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심장
참나리 2016-07-30 3
“이제 곧이다, 티나(Tina). 지시를 기다려라.”
“…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음성에, 소녀는 귀에 겨우 들릴 듯 말듯 한 말로 소곤거렸다.
소녀가 들고 있던 총의 스코프에는,
목표의 머리가 들어온 지 오래 되었다. 진즉에 그 머리통을 쏴 갈겨도 모자라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호흡을 조절하며
남자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무전기에서 긍정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소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탄환이 발사되는 소리와, 적의 머리통이 부서지는
모습은 별개의 것인 듯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 전투의 결과를 짐작하게 할 신호탄이었다.
“이번에도 이겼어요, 교관님!!”
“호들갑 떨지 마라, 티나.”
“하지만 이번에도 교관님의 말대로 되었잖아요! 역시
교관님은 대단하세요!!”
옆에서 방방 뛰는 소녀에 비해, 남자는 여전하게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의 주변에는 여러 위상능력자들이, 자신들이 섬멸한
차원종들의 구역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주변의 시선은, 승전보를 올리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그 팀에게 향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대열의 앞에 있는 두 명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척 봐도 180은 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와, 아직 초등학생 티를
못 벗은 소녀의 조합은 그들에게 흥미를 갖게 하기 충분했으니까.
**** 아니냐는 말로 수군대는 놈팡이가 있기도 했으나, 그들은 지옥귀마냥 목소리를 캐치해낸 남자의 눈빛에 어김없이
위축되었다.
2002년을 잠식한 차원전쟁, 그 위에서 활약하는 주역들 중엔 틀림없이 그 둘 또한 속해 있었다.
전쟁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선정된 임시 집결 장소에는 장신의 남자, 트레이너(Trainer)의 팀을 포함한 많은 팀들이 모여
있었다.
단순한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격화되는 전쟁 속에서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소란 피우지 말라는 트레이너의 말은 잊은 듯, 티나의 시선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부산스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어라 하려는 남자였으나 이미 소녀는 자신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소녀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이미
소녀가 어디에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는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남자를 비롯한 팀의 예상대로, 소녀는 그 작은 몸을 이끌고 구역에
들어선 몇 명의 앞에 섰다. 고등학생 정도의 남녀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소년이었다.
“저, 전투 수고하셨습니다, 서지수 님!”
“어머, 오랜만이네 꼬마아가씨. 그냥 언니라 불러도 되는데.”
소녀의 말에, 단발의 여성이 미소 지으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여성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에 흠칫한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저 같은 게 어떻게 서지수 님에게 그런…!”
“…진정해라, 티나.”
어느새 티나의 옆에 선
트레이너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에 다시금 놀란 티나가 기다란 머리를 요란스럽게 찰랑이며 두 명에게 거듭 사과한다.
“죄, 죄송합니다! 서지수 님이 앞에 계셔서 긴장되어서 그만…”
“…그것도 전에 말하지 않았나. 전쟁 중엔 서로의 편의를 위해
코드네임(Codename)으로 부르는 것이 기본이라고.”
“그, 그렇지요…죄송합니다, 알파원(Alpha one) 님….”
티나의 말에, 알파원이라 불린 여자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선은 트레이너를 향했다.
악의를 찾기 힘든 미소와 함께, 남자에게
힘을 뺀 손이 내밀어졌다.
“아니, 괜찮아. 그보다 아저씨도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기강이 잘 잡힌 팀이에요.”
“…알파원이 티나에게 호칭에 대해 뭐라 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군.”
방금 전 상황을 생각하며, 난 아직 20대인데…하는 무언의 외침과 함께 트레이너가 알파원의 손을 맞잡으며 가벼운 악수를
한다.
이내 전쟁에 대한 소소한 얘기를 마치고, 알파원을 비롯한 세 명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티나는 봐주지도 않을 경례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피곤한 짓을 하는군, 티나.”
“뭐 어때서요, 교관님은 항상 긴장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그
말대로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라도 긴장을 풀 필요가 있다는 거다. 계속해서 긴장상태를 유지하다 작전 중에 정신이 흐트러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지.”
“피이….”
트레이너의 말에, 지지 않겠다는 듯 빽 소리치던 티나였으나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볼을 부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파원이 사라진 길을 가만히 보던 남자가 지나가듯 말한다.
