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스 외전 : 사람과 짐승 #1 (下)

읭뀨읭 2015-08-25 0

 "아무튼 '저것'은 아직도 상부에서 여러 데이터 수집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무리 차원종이라고 한들 막다루기보다는 이래뵈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어요. 이제 막 부화한지 몇년 안된 상태라 주변 환경이나 대하는 인물에 대해 굉장히 센시티브하게 반응하거든요. 매일 지쳐있는 상태라 크게 티가 안나지만, 그래도 꾸준히 봐온 저는 어느정도 알 수 있어요. 아무튼 이곳의 수많은 연구팀들이 있지만, 이 아이와 접촉한 건 저와 저기 두 요원. 그리고 당신 뿐입니다."

 "굳이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가 있나요?"

 "어쨌든 지성을 가진 생물체로서 학습하는 생명쳅니다. 그런데 이곳 환경이라고 해봐야, 매번 고통을 주는 실험에 연구원들 아니면 클로저부대에다 다소 폐쇠적인 연구소에요. 이런 곳에 오랫동안 속해온 사람은 인정하기 싫지만 사고가 편향적이고 폐쇠적이게 됩니다. 저 아이…아니, '저것'을 대하는 태도가 말이죠. 저도 그렇고 팀내 연구원들도 어쩔 수 없이 '저것'을 연구개체로 대할 수 밖에 없어요. 나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는 결국 그렇게 대하게 됩니다. 그건 저기 클로저요원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니까 대충 이대로 연구와 실험이 계속되는데 개체의 사고와 인지능력 상승으로 자존감이 생길 경우 '인간이 과연 나의 부모인가.'에 대해 의심을하게 되고, 결국 어느 순간 폭발할때가 올것이니 니가 그런 부분을 케어해라. 뭐 그런건가. 

 

 "네. 맞아요."

 

 혼자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혼잣말을 해버린 모양이다.

 그녀가 한쪽 어깨에 팔을 올리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조직생활 오래한 적없는 사회부적응자! 사상적 가치 편중이 미약함! 그에따라 사회적으로 어필되는 능력이나 지위 역시 없음!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견지. 사회현상에대해 이런 저런 불만을 가진 그냥 조금 유식한 정도의 인물상. 거기에 무엇보다 얼마전까지 민간인!"

 "…아, 결국 몰개성때문에 뽑혀온 겁니까?"

 

 씁쓸함에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런 그녀는 나를 보자 재미있는 듯 작게 쿡쿡거리며 밝게 대답한다

 

 "천만에요. 그래도 결국 교사 경력이 없었으면 안뽑혔을 거에요. 아시겠죠? 이선씨. 당신은 저 아이의 교관으로 선임되신 거에요."

 "교관이라고 해도…."

 "딱 꼬집어서 이거해라 저거해라 막 그런 건 아닌데 일단 1차 목표는 말로 어느정도 의사표현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네요."

 "아, 말을 못해요?"

 "네. 방에서 혼자 있을 때 혼자서 말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거 같아보였지만요. 소통이 불가능해선지 몰라도 사람이 말을 주고 받으며 흐르는 작은 감정들에게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더라고요."

 "그래서 접촉 인원을 최소화시켰군요."

 "네. 스스로도 어느정도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 답답해하는 것도 같았구요. 하는 김에 어느정도 일반상식도 가르쳐주셨으면 해요."

 "뭔가 점점 불어나네요."

 "요는 사람 사이에 섞여들어도 의심받지 않게 해달라는 거에요."

 

 결국 어찌됐건 전술병기로서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없이 섞일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라는 말이었다. 바뀐 것은 주인이 상위개체의 차원종에서 인간으로 변한 것뿐. 이 아이의 운명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앞으로 인솔은 이선씨가 해주세요. 그날그날 스케쥴은 까치가 알려줄거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드론 하나가 날아와 내 정면에서 멈춰섰다. 까만색 동체에 앞쪽에 박힌 붉은색의 스캐너. 아래쪽에는 접이식 홀로그램 모니터가 달려있었는데, 일부로 이 부분만 흰색 바탕으로 해둔게 정말 까치를 연상케했다.

