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 내게 꿈을 꾸는 기능은 탑제되어 있지 않다.

황혼달빛 2016-08-01 2

선우란은 인원 수송 부대의 라이더로서 클로저 개개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주의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벌처스의 처리부대 소속의 티나라 불리는 소녀는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사람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쿨걸,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

 

선우란은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라 부를 만큼 너무나도 다른 어조였다. 정확히는 다른 느낌이라도 할까.

일단 티나가 괜찮다고 말한 이상 평소의 신조에 따라 참견은 여기에서 끝나야 했지만, 선배 클로저로서, 또한 같은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부정적으로 변해버린 소녀를 보고 한마디 더 할 수밖에 없었다.

 

“...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이제 결함이 없어졌을 뿐이다. 더 이상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티나의 말에 선우란은 결국 수긍하기로 했다. 솔직히 그녀 자신도 인간관계에 일가견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본인이 결함이 없어졌다는데 외부인으로서 왈가왈부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래, 그럼 이번에야말로 헥사부사의 혼을 제대로 느껴보라고!”

 

“안전모드 발동.”

 

평소와 같은 대화의 패턴이었지만 선우란은 축 처진 티나가 자신의 등 뒤에 매달린 순간 정말로 기계 덩어리가 얹힌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공포, 흥분, 분노, 즐거움 등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의 감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우란이 동승객의 영혼 없음에 전율하고 있을 때, 정작 티나 본인은 안전모드를 통한 감각 차단을 이용해 나온 리소스를 과거 회상에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신강고에서 있었던 차원종과의 전투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대처 패턴을 짜는 작업을 시작했다.

신강고에서 구로로, 구로에서 강남으로. 그녀의 기억은 계속 뒤로 넘어갔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꿈이라도 꾼 걸까?

왠지 모르게 불분명한 기억에 의문이 생겼지만, 고개를 흔들어 꺼림칙한 것들을 떨쳐냈다. 괜한 불안감이 만들어낸 착각일 것이다. 조금 전 경보가 해제되었으니 이제 곧 교관님이 오신다. 분명 위상 변동률은 일반적인 수준이었지만 혹시나 다치지 않았을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나 티나? 시간이 늦었는데 취침에 들어가지 그랬나.”

 

“아, 저기, 교관님이 걱정돼서....”

 

예상대로 교관님은 바로 숙소로 돌아가시지 않고 업무 지원실로 오셨다. 다행히 조금 지저분해지긴 해도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변명을 했다.

사실 야밤에 차원종이 쳐들어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처음 교관님이 출동하셨을 때는 나도 걱정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었고, 도착한 교관님도 늦은 시간에 대문 앞에서 울고 있었던 자기의 훈련병에 굉장히 당황했었다.

그렇지만 그가 강하다는 걸 안 지금도 나는 여전히 걱정되었고, 매번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일상이 된 지금에 와서는 나도 그도 익숙해져서 담담하게 넘기는 편이었다.

 

“늦은 시간에 나타나서 그렇지 적 자체는 별다를 것 없었다. 너도 위상 변동률을 봐서 알고 있을 텐데.”

 

“네....”

 

“이렇게 기다려 주는 것보다 빨리 취침에 들고 내일 훈련에 만전의 상태로 임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되지 않나? 아무튼, 빨리 자도록.”

 

“네, 알겠습니다. 교관님.”

 

처음의 당황 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상태에 비해서 걱정의 말이나 감사의 말 하나 없는 굉장히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가 목덜미를 긁는 것을 보고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런 버릇이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 말고도 울프팩 요원이라면 다 알고 있는 버릇이었다.

그렇게 그가 아닌 척하면서 기뻐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지금은 매번 그의 귀가를 기다리는 건 걱정이 반, 즐거움이 반이었다.