“…티나, 저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트레이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티나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The Fox’ 팀! 최초이자 최강의 위상능력자인 알파원님이 속한 최강의 팀이잖아요!”
“…잘 알고 있군. 그렇게 저 팀이
좋은가?”
“네! 당연한 거 아닌가요?!”
“…….”
마치 발광물질이라도 있는 듯 반짝이는 티나의 눈을 보던 트레이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렇게 저 팀이 좋은데도 이곳에 남아있는 건가. 다른 팀원들처럼 너도 소속을 변경하면 될 건데 말이지.”
지나가듯 말하는 트레이너였으나, 티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현재 트레이너의 팀은 이 두 명을 포함한 네
명이나, 원래는 이보다 수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철저하다 못해 전쟁 결벽증, 강철 심장 등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까칠한 트레이너의 행동
및 방침으로 인해, 그에 질린 팀원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면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져서, 너도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는 트레이너의 말이 걱정이 된 티나가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아, 아뇨! 전 교관님의 팀이 좋아요!!”
“방금 전 행동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군.”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유심히 보던 소녀의 고개가, 이내 한 쪽으로 치우쳤다.
“…교관님, 삐지신 건가요?”
“…삐진다는 말이 화가 났다는 것과 같은 말인가, 그렇다면 그 말은 틀렸다.”
“에이, 삐지신 거 맞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트레이너의 바지를 쿡쿡 찌르는 티나. 거리낌 없는 그 모습에 일시적으로 표정이 굳어진 트레이너가 무겁게 부정한다.
“…아니다, 티나.”
“…저기, 그쯤하고 저희도 어서 준비하죠? 다른 팀들도 다 떠나려 하는데.”
다 큰 남자와 어린 소녀가 벌이는 꽁트가 지겨워졌는지, 넌지시 물어보는 팀원에 의해 이 상황은 무마되었다.
키득거리며 트레이너의
손을 잡는 티나와,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쉰 트레이너의 모습을 끝으로.
어린 소녀와 목석같은 남자가 처음 만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당시 범세계적 클로저 관리 기구로써 신설된 조직
유니온(UNION)의 지원 하에, 신생 클로저 팀을 이끌던 트레이너에게로 한 소녀가 찾아왔다.
“교관님! 저 강해지고 싶어요. 강해져서, 이 전쟁을 막고 싶어요. 그게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절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교관님!”
자신의 위상력을 보여주며 자신을 팀에 넣어 달라는 소녀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한 트레이너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소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왔다.
매사에 철저했던 트레이너는, 소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딱 열 번째가 되었을 때 마지못해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녀는 당연하게도 나이와 체구에 걸맞게 전투에 어울리는 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녀와 함께 고민하던 트레이너는, 소녀의
위상력인 ‘허수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무기를 활용하는 것을 제안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소녀는 엄격한 트레이너의 교육 아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왔다.
그로 인해 여러 무기들의 사용법은 알게 되었지만, 시간과 경험이 부족하여 트레이너가 가장 강조한 저격만을 최소한의 소양으로 갖게 되었다.
전면전이 어울리지 않는 소녀였기에, 가장 후방에서 적을 교란시키는 편이 가장 걸맞다는 트레이너의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실력으로,
수완이 있는 트레이너의 지휘 아래 당당한 한 명의 전투원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밤의 세계는,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삶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주는 밤의 장막은, 모든 것을 멈추고 내일을 준비하라고 말하듯이 모두를 물러가게 하였다.
트레이너의 팀을 비롯한 몇 개의 팀은, 그 어둠 속에서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그 도시에 차원종의 습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 알게
된 단서들로 인해, 그 근방에 출몰하던 차원종들의 움직임이 도시를 향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도시는 물자가 상당하였고 각종
군수산업도 진행되고 있어서, 위상능력자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기에 그 이유를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도시의 방어 겸
차원종들에게 피해를 주고자, 그 같은 매복을 감행한 것이었다.
대강의 준비를 마친 위상능력자들은, 각자 보초를 세워 놓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트레이너의 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루 일과인 단련을 간소하게 끝낸 트레이너의 앞에, 누군가가 위치하였다.
한사코 자신 또한 보초를 서겠다고 우겨서 마지못해 배치한, 막 보초를 서려고 준비한 티나의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지, 티나.”
