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春] (反) 마주치다

루이벨라 2016-05-11 5

[夏] -> [冬] 으로 이어지는 순서입니다.

※ 평행세계관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지는 달이다.




 '봄이다...'


 쌀쌀한 꽃샘추위가 가실 때쯤에서야 비로소 봄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겨우내 웅크렸던 몸을, 꽃샘추위 덕에 예정보다 더 오래 웅크리고 있었던 몸을 오랜만에 펴본다. 몸 여기저기서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지만 앞으로 움직일 날이 훨씬 많이 남았으니 이 정도 아픔에서 멈추면 안된다. 아예 봄바람을 느끼기 위해 창문까지 열고 5분정도 스트레칭을 했다.


 추위가 사라질 동안까지만 일을 쉬겠다고 이슬비에게 말했다. 이슬비는 내 상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바로 이해해주었다. 그렇게 '추위' 라는 핑계 하나로 유예기간을 억지스럽게 얻었다. <검은양> 모두들에게는 날이 따뜻해지면 괜찮아질거다, 라는 말은 내가 먼저 꺼냈지만 사실 그 말을 제일 믿지 않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정말? 겨울이 풀리고서 봄이 찾아온다면 정말 괜찮아질 자신이 있어? 그냥 날씨 핑계를 보기 좋게 대는거 아니야? 날씨의 문제가 아닐텐데? 네 마음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한단계 성장해야하는 과정을 넌 억지로 피하고 있는거 아니야? 그걸 인정하기 싫으니까 괜히 날씨 핑계를 대고 있는거 아니야? 너무 이기적인거 아니야?


 지난 겨울에 병원에서 퇴원을 한 후, 난 줄곧 집안에서 지냈다. 의도적으로 히키코모리가 된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밖에 나가기 싫었다. 정말 이슬비에게 내뱉은 시덥지도 않은 핑계가 적용이 되어진건가? 이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는거 같기도 했다.


 외부와 차단이 되어지자 참 신기하게도 의식이 중간에 끊기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렇게 절약된 시간을 서유리를 생각하면서 보내게 되었다는 거지만.


 어쨌든 마음을 굳게 먹고 서유리를 다시 추억하니 마음 한구석이 점점 안도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서유리가 죽은 이후로, 내가 이렇게 차분히 마음의 정리를 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여름에 별장에 다녀온걸 제외하면 없었다. 인력 1명이 줄어들어서 한층 더 바빠진 <검은양> 에 바로 투입이 되어서 실제로 초겨울까지 일에 시달렸다.


 그즈음부터 의식을 잃어버리는 일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날씨 핑계이든 뭐든 혼자서 생각할 만한 시간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꽤나 좋은 결과였다. 꽃샘추위가 시작할 무렵부터는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아예 정리는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일상 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만 정리가 되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내 첫사랑이자 사랑하고 싶었던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단숨에 잊는다면...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급급한 초보 연기자 수준이 아닌가.


 오랜만에 티브이를 켰다. 화사한 벚꽃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 기상 캐스터가 이번주가 꽃놀이 가기에 적합한 주라는 말을 덧붙였다. 꽃놀이...벌써 벚꽃이 필 시기가 되었나. 정확한 날짜 개념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저 오늘 햇살이 눈부신걸 보고 봄이구나, 라고 대충 예상한것 뿐.


 꽃놀이 하니까 생각난다. 아마도...작년인가 재작년이었다. 그리 오래된 시간은 아니었다. 서유리가 하도 꽃구경을 가자고 옆에서 쪼아대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한강 근처로 나갔던 기억이 있다. 시기적으로 벚꽃을 구경하기에는 일렀기 때문에 꽃이 반쯤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구경하러 나간 꽃이 아름다워서 기억에 남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옆에 서유리가 있어주기만 해도 그 날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 되었다.


 앵커는 자신의 뒤로 요즘 한창인 모습이라며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서유리와 갔을 때보다는 약간 피어난, 그렇다고 절정적으로 피어나지 않은 벚꽃나무들. 내 눈에는 그저 헐벗은 정도로 보인다.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한강 강변길까지 나오는데 성공했다. 아마 서유리와 꽃놀이를 간 것도 이맘때쯤이었다. 꽃샘추위가 풀린 직후, 아직 벚꽃이 추위로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조금 이른 아침 시간이기도 하고 평일이었기에 강변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서 아직은 쌀쌀하다고도 생각되는 길을 걷는다...이것도 꽤 괜찮았다. 이 길은 서유리와 같이 걸었던 길이니까, 마음 한켠을 조금 정리하는데 주위가 시끄러운것보단 낫지...어쩐지 오른쪽 팔부근이 허전했다.


 가뜩이나 화사하기로 유명한 봄햇살인데,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너무나 눈부셔서 약간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기요!"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린거 같은데...? 잘못 들은건가. 더욱이 그 부르는 사람이 지칭하고 있는게 나인거 같은 생각이 든다면 더더욱.


 "저기요!"


 환청이 아니었다. 쨍쨍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여자가 부르고 있는 대상은 바로 나인게 분명한거 같았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나를 부르는걸까. 호기심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 올려다보니...


 '어라?'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적.


 뭐지...? 내가 이런 벚꽃길을 걷고 있었던가? 분명 내 기억이 맞다면 한강 강변길에 이런 이국적인 분위기의 벚꽃길은 없었는데...? 게다가 이렇게 꽃이 활짝 피어있다니...? 그것도 내가 티브이에서 본 모습하고는 완전히 다른...한창 절정때의 벚꽃이.


 주위를 휘 둘러보는데 저 앞쪽에서 나를 부른 것으로 추측되는 여자의 인영이 있었다. 여자는 마치 3년만에 만난 사람처럼 손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내가 보이는 게 반가운 모양이었다.


 나 참, 붙임성도 좋은 여자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녀석이 하나 떠올라서 조금 우울해졌다.


 어차피 갈 길도 마땅히 없어서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40m, 30m, 20m, 15m...


 10m의 거리와 가까워질 때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아버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이...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이와 똑 닮아있다는 사실을.


 나들이를 나온거 같이 화사한 색의 외출복, 간결하게 묶은 검정색 포니테일, 자연적이라기에는 인위적이라고 생각이 되어지는 벽안(碧眼)까지...


 이건 꿈인가? 난 또 의식을 잃어버린건가? 한강 강변길을 걷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을 잃어버린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유리를...서유리가 내 바로 앞에 서 있을 수 있나.


 그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후드 속에 가리고 있던 내 얼굴을 조금 드러내보이자 상대방의 벽안 안에는 놀라움과 경악스러움이 적절하게 반죽되어있었다.


 "세하...?"


 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내 이름이 불려지자 반사적으로 나도 상대방의 이름을 속삭였다.


 "유리...?"




 -「마주치다」, to be continued...

2024-10-24 23:01:3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