 

 "다목적 정찰 드론 초기모델인데, 바로 상위호환 모델 뻐꾸기 초안이 그대로 통과되면서 현재는 벌쳐스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구식 모델이죠."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 건가요?"

 "중량을 줄이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후의 변화에 맞게 대처하는 프로세스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됐어요. 그래서 악천후에는 활동을 못하죠. 그래서 이것을 고치는 과정 중 비단 프로세스 문제만은 아니라 동체 구조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요. 해서 아예 새로운 모델이 개발된 거죠. 그 신형이 뻐꾸기인데 곧 테스트 타입이 나올 예정이에요."

 "탁란의 습성이 있는 뻐꾸기라는 작명이 굉장히 어울리네요."

 

 뭔가 기계지만 묘하게 까치가 불쌍해보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튼 까치를 통해서 스케쥴 확인하시고 각 연구실로 인솔하시면 되겠습니다. 뭐,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거진 위상력 추출이 대부분이라 프리하시겠지만요."

 "인솔 이후 그 동안 저는 뭘 합니까?"

 "시설 유지 및 보수로 응시하셨다면서요?"

 "…."

 

 결국 뽑아먹을 건 다 뽑아먹겠다는 심보다. 

 

 "아, 첫 보고서는 이번달 말일에 제출해주세요. 이것과는 별도로 저희 연구팀에서 올려야하는 보고서 역시 이번달 말일에 제출하니 꼭 지켜주셔야해요. 초기라서 윗선들도 아직까지 그렇게 큰 기대는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부담갖지 마시고요. 오늘은 푹 쉬세요."

 

 이지혜씨는 그렇게 말하곤 자기 옆에 가운 한쪽을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소녀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나에게 턱짓했다. 소녀는 그 행동에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나에게 조심스럽게 걸어와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얼굴을 기억해두기라도 하려는 걸까. 소녀의 시선은 곧 까치로 향했다. 뒷짐을 지곤 여기저기 연신 둘러보더니 센서 부분들 쓰다듬다가 껴안아든다. 

 

 "얼마전 조류에 관한 그림책을 보여줬었는데, 까치를 '조류'로 인식한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한 이지혜씨는 지금까지 봤던 미소 중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앞으로의 연락은 까치를 통해서 할게요. 까치는 이후 비행모드로 기동하는 경우 원격모드로 조작하고 있다는 뜻이니 그때는 가급적이면 성적인 행위는 금지해주시고요."

 "그런 짓 안합니다!"

 "으하핫! 농담이에요, 농담! 반응이 재미있어서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놀리게 되네요."

 "반은 진담이겠죠."

 "아!"

 

 그녀가 무언가를 잊은 듯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네모난 뭔가를 건냈다.

 

 "음? 비타…"

 

 민c로 보이는 것 같았으나 **이었다. 그것들 받아든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 움켜쥐었다.

 

 "이봐요! 정말 이러…."

 

 **을 던져버리며 나름 진지하게 화를 내려할때는 이미 한쪽 배를 잡고 킥킥거리며 멀어지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저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화를 내려는 쪽이 오히려 미안해진다.

 

 

 "힘내세요. 윗선과 팀원들은 몰라도 전 꽤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

 "끄응."

 

 이지혜씨는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잘부탁한다는 식으로 손을 흔들더니 돌아서서 걸어나간다.

 같이 따라왔던 클로저 요원들 중 날 보는 한명의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좀 쫄기는 했지만, 모퉁이를 돌기 직전 이지혜씨가 "빨리 오세요."라고 불러준 탓에 쏘아보던 클로저도 사라졌다.

 

 하얀 연구실 복도에 까치와 나와 소녀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단 소녀가 상당히 지쳐보이기에 쉬게 해주고 싶어서 방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면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문 앞까지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 잡아본 차원종 소녀의 온기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사람과 신체구조가 똑같다고 했으니 심장도 뛰고 있을 것이다. 붉은 피가 흐르고 우리가 보는 풍경을 소녀도 본다.