“…교관님, 정말 이대로 있어도 될까요?”
“무슨 소리지?”
트레이너의 반문 이후, 잠시 동안의 침묵이 지나고서야 티나의 말이 이어졌다.
“이대로 있다가…도시가 공격을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저희만이라도 준비를 해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네 말은 알겠지만, 작전은 이대로 진행한다. 우리는 도시를 침공하는 차원종의 규모를 파악한 후에 움직인다.”
“…….”
트레이너의 말에, 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무언의 대답임을 짐작한 트레이너가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딱딱한 남자의 어조가, 얼음처럼 차갑게 티나에게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도시에서도 분명 기습에 대한 대비가 있을 테니까…이건 단순히 우리의 승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도 들었겠지만, 얼마 전부터 인간형 차원종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 극악의 위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티나였지만, 트레이너에게는 소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몇 차례 교전이 있었음에도 아직 그들의 힘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전투에 그들 또한 참여할지도 모르지. 그렇기에0 그만큼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늦어도 오늘 밤 내에, 네가 좋아하는 여우들(The fox)도 합류하게 될 거다.”
“…네.”
마지못해 말하는 듯한 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에 큰 의미를 갖지 않은 트레이너는, 힘들면 보초를 교대하고 내려오라는 말로써 대화를 마쳤다.
트레이너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고아로 살아왔던 자신과 달리 티나는 부모님을 차원종에게 여읜, 전쟁에 참여한 위상능력자들로서는
흔한 편인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몸을 지키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효율을 중시하는 트레이너와는 달리, 티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트레이너의 명령과 다른 무모한 짓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번 전투 또한 마찬가지였다. 트레이너가 못을 박아 놓긴 했지만 도시에서 그들의 예상보다 빨리 전투가 시작된다면, 티나가 그에 반응하여
돌발행동을 벌일 확률이 없진 않았다.
그렇기에 보초를 세워, 티나가 어떻게 해도 그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트레이너의
의도였다.
다행히 티나에게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대로 최강의 요원들과 전투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분명 그것으로 족했을 것이었다.
굉음과 함께, 한 팀이 머무르고 있던 간이 초소가 부서졌다. 그에 서둘러 대응하려는 위상능력자들에게, 조금의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졌다.
트레이너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다른 동료를 신경 쓸 새도 없이
최소한의 무장만으로 급급히 몸을 피했다.
비명과 폭음이 어우러진 지옥 속에서,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트레이너의 눈에 똑똑히 두 신형이
들어왔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탁한 풍의 의상을 걸친 어린 소년 소녀가.
반듯한 이목구비에 백발, 검은 색의 옷차림. 자신이
들은 정보와 거의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극악의 위험도를 가진, 인간형 차원종.
그런 자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트레이너에게, 어린 악마들이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
“저기 봐, 애쉬(Ash). 우리들이 무섭지도 않나 봐?”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의 말에, 짧은 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정보에 있던 녀석 같네. 상당한 지휘력을 가진 위상능력자였을 거야.”
“그래? 뭐가 되었든…살려둘 필요는 없는
거지?”
그렇게 말한 소녀의 손끝에서부터, 그녀의 팔을 뒤덮는 검은 기류가 형성되었다. 이내 그 바람은 트레이너를 향해 뻗어
나갔고, 그것을 가까스로 피해낸 트레이너에게 어느 새 애쉬라 불리었던 소년이 접근해 있었다.
양 손에 검은 구체를 감싼 소년의 팔이 뻗어
나갔고, 트레이너 또한 자세를 잡으며 그에 대응하려 했다.
그 순간, 트레이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만 둬!!!!”
갑작스런 트레이너의 외침. 그에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한 애쉬에게, 그의 반응속도보다도 빨리 무언가가 그 몸에 다다라
있었다.
뒤이은 총성과 함께, 애쉬의 몸이 공중에서 튕겨져 트레이너를 지나쳐 날아갔다. 그것이 티나의 저격임을 알아챈 트레이너가 근처에
나가떨어진 애쉬를 무시하고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런 트레이너의 기대를 부수듯, 그의 시선은 티나와 그 뒤에 있는 소녀의 신형에게로 고정되었다.
“꽤나 좋은 솜씨네. 뭐, 상대를 잘못 만났지만.”
