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플레인의 수문장 - 上
브로유리 2015-07-30 3
“선대의 용들이시여…. 이제 이 자랑스러운 군단도… 여기까지라는 것입니까…!”
황량하기 짝이 없는 데미플레인. 데미플레인은 본래 군단의 병사들 이외의 생명체를 쉬이 찾을 수 없는 대지라 황량하다는 말은 새삼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그 말 이외에 이 땅의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대지를 뒤덮고 있는 죽음의 공기. 그리고 도처에 널려 있는 뱀들의 사체. 뱀들은 인간처럼 얼굴에 표정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뒤틀려 버린 몸뚱이와 가슴팍에 선명히 드러나는 자해의 흔적들이 그들이 얼마나 큰 괴로움 속에서 죽어갔는지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죽음의 중심에 4m 정도의 대형 차원종이 황망히 서있었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알기란 쉽지 않으련만 늘 위쪽을 향해 빳빳이 들었던, 그러나 지금은 바닥을 향해 맥없이 짚어놓은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손도끼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이것이…! 제대로 싸워**도 못하고…! 우리들의 영지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이것이 이 군단의 최후란 말입니까…!”
덧없이 울려 퍼지는 공허한 외침. 그러나 이에 답해줄 이는 하나도 없어, 그 외침은 무한히 뻗어나가며 사라져갔다. 도대체, 그 막강한 힘으로 군단 제일이라 손꼽히던 용의 군단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도끼를 고쳐 쥐어 높이 치켜들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쿠-웅.
데미플레인을 들썩이게 하는 거대한 진동. 마치 잔잔한 호수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돌을 던진 것처럼 땅이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역시 호수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동은 서서히 옅어졌고 곧 대지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 정적을 거대한 기침 소리가 깨부쉈다.
“쿨럭… 크, 크허…억…! 이젠… 내 분신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단 말인가….”
도끼를 한 번 크게 내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지 용의 군단의 수문장, 인간들이 안드라스라고 부르는 뱀은 다시 도끼를 짚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간악한 여자가 뿌려놓은 독가스가 점점 더 짙어진 탓이었다. 아니, 이미 짙어질 때로 짙어진 독가스의 독성이 이제야 자기에게 먹혀든 것이리라. 이미 다른 동족들은 독가스에 의해 명을 달리한지 오래였다. 그가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용과 함께 데미플레인을 지탱하는, 용과 이 영지를 수호하는 수문장으로서 다른 동족들보다 더욱 강인한 힘을 부여받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수문장으로 선택받은 것을, 난생 처음으로 괴로워했다.
용을 지키지 못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괴로웠고,
용의 군단의 최후의 생존자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으며,
용의 군단의 수문장으로서 군단을 지킨다는 사명을 이룰 수 없는 이 상황이 괴로웠다.
간악한 여자에 의해 자신들의 영지에 독가스가 살포되자, 새로운 용은 군단을 위해 인간들의 영토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선대 용의, 그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불경하기 짝이 없으나, 실패로 인해 군단의 힘은 크게 약화되어 있어 침공이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설령 침공이 성공한다고 해도, 영토를 수복하러 쳐들어올 인간들의 공세까지 막아낼 힘은 군단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선대 용의 또 다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불경하기 짝이 없으나, 실책으로 인하여 용의 군단은 다른 군단들로부터도 외면 받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군단들은 선대 용의 독단을 용납하지 않았다. 새로운 용이 다른 군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한 번 방침을 어긴 군단을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용의 군단에게 남은 길은 인간들의 영토를 침공하는 것뿐이었다. 남은 용들은 모든 힘을 짜내어 필사적으로 인간들의 영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지상 침공군은 인간들에 의해 패배했고 심지어 용마저도 인간들에 의해 쓰러졌다. 그기에 인간의 차원과 연결되어있던 차원문도 인간들에 의해 닫혀버려 데미플레인은 완전히 고립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용과 영토, 그리고 군단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용을 보필하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강했고, 선대의 용과 최후의 용은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데미플레인은 독가스로 가득 찬 채로 고립되어, 그 누구도 쳐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는 이 땅에, 외적으로부터 땅을 보호할 수문장이 필요한가?
아무도 쳐들어오지 않는데도, 동족들은 독가스에 의해 다들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수문장으로서 이들을 지켜주어야 하건만, 대체 이들을 어떻게 지켜주어야 한단 말인가?
용은 지키지 못했고, 땅은 수문장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동족들은 어떻게 지켜줄 방법조차 없었다.
과연 나란 수문장의 존재에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후우…. 나는… 실패한 수문장이로구나….”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그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쉬는 한숨에 모든 감정을 담아서 실어 보냈지만 그 감정은 마르지 않는 샘물마냥, 가슴 속에서 새롭게 샘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마르지 않는 감정을 가슴에 품은 채, 그는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분이… 그 분이 돌아가셨다니?!”
위대한 용의 죽음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역대 용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현명하고, 용감하면서 위대한 용이었다. 군단의 방침에 의해 인간의 차원을 대대적으로 침공했을 당시, 가장 방비가 견고하여 공략에 애를 먹었던 ‘서유럽’이라는 지역을 불과 사흘 만에 초토화시키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1등 공신이었다. 용이라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병졸들과 함께 최전방에서 싸워 용의 군단 뿐 아니라 다른 군단들의 존경까지 받던 용이었다. 그런 용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는 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분은 돌아가셨다. 아주 어처구니없이….”