 그럼에도 이 소녀가 차원종이라면 이 차원종과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소녀가 만약 완벽하게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인간. 소녀는 차원종.'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더욱이 난생신화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난생이라하면 오히려 신성시 여겨야하는 게 아닐까.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지만,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멈췄다.

 그 전에 그들도 이 소녀의 손을 한번이라도 잡아봤을까.

 자연스럽게 눈이 소녀에게 향했다. 조금은 보라색을 띠는 소녀의 눈과 마주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느낀 온기에 모두가 소녀를 실험체, 차원종 취급하는 이곳에서 적어도 나만큼은 사람처럼 대우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너랑 내 방이다. 눈치 볼 것 없이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했으니, 마음은 전해졌으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일단 입구까지 들여놓고 인증키를 바로 좌측 딱 맞게 파인 홈에 꽂았다.

 바로 전등이 켜지며 방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다. 좀 더 걸어들어간 방 내부는 생각보다 그냥 평범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실험개체가 머무는 방이라 상당히 무미건조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나를 위한 사무용 책상과 컴퓨터 외에 탁자형 책상이라던지 여분의 스탠드나 몇몇 그림책을 제외하면 텅텅 비어있는 책장도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건 2인용 침대였지만, 어자피 그 부분이야 바닥에서 내가 자면 그만이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다시 들어왔다.

 다시 불이 꺼진다.

 그러기를 반복.

 

 그 와중에 내가 인증키를 꽂았더니 불이 들어오는 게 신기했나보다. 입구 바로 옆에 꽂아둔 인증키를 뺐다 꽂았다 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 일단 방에 앉혀두고 소녀가 호기심을 가졌을 때 위험할만한 것들을 추려내 어떻게든 위험함을 어필해야겠다고 생각해 입구로 갔다.

 

 "…."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신발 한짝을 내밀었다. 남은 한 손으론 코를 틀어막으면서.

 결국 방에서 내가 가장 먼저 소녀를 위해 취한 행동은 아이러니하게도 발을 씻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은 조금 뒤였다.

 발을 씻는 김에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근데 욕실 입구에서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열려다가 부끄러운 듯 다시 입을 닫은 소녀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나를 놔두고 눈앞에서 너무도 털털하게 상의를 벗었다.

 

 "──────────!!"

 

 욕실에서 한 남자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때는 소녀가 하의를 내린 직후였다.

 그 후 놀라서 잔뜩 움츠려든 소녀를 간신히 달래고 우여곡절 끝에 어찌어찌 샤워를 마친 소녀와 탁자를 앞에두고 마주 앉았다. 내 상상 이상으로 상식이라곤 없는 아이였다. 아니,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소녀의 입장에서는 나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상하게 느꼈겠지. 차원종이면서 실험체로 다루어졌지, 여성으로서 다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차원종의 암컷으로서 다루어졌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그래도 이지혜씨가 이종교배니 뭐니 농담반진담반 이야기를 했지만, 딱 한번 '이 아이'라고 말했을 때 따뜻함이 느껴졌던 것으로 보아서는 어쨌든 선을 넘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왔던 모양이다. 이미 강을 건넌 김에 소녀를 대상으로 행해진 실험데이터를 요구해봐야할 것 같지만 당장 눈앞에 문제를 어떻게든 처리해야했다.

 

 "…."

 "…." 

 

 모르는 것도 아는 게 있어야 물어보는 법이다. 다행이라면 소녀 스스로가 지식이라는 것에 목이 말라있다는 것이나 그것도 일단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알려줄텐데….

 뭐, 보다시피. 서로 그냥 아무말 없이 바라만 보는 처지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위해서는 몸짓이 아닌 언어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과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전달해야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야했지만 망막에 탁본이라도 뜬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소녀의 바디라인을 잊기위해 머릿속에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있었으니, 진전이 있을 리가 없다. 