그 말과 함께, 검은 기류가 티나가 있던 초소를 산산이 부수었다.
여태껏 보아왔던 작은 몸이, 초소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에 주저 않고 몸을 날린 트레이너보다, 검은 색의 구체가 더 빨리 날아갔다. 애쉬가 날아갔던 곳에서의 공격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들은, 바닥에 추락한 티나에게로 적중했다.
“티나아아아!!!!!!!!!”
단 한 번도 동료들에게 보여준 적 없던 모습과 함께, 트레이너의 비명이 산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런 트레이너의 모습을 보며 두 남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다시금 그의 앞에 섰다.
티나의 저격은, 애쉬라 불리었던 소년의 팔에 명중했으나 치명상을 입히진 못한
모양이었다. 피로 인하여 붉게 물든 소년의 옷은, 본래의 검은색과 겹쳐져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만신창이가 된 티나를 부축한
트레이너였지만, 소녀의 옷과 자신의 팔을 붉게 물들이는 무언가는 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녀석들은 악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부수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최악의 상대였다.
그에 이를 갈면서도,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은 트레이너가 입만을 움직여 말을 꺼내었다.
조금이라도 더 건들면 곧바로 터져버릴 것
같은, 폭탄과 같은 어조였다.
“어떻게…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알게 된 거지? 재밍은 물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체의 전파를 차단했는데….”
“뭐,
위치를 찾는데 애먹은 건 사실이지.”
“그래, 하지만 처음부터 너희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거든!”
“알고 있었다고…?”
두 명의 말에, 트레이너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에 맞추어 키득거리던 소년 소녀 중에, 소년이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손의 끝은, 트레이너들이 지켜보고 있던 도시를 향해 있었다.
“너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우리의 군단이 저 도시를 침범하기로 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지.”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와
함께, 너희 같이 기습을 노리는 인간들을 일망타진하기로 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
“그렇다면…”
트레이너의 말을 끊으며,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간. 너희들은 우리의 정보를 믿고, 우리의 함정에 빠진 셈이야. 스스로 제 목을 조른 셈이지.”
“정-말, 멍청하지
뭐야! 안 그래, 애쉬?”
이후의 두 명의 웃음소리는, 트레이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트레이너의 정신은,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를 돌아보듯이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자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티나의 충고를 들었다면, 위화감을 놓치지 않고 도시와 주변을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지금과 같은 기습을 받았을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티나의 신체능력을 보고 그녀에게 저격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거리를 둔 소녀가 자신의 보호 없이 이렇게
공격받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찾아온 티나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망연자실한 트레이너의 양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티나의 출혈이 선명하게 느껴졌으나 더 이상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귓가에 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할 만큼 너무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트레이너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트레이너를 끝장내기 위해 손을 들었던 남녀에게로 푸른빛이 다가왔다. 열화와 같은 푸른 불꽃이, 두 명을 휩쓸어
버리고는 폭발하였다.
이내 펼쳐지는 연기를 단번에 흩어버린 그들의 앞에, 아까까지는 없었던 세 명의 남녀가 위치했다.
“콜록, 콜록! 뭐야, 누가 이렇게 매연을 뿌리는 거야?!”
“…기다려, 누나. 저 녀석들, 저 남자와 같은 특수
경계대상이야.”
애쉬의 말에, 양 쪽에 동행하고 있던 소년들을 세운 채 그들을 경계하고 있던 알파원이 검을 치켜세웠다.
푸른 비단과 같은
위상력이, 검에 휘감긴 채 일렁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나에 대해서 아는 모양이네. 너희들은 누구지?”
알파원의 말에, 낮게 웃고 있던 두 명이 번갈아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애쉬, 이쪽은 나의 누나인 더스트(Dust).”
“우리는 이름 없는 군단의 군단장이며, 너희들을 휩쓸기 위한 재와
먼지지!”
’차원종의 군단장…?‘
남매의 말에, 알파원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차원종들이 그 나름의 지휘체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군단장까지 설립되어 있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차원종에 대한 위상능력자들의 대응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해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더스트가 손가락질하며 말하였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해볼까 알파원?”
“…아니. 기다려, 누나.”
예상과 다른 애쉬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미 우리는 목적을 이루었어. 게다가 저 인간들은 쉽게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 아니고, 다른 인간들도 곧 이곳에 올 거야. 점점 불리해질
상황에 진을 뺄 필요는 없어.”
