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6)

수지퓨전콘서트 2016-04-26 3


아아, 진짜!

바보에 멍청이, 희대의 둔탱이!

여기까지 말해줬는데도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천연 지골로인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모르면, 혹시 나한테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건가 고민하게 된다.


설마, 진짜로 그건 아니지?

응, 아닐 거야.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하자, 눈물이 절로 나오려고 했다.

 

“어라? 이슬비, 너 우냐?”

“안 울어!”

“우왁! 아니면 아니라고 하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

“뭐야, 또 왜 말이 없어졌어?”

“저기,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한 여덟 번 정도만 때려도 될까?”

“묘하게 구체적인 숫자네! 그보다 베개 던진 걸로는 모자란 거야?!”

“모자라!”

“단정 지었어?!”

 

소녀의 마음을 농락한 죄는 여덟 번은 죽어야 마땅해!


아니, 사실 여덟 번도 모자라다.

 

“그보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

“아아, 좀 나아진 것 같네. 좋은 난로가 있었으니까 말이지..”

“너 진짜……! 사람을 난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지!”

“알겠어. 그러니까 겨울에도 잘 부탁한다. 종종 애용할게.”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잖아!”

 

겨울에도 잘 부탁한다, 라…….

나중에 겨울에도 와서 자고 가도 된다는 뜻이려나…….

그보다 난로로 애용한다니, 날 데리고 다니겠다는 말이지?

응, 사실 나도 아닌 거 알아.

아무 의미 없이 뱉은 말인 거 아는데, 그냥 두근거려서 그랬어.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말하지 말란 말이야……!

 

나와 세하가 거실에서 티격태격하고 있자, 안방에서 어머님이 문을 열고 나오셨다.

아직 피곤하신 건지, 하품을 한 번 하시고는 눈을 비비시다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우릴 보시고는 묘하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며 놀리듯이 말씀하셨다.

 

“아침부터 사이좋네~ 이 넓은 거실에서 그렇게 딱 붙어있을 필요가 있니~?”

“윽……!”

 

어머님의 말을 듣자마자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세하의 셔츠 목덜미를 붙잡고 다시 앉혔다.

치, 그렇게 나랑 오해받는 게 싫은가.

    

“에잇.”

“방금 나 왜 맞은 거야?! 아니, 그보다 왜 때린 거야?!”

“바보야, 똑같은 말이잖아.”

“아, 그러네…… 아니, 왜 때렸냐고!”

“앞으로 일곱 번 남았어.”

“진짜 여덟 번 때리는 거야?!”

 

진짜다.

 

“에잇, 에잇.”

“아니, 적어도 내가 왜 맞는지는 알려주고 때려!”

“어머, 우리 세하, 알려주면 기꺼이 맞겠다는 거야? 의외로 그쪽 기질이 다분하네~.”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보다 당신, 그게 아들한테 할 소리야?!”

“진짜 왜 맞는지 몰라?”

“알면 물어보겠냐고!”

“그럼 알 때까지 맞아. 에잇.”

 

여덟 대를 모두 때린 후에, 세하가 아직도 자기가 왜 맞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기에 괜히 삐쳐서 몇 대 더 때려줬다.

왜 더 때린 거냐는 질문에, “여덟 대 ‘정도’라고 했지, 여덟 대라고는 안 했잖아?”라고 대답해서 세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사실 다물어진 게 아니라 떡 벌어졌다..

 

“세하야~ 엄마 배고파~.”

“하아……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아침 차릴 테니까.”

“어……? 아침을 네가 차려……?”

 

세하가 아침을 차린다는 말에, 나는 살짝 놀라서 물어봤다.

 

“보시다시피 엄마가 아침에는 저런 상태인지라.”

 

응, 납득.


아직도 졸고 계시는 어머님을 뒤로 하고, 나는 세하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근데, 설마 어머님, 아까 졸면서도 세하한테 딴죽을 거신 거야?

뭐랄까, 역시 알파퀸은 다르구나…….

이런 데에 쓰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자, 뒤를 돌아본 세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도와주게?”

“응. 신세만 지기도 뭐하고.”

“신세라니, 오히려 이쪽이 졌지. 어제도 우리 엄마 억지에 놀아나 주고 말이야.”

“아, 응…….”

“자고 갈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야. 좀 미안하네.”

 

세하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자, 거실에서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니~ 오히려 슬비한테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닐까~?”

“와와와와와와와와!”

“……뭐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다행히 세하는 어머님이 뭐라고 했는지 못 들은 것 같다.


어, 어머님!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시면……!

다, 다음부터는 어머님이 안 계실 때 놀러 와야겠어…….

…………어, 어머님이 안 계실 때…….

……그, 그건 즉…….

 

“하와와와와와와…….”