 한심하게 그렇게 서로 마주 앉은 상태로 10분의 시간동안 간신히 잡념과 싸우고 있을 때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든 소녀를 보고서야 잡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고꾸라지길 여러번이었던 걸 기억해냈다. 일반인으로서 위상력을 추출해내는 것이 어떤 고통을 유발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면 거기에는 정신적인 피로도 동반된다. 많이 피곤할 것이다. 앉은 상태 그대로 고꾸라져서 잠은 소녀를 안아들어 침대에 눕히고, 바닥에 따로 이불을 깔아 내 잠자리를 만든 후 자기 전에 내 책상으로 향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 노트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간단한 단어나 제스처와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의사표현 용어들을 적어내려갔다.

 

***

 

 삐삑-

 소등이 시작되어 약간은 어둑어둑한 연구소 복도를 걸어가던 한 여인의 가운 안주머니에서 작은 교신음과 함께 진동이 울린다. 손 안에 딱 잡힐만한 크기의 큐브모양인 이 기기는 치프 혹은 간부급에게만 주어지는 통신장비로 통신 거리에 한계가 있어서 국지적으로 쓰이는 장비 중 하나다. 기기의 윗면을 보고 어디서 온 연락인지 확인한 그녀는 "쯧-."하고 혀를 한번 찼다. 하지만 이내 "음음-"하고 목을 한번 풀어주곤 큐브에  소형 마이크와 이어폰을 연결해 큐브 단면을 엄지로 한번 슥 문질렀다.

 

 "네. 제 2팀, 팀장. 이지혭니다."

 

 그녀는 뒤따라오던 처리부대원에게 거리를 두라는 손짓을 하고선 바로 가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당연히 사내에선 금연이기때문에 전자담배인 것이 짜증났지만 어쩔 수 없다. 미간을 좁히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실험체에 딱히 특별한 반응이나 행동은 보이지않았습니다. 이 건에 대해서는 저한테 맡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침 정기보고서에 같이 그와 관련해서 올라갈 예정입니다. 그것보다는 현재 난항을 겪고 있는………. 네. 정확히 말하면 '그릇'들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주입하고나서 제 2 위상력임에도 불구하고 응집하려는 특징때문에 발생하는 차원압에 몸이 붕괴하거나 강한 고통으로 미쳐버리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참아낸다고 해도 거의 불구상태의…네. 일반 죄수들보다는 좀 더 고급의 실험체 샘플들이 필요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통신이 끝나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어자피 이미 이곳에 윤리관따윈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곳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그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저 나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그렇게 **하면 그만이다. 맛도 없는 전자담배를 입으로 가져간다.

 

 "정말 맛 없네."

 

 마침 정면에 쓰레기통이 존재했다. 대충 휙 하고 집어던진 그녀의 전자담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에 부딪혀 튕겨나와 바닥을 굴렀다.

 

***

 

  아침에 일어나 조금은 서먹해진 소녀를 어제 만났던 그 연구실로 바래다줬다. 어제와 다른 점이라면 내부로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나와 소녀의 방은 다른 연구원들 거주구역과 상당히 격리되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했기때문에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방으로 돌아와 바로 이지혜씨에게 각종 프로젝트에 대한 열람 권한을 적어도 연구원들 수준으로 높혀달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또 소녀의 교육을 위해 반드시! 반드시! 서점에서 직접 책을 골라야하며, 이것의 필요성에 대해 a4 3페이지로 정리해 보냈다. 답장이 온 것은 막 식당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바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문 앞에는 [제 6 연구소 소장 이지혜]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팀장으로 알고 있는데 소장이라니.

 

 "아, 오셨군요."

 "아…네. 근데 팀장. 치프라고 소개하시지 않았어요?"

 "현재는 공석이라서 임시직이에요. 공식적으로는 아직 승진을 못해서 팀장이 맞습니다."

 "승진은 일단 결정난 거에요?"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잘 풀리면요. 읏~아!" 

 

 팔을 뒤로 깍지껴서 기지개를 켠 후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자 들어갈까요?"하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아, 저…."

 "네?"

 "아, 아닙니다."

 

 소장이 왜 공석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란 느낌이 왔기에 그냥 말 없이 따라 들어갔다. 개인실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출입하는 환경탓인지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사무용 방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좀 넓고 상당히 거대한 벽걸이 스크린과 이빨 빠진 책장들과 그 책장의 이빨들이 테이블이며 바닥이며 할 거 없이 어지럽게 퍼질러져 있었다.

