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秋] 잊고 싶은 것, 잊고 싶지 않은 것
루이벨라 2016-05-03 3
※ 「언제나 내 곁에」 와 이어지니 전편을 읽고 와주시기 바랍니다.
※ 이 단편작에는 존재하는 평행세계가 둘이며, 각자의 서술자가 세하와 유리로 각각 다르니 순서대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흐음, 날이 쌀쌀한걸 보니 가을이긴 가을이군."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던 제이 아저씨의 말에 나는 벽에 걸린 은행에서 공짜로 주었을법한 촌스러운 디자인의 달력을 보았다.
달력은 오늘 날짜를 10월 3일로 표기하고 있었다. 10월 3일. 그날로부터 딱 4개월이 지났다.
-생일국도 못 먹고 가서 어떡해?
-괜찮아. 금방 돌아올테니 그때 맛있게 끓여줘.
그 약속도 결국 지키진 못했어...
"유리야...? 혹시 우는거니?"
"네?! 아, 아니에요.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제이 아저씨의 말에 의해 난 알았다.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얼른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지만 제이 아저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 안 통하는 건 알지만 보여주기 싫었다. 아니, 보여주어서는 절대 안되었다. 내가 아직도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같은 동료들에게도 보여주어서는 안되었다.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냥 눈이 따끔거렸다.
* * *
집으로 돌아오면 늘 허전하다.
결혼할 때는 '드디어 우리 집이 생긴거네!' 하면서 기뻐했는데 지금은...
아직도 이 집 곳곳에는 세하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두 개의 칫솔, 두 개의 밥그릇, 그리고 옷장 한구석에 숨겨져있는 세하의 정식요원복 등.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참기 힘든건 침실에 남아있는 침대였다.
당연히 둘이서 함께 자기에 침대는 더블 사이즈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침대에서 ** 않고 거실의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옆쪽이 허전한 침대에서, 특히 밤에 누워있으면 눈물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싱글사이즈 침대로 바꿀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무리.
사실 세하를 잊으라고 권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었다. 그래보았자 너만 힘들어진다고. 남편의 허전한 자리를 내가 버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세하 없는 세상을 인정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았다. 세하가 웃으면 나도 같이 웃어지고, 세하가 슬퍼하면 나도 같이 슬퍼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다. 그래서 세하가 죽었을 때 내 안의 일부분이 영원히 살아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처음의 나도 세하를 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하나도 신중히 생각해보았다.
그쯤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세하는 죽었는데, 뼛가루가 되어 납골당에 고이 모셔진걸 보았는데도 난 세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세하의 장례식을 치루고 충동적으로 훌쩍 도착했던 별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잊으려고 간 여행에서 오히려 다시 상기시키는 꼴이라니...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아파하면서도 그리워해서 치우지 못하다니...천하의 바보다. 그리고 난 원래부터 그런 바보였다.
처음에는 그냥 막연했다. 그저 세하와 같이 했던 추억이 물건을 통해 투영되어 기억 속에서 엇갈려서 보이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내 마음이 너무 연약해서 세하의 목소리며 모습이 자꾸 아른거리는거라고. 강해져**다고. 슬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평소의 유리, 밝은 유리의 모습을 보여**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버려서. 그러다가 책을 읽던 중 어떤 문구를 발견했다.
-사람이 진정으로 죽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
사람에게 잊혀졌을 때가 진정한 죽음이다. 이 문구를 읽자마자 떠오른 사실이 있었다.
세하는, 아직 죽은게 아니구나.
* * *
주위 사람들은 늘 나에게 말했다. 잊으라고. 세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어쩌겠어? 세하는 아직 완전하게 죽은 게 아닌데.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심지어 재와 먼지 남매에게도 가끔 거론이 되어지는 사람인데, 아직 완전하게 죽은 게 아니다.
하루는 이 이야기를 슬비에게 했다. 슬비의 당황스러워보이는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슬비는 한참 후에야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유리 네 생각이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데로 해. 하지만...
-하지만...?
-난 널 이해해. 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좋게 보인다는 자신은 없어.
이 사실은 나도 동의했다. 제이 아저씨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멍하니 있기만 해도 제이 아저씨는 나한테 무리하게 말을 걸려고 하는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내가 세하 이야기를 꺼내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아직도 슬픔에 빠져나오지 못한 가여운 미망인처럼 본다.
웃기지만, 진짜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난 그런 슬픔이라는 감정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내가 살아있기에 이렇게 아파하고 고민을 하는구나. 그리고 진심으로 세하를 사랑했구나.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밝은 서유리의 모습으로 돌아가야했다. 그렇기에 열심히 연기를 했다. 그래서 아까 제이 아저씨가 나보고 우냐는 질문에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인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얼추 모든 사람들이 알던 '서유리' 로 돌아가기는 했다. 물론 예전의 '서유리' 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울적해지는 감정을 억지로 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에 '살아있음' 을 자각한다는 것. 나와 '네' 가 살아있음을 알고 감사해한다는 걸.
그래도 말이다. 이렇게 쓸쓸한 가을날에 문득...
* * *
네가 너무나 보고싶어, 세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