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어느 이슬비의 이야기
파키어스 2014-12-09 4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이 목도리를 두른 채 군고구마가 든 봉투를 손에 들고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 그녀가 하아, 내뱉은 흰 입김이 공중에서 흩어진다. 단발머리와 또래에 비해 조금 작고 약해 보이는 소녀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한 번 쯤 머물다가 갈 정도의 차가운 매력을 보이고 있다. 그녀는 봉투를 뒤적여 군고구마 한개를 꺼내어 크게 베어 물었다. 꽤나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군고구마를 오물거린다.
"맛있어..."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음식은 있는 법. 여름에는 빙수, 겨울에는 군고구마가 그녀의 철칙이다. 큼직한 고구마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버린 그녀는 또 한 개의 고구마를 집어 입으로 넣었다. 군고구마만 먹기에는 조금 목이 메이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보이는 듯, 열심히 고구마를 씹어 삼킨다. 두 번째 고구마를 다 먹고 손가락을 핥는 그녀가 잠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휴우, 내 뱉은 숨이 곧 어색한 미소로 변했다. 늘 이 계절에 군고구마를 먹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봉투를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조용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의 길이로 보아하니 일반 메세지가 아닌 통화인 것 같다.
"네, 검은양 이슬비입니다."
"아아, 슬비야. 나야 나 유정이 언니."
전화를 걸어온 쪽은 유니온 신서울 지부, 검은양의 관리감독을 맡은 김유정 요원이다. 주로 검은양 요원들에게 임무를 전달할 때도 있어, 슬비는 살짝 당황했다.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임무입니까?"
"그냥, 오늘 너 학교에 안나왔다고 하더라고. 늘 성실한 네가 갑자기 땡땡이 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테고. 그래서 학교에 연락 했더니 오늘은 개인적인 용무로 못나오겠다고 연락을 했다나? 오늘, 무슨 일 있니?"
전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이 들릴까, 이슬비는 휴대전화를 멀리 떨어뜨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완벽주의적 성격인 그녀의 모습과는 어딘지 조금 멀게만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고쳐잡았다.
"아, 아뇨. 별 일 없습니다. 걱정끼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그런 걸로 사과하지마. 검은양 리더니, 위상 능력자이니 해도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한 고등학생 꼬마인걸. 어... 이렇게 말하니 왠지 늙어 보이네 아하하. 그럼, 나중에 보자?"
"네. 수고하십시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오늘 같은 날을 제발 임무가 없기를 바라며 학교까지 빠지고 나온 날이기에 그녀는 조금 불안해졌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벤치 등받이에 등을 털썩 기댔다. 올려다 본 하늘이 참으로 파랗다. 이 장소에서 조금만 더 쉬다가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옆에 놓인 고구마 봉투가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구마 봉투에 왠 꼬마 아이가 자그마한 양 손으로 고구마를 집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고구마를 신기하다는 듯이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다. 이 광경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이슬비는 잠시동안 꼬마의 행동을 묵묵히 관찰했다. 대체 이 버릇 없는 꼬마는 누구란 말인가 생각을 하니 어느새 꼬마는 이슬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얘! 얘야 호연아! 그럼 못 써! 땍!"
호통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꼬마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땅으로 내려놔 아이의 손에서 고구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슬비의 손에 고구마를 쥐여주며 머리를 조금 숙였다.
"아이고, 미안해요 학생. 우리 애가 괜한 짓을. 이거 다시 돌려줄게요. 호연아, 언니한테 미안해요 해야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아이 먹이셔도 됩니다.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으니 아이가 먹기에도 좋을겁니다."
슬비가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에게 다시 고구마를 내밀었다.
"이건 언니가 주는 선물이야. 맛있겠지?"
"이렇게까지 안해줘도 되는데... 자, 호연아. 언니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마씀미다!"