걱정이라는 핑계의 어리광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 그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니 그가, 그의 팀이 시민들의 웃음과 행복을 지켜주듯 나도 그의 웃음과 행복을 찾아주고 싶었다. 같은 클로저라면 좀 더 부담 없이 다른 클로저에게 웃음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을 칼같이 지키던 분이 갑자기 연락도 없이 훈련장에 늦게 오셨다. 혹시나 나쁜 일이 있던 걸까 걱정했던 내 예상은 반 정도 맞았었다.

 

“출동이요?”

 

“.....그래, 네게도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작전부터 너도 우리랑 동행하게 된다.”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하긴, 내가 들어도 당황스러운 말이었는데 교관님은 오죽했을까. 나는 이제야 막 훈련병에서 수습요원으로 넘어온 풋내기였고 전장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으니까.

 

“교관님...”

 

“.... 미안하게 됐다. 티나. 최소한 정식요원은 되고 나서 전장에 데려가려 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다. 다행히 너는 후방에서 화력 지원을 맡은 것이니 최전선보다는 안전...”

 

고개를 휘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걱정되긴 했지만, 그쪽이 주는 아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된 양 어둡고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 빨리 강해져서 모두를 돕고 싶었지만 당신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정도라면 조금 더 참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교관님. 이제, 저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니까요. 좋은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너도 그 녀석도 어째서 너희같이 어린아이들이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자책 섞인 혼잣말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내 의지인데 어째서 그가 이렇게도 힘들어하는 걸까?

그가 떠올리는 건 아마도 얼마 전에 보았던 백발 머리 소년인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인 그 소년은 울프팩의 주요 전력으로서 교관님과 알파 퀸과 함께 작전을 나서곤 한다고 들었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그 소년이 부러웠다.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만큼 나를 이끌어주는 교관님의 등 뒤도 지키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그에게는 나는 아직도 아이인 모양이다.

 

“그런 교관님도 성인이 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잖아요?”

 

약간의 반발심에 그리 말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의 참전이 굉장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나도 그가 출동할 때마다 데이터상으로는 절대로 다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걱정되니까. 혹시나 유탄이라도 맞는다면, 혹시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맞는다면, 혹시나 예상치 못한 대형급 차원종과 조우한다면, 혹시나 하는 이 가슴 졸임을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뿐이다.

사랑이라든가 그런 달콤한 감정은 아니었다. 여기는 전장이었고 우리는 병사니까. 그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건 맞지만, 아직 사랑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 본 얼굴을 내일도 볼 수 있기를, 오늘과 같은 날이 내일도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 이 이상 그에게 응석 부릴 수는 없었다. 내가 아니어도 언제나 바쁘고, 힘들고, 고민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책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가르친 저에요.”

 

그의 불안감도 나의 불안감도 모두 가실 수 있게 방긋 웃어주었다. 그래,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의 가르침을 전부 받은 나이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정말로 괜찮기를 정말로 간절하게 바랐다.

 

 

 

 

위상 능력자의 힘이 필요한 곳은 꼭 전장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계를 쓰기 어렵지만, 사람이 들기 힘든 무게의 돌이 지천으로 깔린 붕괴 현장 등이 클로저들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 언니!”

 

“네, 조심해서 가세요.”

 

조금 전 대규모 잔해에서 구출한 모녀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나자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는 지급품으로 받은 초코바를 내 손에 쥐여주고는 떠나갔다.

훈련병이긴 해도 클로저인만큼 먹을 것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두 사람은 끝끝내 내 손에 초코바를 쥐여줬었다.

“후후, 시민들에게 받은 첫 보수인가.”

 

사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걸 받았을 때는 굉장히 기분 좋았다. 사실 클로저의 힘은 일반인과 아득한 차이가 있는 터라 이제 막 훈련병 티를 벗은 나도 종종 공포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관님이나 다른 클로저 요원들, 울프팩 팀 사람들은 잘했다고 종종 칭찬을 해주기는 했지만 어쩐지 칭찬이 아니라 위로로 들렸기에 조금 불만족스러웠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마음의 응어리는 눈 녹듯 사라졌다.