“…칫, 운 좋은 인간들이네.”
그렇게 혀를 찬 더스트가, 애쉬와 함께 몸을 날렸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성취감과 함께, 인간들에게 더한 절망을 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런 남매들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경직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가겠단 거지.”
그 목소리에 채 반응하기도 전에, 트레이너의 오른손이 거세게 내려쳐졌다.
굉음과 함께, 푸른빛의 위상력이 마치 낙하하는 폭포처럼
남매를 휩쓸었다. 절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는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누구보다 신중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소극적인 남자의 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일격이었다.
“…그 정도의 공격으로도, 녀석들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던 건가.”
자신과 동행한 남자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은 알파원이 몸을 숙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애쉬와 더스트가 입고 있던 옷의 조각을 손에
쥔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위상력으로, 그들의 옷자락을 태워버린 알파원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무 소용없는 건 아니었어. 그 녀석들도 그 정도로 피해를 입은 이상, 한동안은 활동하기 힘들겠지.”
그렇게 말하는 알파원의 시선이 다시금 한 남자를 향했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소녀를 부축하고 있던 트레이너는, 그 상태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느 샌가 알파원과 함께 왔던 백발의 소년이, 남자의 곁에 가서는 두 명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무력감에 대해 곱씹으면서,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미안해,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결과…이 녀석도 그런 식의
사과는 바라지 않을 거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사과하는 소년을 돌아본 트레이너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소년을 다독이듯 말하는 그였으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에 불꽃이 작렬했다.
“뭐…뭐 하는 짓이지?!”
“내가 할 소리야, 멍청아!!”
시원하게 트레이너의 뒤통수를 휘갈긴 알파원이, 적반하장으로 소리쳤다. 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마주보는 트레이너에게, 한숨을 쉰 알파원이 이번엔 손을 그의 어깨로 올리고는 다독이듯 말했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라고. 괜히 담아두지 말고.”
알파원의 말을 듣고서야, 트레이너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이, 티나의 얼굴에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어느새?’
자신의 상태에 대해 혼란스러워진 그였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크…윽, 으아아아아아아…!”
전쟁 결벽증, 강철심장 등 숱한 별명으로 불려왔던 철의 교관이, 난생 처음으로 다른 동료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티나는 말하였다. 트레이너의 팀이었단 게 자랑스럽고, 그를 동경했다고.
가능하면 함께 전쟁을 끝내고 싶었고, 먼저 가서
미안했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트레이너는 그것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고 있었다.
티나의 기분을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와 함께, 지금이라도 자신을 따르던 소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났다.
수많은 위상능력자들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전쟁은 잠식되기는커녕 계속해서 격화되었다.
격화되는 전쟁 속에서, 인력이 부족한 만큼 현 위상능력자의 소비를 줄이고 보다 전문적인 체제를 구성하는 것을 주도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 세계의 위상능력자를 관리하는 취지의 기관 유니온(UNION)이 불안정하던 체제를 확립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표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베로니카(Veronica).”
각 잡힌 경례와 함께 붉은 장발의 소녀를 뒤로 한 남자가, 자신의 수첩을 꺼내서는 리스트를 확인한다. 남자의 성격을 잘 나타내듯 정자로
써진 목록에는 방금 전 얘기를 마친 베로니카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름에 체크를 한 남자의 시선이, 그가 있던 지역에 들어서는
세 남녀를 향한다.
어딘지 껄렁해 보이는 여성과, 그런 여성의 옆에 위치한 동년배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유니온이 말한 집결장소가 맞는 거지?”
“그렇다니깐, 너도 보일 거 아냐? 아마 여기 이 사람들이 우리처럼
소집에 응한 클로저들이겠지.”
“하아, 뭐가 되었든 좋으니 일단 좀 쉬고 싶어….”
여성의 말을 시작으로 한 마디씩 말하는 세 명. 그런 남자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쉰 여성이, 한 손으로 턱을 잡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팀 네임이 마음에 안 들어. ‘The Fox’만한 임팩트가 없다고 할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네
네이밍 센스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더라.”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아뇨,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여성의 어조가 변하자,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 남자였다.