 그런 거에 개의치 않고 이지혜씨는 "말씀하신 것들 말인데요."하고 운을 때더니 시큰둥하게 모니터를 한번 훑고선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걸 추천했다. 하지만 본래 책이라는 건 직접 서점에가서 훑어보고 결정해**다는 것이 지론이라 그것에 대해 한번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

 

 "음…. 좋아요. 대신 후회하기 없기에요?"

 

 이지혜씨는 곧바로 외출증을 작성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총총걸음으로 팩스로 다가갔다. 그 이후 바로 자리에 앉아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하더니 "음. 좋아."라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들어온지 얼마 안된 신참의 경우엔 인솔자가 반드시 동행해야하거든요. 마침 마실도 나가고 싶었고 딱 좋네요. 생각해보니 밖에서 해야하는 일도 있었는데 만나야하는 사람이 시간도 된다하니. 오늘 우리팀은 아직 그릇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그것'의 위상력 추출 작업을 마치면 프리하거든요."

 

 그 후 아주 간단하게 윗선에서 승인이 떨어지고 '바깥'의 연구소로 올라가기 전 검문소에 도착한 나는 후회하지 말라고 했던 이지혜씨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됐다. 바로 쵸커의 이상유무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약 5분의 시간동안 고문을 당했다. 출력에 따라서 단계별로 진행했는데 중간쯤부터는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지 기억이 없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얼굴을 봤던 것도 같은데, 그냥 정신이 들었을 때는 심한 기침과 함께 침을 흘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러니까 외출하는 사람들이 없었구나!'

 

 그 후 5분가량을 다시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을 지켜봐야했다.

 아직 풋내기 신참에 정식 연구원으로서 발탁된 사람이 아니라서 우리 연구소의 많은 기밀사항들을 몰랐지만, 내가 교관을 맡은 소녀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하이레벨. 소녀에 대한 표면적인 지식만 놓고 봐도 기업레벨이 아니었다. 이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지만, 결국 밖에 나가서 떠벌리면 그만 아닌가?

 

 "그거 알고 있어요? 쵸커에는 도청기능이 자동으로 탑재되있어서 외출 시엔 기밀과 관련된 단어를 발설할 경우 상관에게 알람이 울리도록 설계됐어요. 당신 같은 경우엔 저에게 알람이 오고, 저의 경우엔 제 위에 있는 연구소장과 간부급들에게 말이에요. 물론 연구소장은 현재 공석이니 간부들에게만 알람이 울리겠죠?"

 "………사행활 침해 아닌지."

 

 사회는 내 생각보다 무르지 않았다.

 

 "보통은 이 경우 알람이 울린 뒤 상관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쵸커가 작동하고 상관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않으면 대상을 죽기 직전까지 차원압을 가하는 것으로 발설을 최대한 막아왔지만, 최근 이 방법이 그다지 효울적이지 못하다는 걸 윗선에서 인지했어요."

 "그거 참 다행이네요."

 "나름 벌쳐스에서 가려낸 인재들인데, 아깝다고 생각한 거죠."

 "근데 쵸커엔 살상능력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살상능력은 없죠. 뇌사상태까지는 그래도 가능해요."

 

 차라리 죽는 게 더 좋겠다 싶었다.

 

 "아무튼 그래서 현재 저희 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기억 소거 장치죠."

 "…네? 기억 뭐요?"

 "기억 소거 장치요."

 "그거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치료 목적으로 유니온 쪽에서 개발 및 보급이 이루어지다가…."

 "네. PTSD가 특히 심한 클로저들을 중심으로 사용되야할 기기가 중대한 결함으로 민간병원에게 보급됐다가 2달만에 루머와 함께 폐기됐죠."

 

 특정한 기억만을 꼬집어서 소거시키지 못하고, 치료하는 시점으로부터 치료하고자 하는 시점까지 모두 지워버린다. 더욱이 PTSD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클로저들에겐 위상력의 간섭으로 치료가 불가능했다. 결국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지다가 인터넷에 어떤 루머가 퍼진 직후 조용히 사라졌다.