응, 역시 유니온에 들어오길 잘했어. 앞으로 더 강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웃음을 지켜야지.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굉장히 불안했지만 그렇게 불안해했던 것을 비웃듯 굉장히 순조로운 일상이었다. 교관과 울프팩 팀들이 전방에 나가 있을 때 나는 주로 후방에서 구조 작업이나 잔당 처리 정도를 도맡았고, 조금 전처럼 감사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내가 클로저 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비록 교관의 등 뒤를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나대로 사람들의 행복과 웃음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교관님에게 보여주면 칭찬해 주실까?”

 

아마도 말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하시겠지만, 분명 언제나 그렇듯 목덜미를 긁고 계시겠지. 나의 클로저의 자세는 전부 그 사람에게 배운 거니까. 분명 내가 이렇게 기뻐하듯 그 사람도 기뻐하겠지. 너무 뻔히 그려지는 예상 도에 절로 웃음이 났다. 좋아, 이건 먹지 말고 보관해 두자. 건네받은 초코바를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음 작업 지역으로 이동했다.

 

 

 

 

“쿨럭.”

 

어...떻게 된 거지? 위상 변동률이 이상할 정도로 치솟고 차원종 반응이 나타나서 그래서, 그래서...

 

“어머, 아직 살아 있었네?”

 

그 목소리에 상처도 아픔도 전부 잊어버린 채 몸이 굳어버렸다. 척추를 얼음으로 채운 듯한 냉기에 절로 이빨이 덜덜 떨렸다. 안돼, 이건 안돼. 도망쳐야 해!

죽음의 예감이라는 미적지근한 것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과 공포가 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토할 것 같으면서도 내장이 얼어버린 듯하고 온몸이 잔 떨림으로 가눌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정작 미동조차 하고 있지 않았었다.

 

“다행이다. 전부 죽어버렸으면 정말 심심했을 거야. 네가 생각해도 정말 생각 없는 행동 아니니? 잠깐의 심심풀이로 전부 죽여 버리고 그 뒤를 심심하게 지내는 거? 이렇게 한 명 남겨놔야 오랫동안 즐겁게 놀 수 있지.”

 

“티.... 티.... 들리... 티나! 내 말... 리나!”

 

공포가 말을 걸었다. 절망의 목소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방탄조끼 안에 끼워놓았던 무전기에서 교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관님이 와도 어쩔 수 없는 괴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 아직 죽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는 또 자기 탓으로 돌려 버릴 테니까,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혀를 깨문다고 죽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으직

있는 힘껏 혀를 씹으니 굳었던 몸이 조금 풀렸다.

이걸로 최소한 도망은 칠 수 있게 되었다. 이 괴물에게서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교관이 올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어머, 너 조금 쌩쌩해졌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믿음직스럽니? 음... 하긴, 요즘 애들은 전부 포기해버려서 금방 재미없게 변해버렸지. 좋아, 지금 잠깐 봐줄 테니까 그 사람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해 봐. 혹시 알아? 정말로 그 사람이 도와줄 수도 있을지?”

 

괴물의 말에 반사적으로 웅크렸던 몸을 펴고 품 안의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도망을 위한 결의, 그의 승산, 혹은 그가 올 때까지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 그런 것들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오로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교, 교관, 교관님!”

 

“티나! 무사한가! 지금 그쪽으로 간부급 차원종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대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라!”

 

“교... 교관....”

 

그 괴물이 지금 내 뒤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차가운 손이 내 목을 잡았다.

 

“자아, 여기까지. 송신 버튼은 계속 이렇게 두고, 너는 예쁜 얼굴만큼 귀여운 목소리로 울어주겠지? 관객이 있으니까 더 신나네.”

 

“컥.....커억...”

 

꽉 졸린 목 틈사이로 비명이라 부를 수도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괴물은 내 얼굴 앞에 무전기를 가져다 대고 소리만 나오도록 조절하고 있었다.

