내들었다.


앨범에 먼지를 후후 불어내보았지만 이미 눌러붙은 먼지들은 앨범속에서 떠날 기미를 안보였다. 결국 손으로 몇번 쳐내 먼지를 제거해 앨범을 들고 침대에 앉아서는 앨범을 펼쳐보았다. 신강고 3학년 B반을 펼쳐보자마자 바로 나오는 너의 얼굴. 그래, 넌 반장이였으니까. 빛바랜 너의 사진이지만, 오히려 그런 풋풋함이 너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그때는 뭐가 그렇게 좋았었는지. 우리 둘만 있어도 마냥 행복하고 투닥거리던 그 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사실 너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좋지 못했지. 우리 팀이 처음 만나던 날, 내 게임기를 염동력으로 들어서는 만렙 찍고오지 그랬냐고 핀잔을 준 너가 귀찮고 짜증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지. 리더로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팀을 통솔하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보면서도 멋지고 존경스러웠어.


학교 수업때도 나는 종종 너를 바라보면서 한교시를 보내기도 했었다. 클로저 업무에 가끔 잠도 설치던 너였지만 공부시간에 항상 열중하며 수업을 듣는 너의 옆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덧 너와 나는 등하교길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었지. 같이 등하교를 할때마다 피곤에 찌든 나에게 어제도 게임해서 그렇냐고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챙겨주는 모습에 고맙고 감사했다.


하교를 하고나서 검은양팀 업무에 투입될때도 우리는 항상 같이 투입했었지. 너가 뒤에서 든든하게 서포트를 해주고있다는 느낌에 나는 자신있게 내 검을 휘둘렀다. 어느덧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공격할지 몸이 기억하고 있었고 주변에서는 우리를 칭찬하며 사귀는 사이냐고도 물어봤지. 너는 부끄러워하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고, 나도 따라서 손사래를 쳤지만. 


너는 기억이나 할까. 너와 내가 벚꽃길을 걷던 그날. 나는 그날 너를 지키겠다고 수줍게 이야기했지. 너는 단순히 차원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였다. 조금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내 여자로서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고백하려 했다. 하지만 고맙다면서 나를 바라보고 웃는 너의 얼굴을 본 나는 더이상 욕심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너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내가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문득 추억에 빠지다보니 나는 술이 어느정도 깨있었다. 바깥을 바라보니 이미 어두운 밤이 되있었고, 정신은 또렷해져 잠이 들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심심해서 다시 맥주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이맘때쯤이였을까. 붕어빵에 갑자기 맛을 들인 너가 붕어빵을 먹으러가자고 밤에 불렀었지. 나는 기쁜마음으로 뛰어나가선 너와 붕어빵을 사먹었다. 그래. 바로 이거리에서.


여전히 그자리에서 붕어빵을 팔고있는 그 포장마차. 나는 자연스럽게 그 포장마차에 다가가 붕어빵을 3개 시키고 천원짜리 하나를 내주었다. 당시 포장마차를 하던 그 누나는 지금 없고 다른 사람이 하고있지만, 여전히 따스한 이 온기만은 그때와 똑같았다. 그때 너는 세상을 다 가진것마냥 붕어빵을 먹었지. 그리고선 과거 아카데미에 있을때 몰래 시설에서 나와 오뎅을 사먹었던 얘기를 했을때는 너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가끔씩 일부로라도 너를 불러 이 포장마차에서 간식거리를 먹고는 했지.


붕어빵이 담긴 봉투를 품에 안고 한개를 꺼내 먹다보니 어느덧 편의점에 도착한 나는 자연스럽게 맥주 두캔을 집어들고선 계산대로 갔다. 그러고선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한 연인이 팔짱을 낀 채 알콩달콩 얼굴을 마주대며 이야기하면서 가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엽구나. 나는 너와 왜 저러지 못했을까. 그래, 사실 난 겁쟁이였을지도 모른다. 너와 멀어질까 두려워 고백하지 못했다. 그저 그 관계로 만족했다.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했다. 나는 거절당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관계에 만족했는지도 모른다. 친구 이상이지만 연인보다는 아래인 애매모호한 관계. 나는 그 관계로 상처받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너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겠지. 그 부끄럼 많았던 너는 내가 고백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나만 편했었던걸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후회해봐야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왔다. 따스했던 붕어빵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래. 너와의 마음은 아마 이 붕어빵이였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먹으면 따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갑게 식어 맛이 없게 변해버린다. 나는 너의 마음이 따스했을때 받아들였어야 했다. 내가 널 받아들이려 했을때 너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지. 그래.. 그랬었지.


나는 집에 와서 맥주캔을 따고나서 한모금 먹고나서 심심한 느낌에 구석에 박혀있던 먼지가 자욱한 상자를 열어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보니 이 게임기를 만지는것도 오랜만이구나. 너는 내가 게임하는걸 싫어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임무중 게임하는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천천히 게임을 줄여나갔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먼지쌓인 박스안에서 꺼내지 않을정도로 게임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빈 시간을 너와 보내려고 노력했다. 아무것도 없는 주말 너와 함께 맛있는것도 먹으러가곤 했었지. 둘이 가기보단 팀원들 전체가 먹는건 어떠냐고 해서 단둘이 만난적은 많이 없지만, 그래도 너를 볼 수 있어서 나는 마냥 좋았다. 이따위 게임을 하는것보다 훨씬.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일부였던 게임을 접었다. 오직 너를 보기 위해서.


그러던 도중 그 박스에서 하나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래. 그랬지. 나는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편지를 꺼내들었다. 그래. 몇달전 갑자기 찾아온 이 편지는 나에게 싱숭생숭한 기분을 주었었지. 이미 열려있는 편지지를 열어 안의 종이를 꺼냈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만나 진실과 이해로써 하나를 이루려 합니다.

이 두 사람을 지성으로 아끼고 돌봐주신 여러분을 모시고 서약을 맺고자 하오니 바쁘신 기운데 두 사람의 장래를 가까이에서 축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OO의 장남  신랑 O  O  O

故OO의 장녀  신부 이 슬 비


그래. 너의 결혼 청첩장. 나는 그 날 너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사실 너가 누군가와 사귄다는것은 유리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덤덤한척 했지만 빼앗겼다는 느낌에 분해서 술에 한동안 절어있었지.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아마 너는 나에게 섭섭하면서도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가 진심으로 믿어줬으면 하는게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빌었었다. 그 남자가 나보다 더 멋진 남자이기를. 나보다 너를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이기를. 나보다 너에게 더욱 자상하기를. 그래서 너가 누구보다도 행복하기를. 


추억에 젖다보니 나는 어느새 자리에 누워서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너도 잘 잤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추억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래. 너와의 처음 만남이 떠오르면 좋겠어.


" 아주 그냥, 만렙 찍고 내일 쯤 나오지 그랬어? "


2024-10-24 23:13:4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