 

 "기억 소거 장치를 통해서 일부 기업병원과 대학병원에서 통원치료를 요구 후 악질적인 성매매 행위가 자행되고 있다던 내용이었던가요. 고위 인사나 연예인을 상대로 상품화하니 뭐니 하는데 내용이 상당히 판타지해서 오히려 사실적이게 느껴졌죠. 수백명의 정치관료들과 유명 연예인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해서 상당히 호러블 했고요."

 "네. 결국 루머는 아니었지만요."

 "그쵸. 루머는 아니었죠."

 "……."

 "…………?"

 

 ……………?

 삑-삑- 

 벙 찐 나를 두고 주차장에서 차를 찾아 걸어가는 이지혜씨를 서둘러 뒤따랐다. 내가 잘못말한 부분을 정정하고, 내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그게 루머가 아니라고요?"

 "글쎄요. 어떨까요."

 

 그녀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기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남기더니 운전적에 앉는다. 나는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다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안탈거에요?"라고 고개를 내밀어 외치는 그녀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어 차에 탑승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상당히 능숙하게 주차창을 빠져나가, 차량용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원하는 서점은 딱히 없죠?"

 "뭐, 그렇습니다. 그냥 어느정도 규모가 컸으면 좋겠네요."

 "그럼 시간의 광장으로 갈게요."

 "네? 영등포까지 가요?"

 "네. 유니온에서 영향력있던 과학자에게 물건 받으러 갑니다. 현재는 유니온측에서 잡으려는 탈옥수지만요."

 "…잠깐만요."

 "네."

 "탈옥수라고요?"

 "네. 현재는 비밀리에 벌처스가 지원하고 있어요."

 "이런 거 함부러 발설하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만해도 연구원과 동급의 기밀열람 권한을 요구하신 건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요."

 "아니, 그건 그런데…."

 

 사고회로가 엉켰다. 

 

 "해서 그 사람이 현재 '그것'의 쵸커를 혼자서 담당하고 있어요."

 "아, 쵸커도 유니온측에서 그 사람이 만든거에요?"

 "네. 표면적인 용도는 차원종 생포용이었지만, 출력이 차원종을 생포하기엔 택도 없죠. 별로 알려드리고 싶은 부분은 아닌데…."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서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연구소 밖을 나와서 보는 풍경은 상당히 놀라웠다. 연구소만 덜렁 있는 곳이 아니라 군수공장까지 딸려있는 모양인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연구소 이외에도 크고 작은 건물들과 운송용 차량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보였던 까치들도 몇기가 날아다니는 걸 보면 외부도 아침부터 상당히 바쁜 모양이다. 

 저 멀리 확실하지는 않지만 비행기도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도 있는 것 같아보였다.

 

 "아, 연구소 외부를 보는 건 처음이시죠?"

 "네. 납치당한 형태로 오다보니 주변을 구경할 틈도 없었거든요."

 "표면적으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클로저들이 사용하는 코어, 실드, 모듈을 연구 및 개발, 생산하는 최신식 대차원종 민간 군수공업 단지에요. 어제 말했던 까치라던지 뻐꾸기도 현재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기도 하죠. 3개월마다 유니온 1선 수송팀이 와서 받아가기로 예정된 곳이라 외부사람은 물론이고 내부사람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아! 이제 곧 밖이에요. 가급적이면 말을 아끼세요. 앞으로는 저도 이선씨를 사무적으로 대할 겁니다."

 

 그 뒤로는 별 다른 대화없이 영등포에 도착해 시간의 광장으로 향했다. 도착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놀이공원을 연상케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다. 보통 과학자라고하면 조용하고 사람이 적은 곳이나 혹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이지혜씨는 한손으로 턱을 받치곤 남은 한 손으론 매끈한 검은색 큐브를 이리저리 굴려보더니 꽤나 심각한 얼굴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요?"

 "음. 아닙니다. 기계가 살짝 고장난 거 같네요. 꽤 오랫동안 정비를 맡기지 않았는데, 오늘 외부쪽에 한번 맡겨야할 거 같아요."