시야가 새빨갛게 변했다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티나! 티나!”

 

“이제 예쁘게 울어주렴.”

 

괴물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왼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았다. 목이 졸려 멍한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되어 몸이 떨렸다. 제발, 제발....

 

콰직

 

“꺄아아아악!!!!!”

“역시 인간의 비명소리는 좋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아직 9개는 더 남은걸.”

 

“티나! 이런 **! 빌어먹을! 티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고통 중에서도 이곳으로 열심히 달려오는 교관님의 모습이 절로 떠오르는 듯했다. 화를 내면서도 그러면서도 이곳을 향해 최선을 다해 뛰어오고 있겠지. 그렇지만 미안해요, 교관님. 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콰직

 

“끄아아아아!!!!”

 

“이런, 고상한 비명소리가 아니잖아. 좀 더 힘내봐.”

 

 

 

..................

멍한 느낌으로 그저 누워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귓가에서 계속 속삭이던 괴물의 목소리는 이제 더는 들리지 않는다.

아, 그런가. 난 살아난 건가. 교관님이 오신 건가.

 

“교.... 교관님....”

 

“네, 찾으셨나요? 제가 당신의 교관이에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주 익숙하지만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어느새 흐릿했던 시야도, 괴물에게 고문당한 흔적도, 아픔도, 주머니 속 초코바도, 꽉 쥐고 있었던 온기도, 머리 위의 손길도 전부 없어져 있었다.

대신 생겨난 건 눈앞의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여성이었다.

 

“자, 티나. 나의 인형. 빨리 나의 명령을 따르세요.”

 

탕!

 

“트레이너 씨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요.”

 

탕!

 

“제가 당신의 ‘교관’ 이잖아요?”

 

탕!

 

손을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초연 향이 물씬 나는 저격총이 쥐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자 머리에 구멍이 뚫려 죽어있는 시체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머리, 가슴, 혹은 전신에 구멍이 뚫려 죽어있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손을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피가 샘솟듯 흐르고 있었다.

 

네가 한 일들이다.

 

마주친 시체의 눈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싫어어어어!!!!!!!!!!!!!!”

 

 

 

“아냐! 아냐!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야!!!”

울부짖으며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지만, 코끝에 감도는 피비린내와 눈앞의 시체는 없어지지 않았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렇지만 분노와 절망으로 목이 꽉 막혀 토악질은커녕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눈이라도 파버리고 싶은 자해충동과 숨조차 쉬고 싶지 않은 무기력증이 공존했다.

하하, 이게 뭘까? 내가 바라던 클로저는 이런 게 아니었어.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행복과 웃음을 주는 일이었단 말이야.

사람을 죽이고 명령에 따라서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히고, 약자를 괴롭히기 위한 힘이 아니었어. 나는, 악령이라 불리기 위해 노력해 왔던게 아니었단 말이야!

 

.............

이젠 전부 다 싫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검은 감정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쳐, 내 발목을 잡아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검은 늪, 한 번 빠지면 두 번 다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순순히 늪 속으로 빠져들 때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안에 있는 두뇌가 사람을 죽이기 싫어해서 일 거야.”

 

너는....

 

“나는... 네가 사람을 안 죽였으면 해.....”

너희는....

 

“너는 너의 답을 찾으면 된다.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지.”

 

왜....

 

“중요한 건 네 의지니까 말이지.”

 

이렇게까지 나를, 그녀를 생각해 주는 걸까.

 

사람을 죽였는데, 아직도 이 손에 피가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더 이상 클로저도, 인간도 아닌 악령일 뿐인데.

그리고 한 번 떠오른 기억의 잔향은 요 며칠을 넘어 그날을 이끌어 왔다. 그녀가 사람을 죽이지 않게 된 날. 내가 비명을 멈춘 날.

 

“이제부터 네 인식 명은 티나다. 너는, 악령이 아니다.”