양손으로 고구마를 받아들고 허리를 숙이는 꼬마의 모습이 귀여웠다. 슬비는 피식 웃으며 꼬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꼬마와 어머니가 슬비에게 인사를 하며 점점 멀어졌지만, 슬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느낌 보다 서글픈 기분이 맴도는 미소가 남아있다. 이슬비를 그대로 뒤로 돌아 그들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공원을 빠져 나와 횡단보고를 건너, 삼십분 남짓 걸어 슬비가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추모 공원이었다. 몇번 와본 곳이라는 느낌으로 납골당으로 들어서서 거침없이 걸어가 어느 한 곳에 다다랐다.
"차원 전쟁... 참가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언제 읽어도 적응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 중에 특정 이름패가 있는 곳에 멈춰 섰다. 거기에는 아까 만난 아이와 비슷한 꼬마를 안고 찍은 젊은 부부의 모습이 있었다.
"저 왔어요. 엄마, 아빠."
슬비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눈은 조금도 웃지 못하지만 입만이라도 어떻게든 웃어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
그녀의 부모는 차원 전쟁의 끝자락에서 안타깝게 목숨이 다했다. 슬비가 어렸을 때 하던 두개의 머리끈 중 한 개를 부적 삼아 가져간다고 씨익 웃어보이던 슬비의 부모는 그 리본을 가져간 날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나 있죠. 검은양이라는 국가 차원 관리부 특수처리반에서 리더가 됐어요."
그 후 유니온의 기관으로 들어와 자란 이슬비는 보통 위상 능력자들이 하는 노력이라는 수치를 넘는 노력을 거듭하여, 현재의 위치까지 왔다. 그녀의 노력을 뼈를 깎는 노력이라기 보다는 뼈를 갈아서 새로 만들었다고 표현할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훈련 덕에, 잠재 능력이 딱히 크지 않은 그녀이지만, 리더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리라.
"팀원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저보다 키도 크고 붙임성 좋고 몸매도 좋은 서유리 라는 아이랑, 만날 약을 달고 살고, 건강 챙기는 데에서는 1등인 아저씨랑, 여자애처럼 예쁘장한데 남자인 꼬마아이랑 또... 게임이라는 말만 들으면 아주 사족을 못쓰고 달려드는데다가, 잠재 능력은 우리 팀원들 중에서 제일 높은 주제에 노력 조차 안하는데가 만날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바보인데......"
그녀는 말을 끊고 한번 숨을 고른다.
"그런 주제에 위험할 때면 달려와서 구해주는, 이세하라는 아이."
피식, 웃어버렸다. 꼭 마지막에 떠오르는 이세하만 생각하면 처음에는 화가 났다가 다시 수그러들게 된다. 슬비는 이걸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가끔 당황해 하지만, 그 느낌이 딱히 싫지만은 않았나보다.
"내가 클로저가 되는 거, 아마 살아계셨다면 반대하셨을지 몰라요. 하지만, 난 하겠어요. 내가 안하면, 누군가는 또 다치게 될테니까. 아까 만났던 그 아이도...... 그러니까 할거에요. 이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슬비는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그대로 등을 돌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밖으로 나가 아까 꺼놨던 휴대전화의 전원을 다시 넣었다. 긴 로딩 시간이 끝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디스플레이에 뜨는 전화 번호는 김유정 요원 이라는 이름으로 뜨고 있다.
"네, 검은양 이슬비입니다."
"얘, 슬비야. 많이 바쁘니? 아니, 바쁘더라도 다 손 놓고 이쪽으로 와줘야겠다. 구로역 부근에서 대규모의 차원 진동이 일어났어. 그 때문에 차원종들이 대량으로 유입 됐나봐. 아무리 폐쇄된 지역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영역을 넓히려고 할 게 분명해. 다른 팀원들은 이미 출발 했으니까 빨리 가서 합류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임무 확인. 현 시간부로 임무 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이슬비. 출발하겠습니다."
"너희들 실력은 믿지만, 그래도 꼭 살아서 돌아와. 끝나면 다 같이 고기 뷔페 가는거다?"
김유정은 그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슬비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거칠게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섭지 않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녀도 사람이니까. 전에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저, 그녀는 묵묵히 임무를 받고 차원종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것이 현재 이슬비라는 소녀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니까. 또한 그것이 그녀의 부모에 대한 추모가 될테니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