  

 잠깐 스치듯이 본 큐브의 겉면에는 어떤 수치를 비교하고 있는 듯 했다.

 

 "아무튼 이 길로 원하는 책을 구입하시고 이곳에서 만나죠. 사람 북적북적한 광장에서 만나느니 그냥 차 앞에서 만나는 게 좋겠네요. 저는 물건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니 오히려 제가 먼저 기다릴 수도 있겠군요."

 "…기다리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지혜씨는 그렇게 대답한 나를 향해 한번 씽긋 웃어보이더니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그 직후 나 역시도 서둘러 쇼핑몰 내부에 위치한 루이즈&바디로 발걸음을 바삐했다. 들어오자마자 상쾌한 공기가 머리를 맑게 정화시켜줬다. 낡은 서점 특유의 종이냄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서점 특유의 청량감있는 냄새를 좋아했다.

 유아용 코너를 지나는 길. 눈을 어지럽히는 여러 분야의 책들이 눈에 밟혔고, 나는 그 유혹에 끝내 이기지 못했다.

 

 "응?"

 

 그렇게 책에 취하는 건 오래가지 않았다. 발 밑에서 전해지는 진동은 서서히 몸을 타고 올라와 모든 피부에서 무언가가 떨리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서점 내부에 사람들은 각자 책을 살피거나 같이 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느꼈던 진동은 사라졌다.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너무 예민해진 탓일까. 시간의 광장에 들어서기 전 느꼈던 찝찝함도 그렇고 서둘러 책을 골라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지혜씨를 만난 것은 막 책을 사들고 루이즈&바디를 나가려던 입구에서 였다. 한 손에는 없던 철제 서류가방이 들려있었다. 그걸 난폭하게 나에게 떠밀고는 다짜고짜 넥타이를 잡아 사람들 끌고 갔다.

 

 "어. 볼일은…어? 자, 잠깐만요."

 "서둘러요.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굉장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다짜고짜 내 빈손을 잡아끌어 사람들 사이를 난폭하게 헤치고 나아갔다. 이유라도 알고 싶었지만, 얼굴로 봐서는 상당히 급해보였기때문에 나중에 듣기로 하고 끌려가줬다. 출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그때 또 다시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 혼자만 느낀 건 아닌 듯. 마치 시간이라도 정지한 것처럼 광장 일대의 사람들이 전부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이지혜씨도 마찬가지였다.

 

 지지직- 치직-

 

 시간의 광장 서관. 중앙의 거대한 홀 천장 바로 아래쪽에서 난대없이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하며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내 몸이 다시 거칠게 당겨진 것은 그 직후였다. 그에 맞춰 나도 발을 움직였다. 내가 얼굴을 돌릴때 쯤에는 이미 내 눈에 그 차원종이라고 불리우는 생물체의 두상이 각인된 뒤였기때문이다. 자세한 건 몰랐지만 강한 위기의식이 나를 덮쳤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 현상을 지켜볼 때 이지혜씨를 따라 빠르게 질주했다. 서관을 빠져나가려면 아직 한참을 더 달려**다.

 

 "꺄아아아아아악!"

 

 그로부터 조금 뒤 우리가 막 출구에 도달했을 때 바로 앞에서 피가 튀었다. 남자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흰색 토끼인형이 붉게 물들어갔다. 한 남자의 몸에 말 그대로 바람 구멍이 나면서 내 쪽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나도 모르게 손으로 밀쳐냈다. 남자의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쇼핑가방이 바닥을 구르며 내용물을 토해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봤다.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그냥 그 상태로 달렸다.

 요란한 경보음에 정신이 깼다. 반대편 차선에서 특경대 차량들이 길게 이어졌다.

 너무도 긴장해서 참아왔던 숨을 그때서야 쉬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아파오고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쵸커로 당했을 때처럼. 하지만 목에 느껴지는 압박감은 없었다. 망막에 몸에 구멍이 뚤려서 쓰러지던 남자의 눈이 생각났다. 구역질이 나오려했는데 때마침 이지혜씨가 차를 세워주고 옆쪽 건물에 턱짓을 했다.

 

 "뭐죠?"