 

그가 나를 제압하고 이름을 주었다. 오래전 내 이름이었던 그것을 그녀에게 다시 주었다.

그는, 아주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오랜 기억 속의 그 모습과 똑같이 어딘가 안심되는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교관님....

그렇군요. 우리는 더 이상 악령이 아닌 거군요. 내 소중한 사람이자 유일한 교관인 당신은 이번에도 다시 제게 길을 보여주는 거군요.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시는 거군요.

안도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우리에게 자기 입맛에 맞는 족쇄를 채워 놓았다. 나는 이곳에 갇혀 버렸고 너는 그 여자의 인형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지금은 벽에 가로막혔지만 그 너머로 전부터 느껴왔던 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네게 들리지 않더라도 너에게 꼭 전해야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너는 내가 아니지만, 네 옆에는 내가 있어.

봐, 지금 벽이 생긴 충격으로 내가 무너지려 할 때 내 속의 다른 사람들이 힘을 주고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줬어.

내가 소영과 석봉과 맘바와 정미와 교관님과의 교류로 힘을 받았고, 네가 그들과의 교류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조금 욕심냈던 것처럼 나와의 교류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너는 인간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분명 그럴 수 있어.

너는 갓 태어난 아기와 같아. 네게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배우지 못한 순백일 뿐이야.

그러니까 제발 포기하지 말아줘.

 

 

 

 

목표 지점이었던 G타운의 옥상에 도착했다. 선우란은 운송 부대를 넘어 인간으로서 굉장히 불쾌한 경험을 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 도착.”

 

“도착 확인. 안전모드 종료.”

 

다만 불쾌감을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티나에게 말을 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다. 정말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는 말이지만 자신의 신념 이전에 사람으로서 이야기해야 했었다.

 

“.....신기록 단축에 실패했어.”

 

“조금 더 안전운전을 했다고 판단하면 되겠군.”

 

“아냐, 네 영혼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 쿨걸 너 뭔가 바뀌었.... 쿨걸, 우는 거야?”

 

선우란은 에두른 표현으로 이야기하려 했지만 뒤돌아 티나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에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달릴 때 등 뒤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는데 단순히 착각이라 생각했었다.

착각이 아니었던 걸까?

 

“울어? 이상하군. 눈 쪽의 세**을 사용 요청한 로그는 없는데.”

 

“.... 슬픈 꿈이라도 꾼 거 아니야?”

 

“내게 꿈을 꾸는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다.”

 

티나는 간단히 부정했지만 선우란은 꿈이나 그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어쩌면 정말로 최악의 사태까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선우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래. 착각일 수 있겠지.”

 

“그럼 이만 가겠다.”

 

“.... 굿바이, 다음에 만났을 때는 영혼의 무게를 되찾은 상태이길 바랄게.”

 

티나는 멀어져가는 선우란을 보며 이유 없이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어쩐지 가슴 한곳이 아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인형이었고, 사람과의 관계를 전부 끊어버렸으며, 오로지 자신의 결함이 없어졌다는 것에 기계적인 기쁨을 느낄 뿐이었다.

그녀 속의 다른 그녀는 계속해서 벽을 내려치며 외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인형답게, 기계답게 명령받은 일을 처리했을 뿐.

그렇지만 또 다른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쉴새 없이 벽을 내려치며 벽 너머의 그녀를 계속 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속되어 가는 지옥 같은 상황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벽을 내려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녀와 그녀를 막고 있었던 벽이 없어졌다.

그리고 벽의 너머에서 순백의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당신이 내 새로운 교관이다.”

 

맞잡은 두 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였고 온기였으며 또한 희망이었다.

순백의 소녀가 말한 익숙한 말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응, 그래. 잘 부탁해. 티나.”




 이번 사태로 클로저스를 접하게 되었는데 예상보다 티나의 화력이 너무 세서 덕통사고가 제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런 고로 티나쟝에게 바치는 글.



2024-10-24 23:10:2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