“진짜 얘는 또 왜 이래…… 그냥 가 있어,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망상으로 소설 시리즈를 쓰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싫어, 나도 도와줄 거야.”

“하아…… 그래라, 그럼. 쌀만 씻어줘. ……씻을 줄 알지?”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나 자취하거든?”

“………자취하는 여자친구라…….”

“어? 뭐라고?”

 

세하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안 들렸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럼 쌀 좀 씻어줘!”

“뭐야…… 알겠어.”

 

갑자기 당황하고 그런대.

쟤도 가만 보면 잘 모르겠단 말이지…….


한동안 말없이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망상으로 팔만대장경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달그락, 하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얼굴이 빨개진 세하가 국자를 떨어트린 모습이 보였다,

 

“왜 그래?”

“아니,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읍?!”

 

뭐, 뭐?!

세하는 황급히 말을 멈췄지만, 이미 중요한 부분은 다 들어버렸다.

그렇구나,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세하의 얼굴은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아마 내 얼굴과 박빙이겠지.

 

“아, 어…….”

“……말을 잘못했어. 그냥 잊어줘…….”

“으음, 응…….”

 

떨어진 국자를 주워서 깨끗하게 씻고, 다시 말없이 요리에 집중했다.

우리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결코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따뜻하고 풋풋한 느낌.


좋네, 이런 분위기.

마치…….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 같네~.”

“어, 엄마?!”

“어머님?! 어, 언제부터……!”

“언제부터냐고 물으면, ‘신혼부부’부터일까.”

 

다 들으신 거네요…….

 

“아, 아침 다 됐으니까 빨리 앉기나 하세요!”

“세하야, 말 돌리려고 하는 거 티 나는데~?”

“앉기나 하세요!”

“쳇, 아들이 반항기야~ 슬비야, 아줌마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네, 네? 그, 글쎄요?”

“아줌마는 참한 며느리 하나 얻어서 빨리 장가보내고 싶은데~ 슬비 생각은 어때~?”

“며, 며, 며느리요?!”

“……엄마, 그걸 왜 이슬비한테 묻는데?”

“아니, 뭐~ 슬비가 아는 애들 중에 누구 참한 애 없을까 해서? 아니면 엄마는 슬비를 며느리 삼아도 상관없는데?”

“나랑 이슬비가 상관있잖아…… 그거, 이슬비한테도 민폐라고.”

“따, 딱히 민폐는…….”

    

 

“게다가 나한테도 민폐야.”

    

 

“……!”

 

“하아, 우리 세하, 또 저질렀네~ 언제쯤이면 여자의 마음을 알까?”

“뭔 소리야? 내가 뭘 저질렀…….”

“나가 죽어, 이 멍청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엔 또 뭔데?!”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후, 슬슬 나도 집에 돌아갈 때가 됐다.

 

“그럼, 이제 갈게.”

“아, 아아…… 잘 가라.”

“응, 나중에 봐.”

 

세하의 집을 뒤로 하고, 나는 우리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분홍빛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봄날 아침 길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슬비!”

“어, 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세하가 뛰어오고 있었다.


뭐지?

내가 뭘 놓고 왔나?

아, 아니면 혹시 나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거나…….

 

“녹음기, 놓고 갔어.”

 

응, 그럴 줄 알았어.

 

“아, 가져다줘서 고마워. 깜빡했네.”

“다음부터는 좀 챙기고 다녀라. 어디 가기 전에 빠진 거 없나 확인 하고.”

“아, 알겠어. 잔소리는…….”

“됐어, 빨리 가자.”

“……어? 어딜 가?”

“어딜 가냐니? 너희 집.”

“어, 어어?!”

 

우, 우리 집?!

 

“우, 우리 집은 왜?! 아,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청소도 안 했고…….”

“뭔 소리야. 데려다 줄 테니까 앞장 서.”

“아, 그, 그런 거였어? 난 또…….”

 

깜짝 놀랐네…….

하긴, 이세하가 나한테 먼저 다가올 리가 없지…….

내가 다가가도 눈치 못 채는 걸.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이세하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출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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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슬비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앞에 걸어가고, 그보다 조금 뒤에 내가 걸어간다.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랄까, 딱 그 정도의 거리다.

지금은 이 정도가 좋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슬비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때가 있다.

    

 

벚꽃은 길거리에 예쁘게 피어있고, 봄바람은 산뜻하게 흘러간다.

따뜻하게 비치는 햇살 때문일까, 앞 쪽에서 걸어가는 이슬비의 뒷모습은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와 이슬비가 같은 보폭으로 걸어서인지, 우리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걸음을 조금씩 빨리 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갔다.

가까워질수록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외면했다.

    

 

이윽고 앞으로 한 걸음.

    

 

“야, 이슬비.”

“어?”

    

 

나는 이슬비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2024-10-24 23:01:1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