그런 두 명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던 소년의 시선은, 자신들에게로 오던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걸음을 옮긴 남자였고, 이내 네 명이 대치하게 되었다.
갑작스레 자신들의 앞에 선 장신의 남자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세 명이었으나, 현재의 상황을 알고는 자세를 잡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차원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범세계적 클로저(Closer) 관리 기관인 유니온이 구상한 해결책.
좀 더 전문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면서 쉽사리 깨어지지 않을 강한 전투력과 결속력을 가진 팀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진가를 발휘한 스페셜리스트들을 모집하여 신생
클로저 팀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초면은 아니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유니온의 소집령에 응한 클로저들로 구성된 신생 팀, 울프팩(Wolfpack)의 훈련교관을 맡게
된 트레이너라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 잘 부탁해! 난 알파원…아니, 이제 알파퀸(AlphaQueen)이지! 잘 부탁해,
교관!!”
“알파퀸? 코드네임이 바뀐 건가?”
정갈한 행동과 목소리로, 눈앞의 세 명에게 말하는 트레이너였으나 이내 들려온 알파원의 뜻밖의 소개에, 의아해한다. 그런 트레이너에게, 여전한 미소로 여성이 대답한다.
“신생 팀을 이끌기 위해서 그에 어울리는 코드네임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더라고. 뭐, 나로선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그렇군, 그
말은 네가 우리들의 대장이란 건가. 잘 부탁한다.”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알파퀸의 옆에 선 소년을 돌아본다. 아직 앳됨이 채 가시지 않은 백발의 소년,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소년을 마주보며, 트레이너의 커다란 손이 다시금 자신의 머리를 향하였다.
“‘전’ the fox 팀의 신예, 진(Jean)이라 했지? 잘 부탁한다.”
“나, 나도 잘 부탁해!”
트레이너의 경례를 보자, 반사적으로 자신 또한 경례를 취하는 소년. 호의의 뜻으로 한 행동이었으나, 소년의 어설픈 경례를 본 트레이너의 눈이 무섭도록 날카로워졌다.
“그게 아니지, 경례하는 법조차 모르면서 어설프게 흉내 내면 오히려 역효과다.”
“으, 윽…죄송합니다!”
트레이너의 말에, 당황한 소년이 소리쳤다. 착 가라앉은 트레이너의 목소리는, 웬만한 호통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기에 숱한 전장을 겪은
소년으로서도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런 소년의 자세를 보며 어떻게 교정을 할까 하던 트레이너의 눈이, 전과 달리 이채를 띠었다.
“그게 아니지, 티나. 몇 번을 가르쳐야 알겠나. 좀 더 손을 이렇게…”
“으으…죄송해요, 교관님.”
“…….”
갑작스레 눈시울이 붉어진 트레이너를, 알파퀸을 비롯한 세 명이 의아해하며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트레이너가, 황급히
표정관리를 하고는 소년에게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 각오 단단히 하고 있도록.”
“네, 넵!!”
소년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트레이너가 돌아섰다. 다시금 자신이 왔던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다짐하듯 생각하였다.
“남들은 교관님을 강철심장이라 부르지만, 전 그 별명이 좋아요. 차갑다는 뜻도 있지만, 그만큼 단단하고 견고하단 뜻도 되잖아요?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교관님.”
‘…티나, 그리고 모두들, 지켜보도록.’
주변에 있던 클로저들의 중심이 되는 위치까지,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채워졌고, 이내 사라졌다.
‘난 이들과 함께하겠다. 그리고 아무도 희생되지 않도록 이들을 지키며…누구보다 빨리 이 전쟁을 끝내겠다. 그것이 나와 함께해준 너희들에 대한…최대한의 속죄와 보상이니까.’
트레이너의 시선이 자신의 주변에 위치한 클로저들을 향했다. 어느새 리스트의 모두가 그의 주변에 있었고, 그들이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고 강한 동료들임을 트레이너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클로저들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레이너의 시선에는, 리스트에 없는 몇 명이 더 있었다. 그 중에는 자신을 특히나 잘 따랐던 소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트레이너의 등에, 이유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커다란 라이플 같기도 했고, 작은 소녀인 것 같기도 한
무게가.
마치 등 뒤는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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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문학이네요.
공식설정을 바탕으로 한 제 뇌내 설정이 조금 들어가 있으므로 이점 양해바랍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