 

 변기를 부여잡고 끔찍한 광경과 함께 속을 비워내고 다시 연구소로 향하는 길.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차원종이요. 잠깐 보인 두상으로 보면 보이드 타입일 가능성이 가장 높네요."

 "아니요.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어째서 저기에 차원종이 나타났느냐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의 왕래가 굉장히 높은, 예를 들어 시간의 광장 같은 곳은 차원종이 나타날 경우 인명피해가 크게 발생할 수 있기에 따로 정부에서 위상력 억제기를 설치해둔다. 더욱이 그러한 점을 광고한 쇼핑몰이 시간의 광장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 차원종이 출몰했다.

 그 부분에대해 이지혜씨는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의 행동력이었다.

 

 "…최초로 도착했을 당시 주변의 위상변곡률 수치가 불안정했거든요. 사실 그 주변은 이선씨도 아시겠지만 대대적으로 위상력 억제기를 다수 설치한 쇼핑몰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위상변곡률이 상승하는 걸 억제기가 낮추면서 마치 싸우는 것처럼 보여졌는데, 그것도 아주 잠깐동안 일어난 일이라 기기 오작동인 줄 알고 넘어갔어요."

 "그 위상변곡률이라는 게 상승하면 뭐 안좋은 일이라도 일어나나요?"

 "차원문이 열리고 차원종이 넘어오는 거죠. 그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그 에너지에 사람들이 노출되면 가끔 특수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 특수한 일이 바로…."

 "'클로저'군요."

 "네."

 "아무튼 기기 오작동인 줄 알고 넘어갔는데, 물건을 주러 직접 나온게 아니라 알고보니 그냥 쇼핑몰 보관함에 떡하니 맡겨뒀더라고요. 듣기로는 상당한 괴짜라 그러려니 하고 보관함을 열었더니 가방 위에 이런 쪽지가 서류 가방 위에 놓여있었어요."

 

 가운 주머지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뭉치를 나에게 던져줬다. 조심스럽게 펼친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이제 이세계의 데미우르고스가 된다. 이것은 그 시작이자, 끝이 되리니…. '

 

 나도 모르게 쪽지를 힘껏 꾸겨버렸다. 

 

 "…이 사람 나이가 어찌됩니까."

 "글쎄요.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혹시라도 동갑이라거나 비슷한 연배라면, 으……."

 

 이지혜씨는 상상만해도 싫은 지 인상을 잔득 쓰면서 몸을 살짝 떨었다.

 

 "아무튼 그리고 난 뒤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가방을 열었는데 그 순간 위상변곡률이 위상력 억제기를 무시하고 상승하기 시작했죠. 그대로라면 차원문이 안열리면 이상하거든요. 그래서 빠르게 당신을 찾으러 갔구요. 그 뒤론 뭐 겪은 그대로 입니다. 저도 자세한 일은 몰라요. 이건 정말이에요. 당신을 찾아가면서 상부에 연락을 했더니, 이미 그 과학자는 행적이 묘연하다고 하더라고요."

 "……."

 

 그 뒤로 조용해진 차 안. 노을진 하늘이 푸른석 대리석 바닥에 번져가는 피처럼 느껴졌다.

 내가 밀쳐냈던 남자가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린다. 출구를 등지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는 뜻은 곧 그 혼란의 상황 속에서 누구를 찾고 있었다는 말이다. 옆구리에 낀 토끼인형과 바닥을 굴렀던 쇼핑가방의 내용물은 인형이었다. 그 남자는 아마도 딸아이를 위해 같이 쇼핑을 왔다가 딸아이를 잃어버리고 차원종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 찰나의 숨이 붙어있어 나에게 손을 뻗으며 고꾸라지는 남자의 몸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봐요. 당신이 그런 일을 벌인게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돌아가서 당신이 책임지기라도 할래요? 아니면 가서 같이 죽어주기라도 할래요? 정신차려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 법이에요. 당신과 무관계한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해줄 수는 있지만, 그것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요."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도착한 연구소. 그 내부로 내려가는 길. 

 죽어서 지옥으로 내려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2024-10-24 22:38: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