“어처구니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실은 침공 도중에 우리 형제들 중 하나가 **에 성공했던 모양이다.”
“…! 그럼 설마… 그 분이 돌아가신 이유가…?!”
수문장의 질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뱀. 그 뜻은, **에 성공한 뱀이 자신이 용이 되기 위해서 선대의 용을 죽였다는 것이다.
어리석다. 정말로 어리석은 뱀이다.
성공적으로 침공이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 반역이라니. 그것도 용의 힘으로 다 이겨놓은 판에.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군단을 혼란에 빠트리고 상관을 죽여가면서 용이 되고 싶었단 말인가. 더구나 이번 침공은 모든 군단이 참가한 대규모 침공이다. 군단의 축 중 하나를 담당하던 용의 군단이 혼란으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퇴각하면, 이번 침공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군단들 사이에서 용의 군단에 대해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지금이야 용의 군단이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니 내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훗날에 용의 군단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터.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용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뒤 새로이 현명한 용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수문장은, 군단은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뱀이다. 용의 명령에… 따를 뿐.”
그들은 뱀이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궁전이 그를 용으로 선택한 이상, 그들은 새로운 용을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것이 불합리하더라도, 그들은 따라야만 한다.
그들은 뱀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문장이었다.
“곧 새로운 용께서 오신다고 한다. 용을 뵐 준비를 해라.”
그렇게 말하고 뱀은 돌아갔다. 석연치 않았다. 자신은 모든 용을 존경하는 수문장이지만 그 용은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그리고 자신이 본 용 중 가장 뛰어난 용이었다. 전쟁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판을 엎어버린, 군단의 큰 계획을 망쳐버린, 거기다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용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용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선대 용을 무찌를 정도로 강력하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한다고 해도.
“용이시여,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수문장은 용에게 간청했다. 용이 군단의 방침을 어기고 독단으로 인간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인간과 손을 잡고 거대한 차원문을 열어 데미플레인을 인간계로 소환, 인간을 침공할 발판을 마련한다는 계획. 여기에는 그 어떤 다른 군단의 협조도 없었다. 무모하고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계획에 수문장은 용에게 다시 생각해줄 것을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계획은 완벽하노라! 어리석은 인간들 덕분에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고 남은 것은 우리 군단의 힘을 전 차원에 알리는 것뿐이거늘, 무엇이 두려워서 멈추어야 한단 말이냐?”
“인간들이 어찌 그리 쉽게 자신들의 동족을 팔아넘기겠습니까. 그들은 본디 교활한 종족인지라, 필히 속셈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은 그렇게 우습게 볼 수 있는 종족이 아닙니다. 더구나, 인간과의 전쟁은 다른 군단들과 충분히 이야기하고 난 뒤에….”
“지금 짐의, 용의 군단의 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짐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다, 이런 말이란 말이냐!”
“용이시여!”
수문장의 충심어린, 간절한 외침. 그 외침에 용은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용이 평소에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기세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손을 잔뜩 찌푸린 미간에 갖다댄 채 굳은 표정을 짓는 용의 모습에 수문장은 긴장했다.
자신이 용의 심기를 거스른 것인가? 용은, 자신에게 어떤 처분을 내리려는 것인가.
“…다들 물러가 있거라.”
그러나 수문장의 걱정과는 달리, 용은 손짓으로 수문장을 제외한 뱀들을 물러가게 했다.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용. 그 뒤로도 긴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뜸을 들이던 용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수문장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수문장은 이 군단과 영지를 지키는 자이기도 하면서… 짐을 지키고 받드는 자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용이시여.”
수문장의 대답에 용은 안심한 것인지 한결 표정이 누그러워졌다.
“그렇다면… 그대를 짐의 심복이라 믿어도 되겠는가…?”
“…! 용이시여…!”
뱀에게 있어 용의 심복이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 용이 보여준 최대의 신뢰에 수문장은 곧장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자신에게 충의를 보이는 수문장에게 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짐도 알고 있느니라. 선대 용을 죽이고 용의 자리에 올라선 짐을, 그것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상황에서 반역으로 이 자리에 오른 짐을 아니꼽게 뱀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군단과의 사이도 크게 틀어졌다는 것을. 그것을 짐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용의 말에는 여전히 위광과 힘이 깃들어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미세하게 담긴 떨림에, 수문장은 용의 심중을 어슴푸레 알아챘다. 용은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출신으로 다른 뱀들을 신뢰하지 못하던 용이 자신을 믿고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다. 용의 신뢰를 다시 느끼며 수문장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짐이 소극적으로 나서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다른 군단의 눈치를 보며, 다른 뱀들의 눈치를 보면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냔 말이야.”
수문장의 모습에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일까. 용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떨림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하등한 것을 깔보는 특유의 거만한 기운도 누그러워져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자에게 이야기를 하듯, 용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원활하고 평화로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안정에 불과하노라. 다른 군단들은 짐의 군단을 끊임없이 견제하며 군단 내에서 우리의 입지를 점점 좁혀갈 것이다. 그리고 다른 뱀들은 힘을 기르며 호시탐탐 자신이 용이 될 기회만 엿보게 되겠지. 당연한 일이다, 당장에 짐이 그렇게 이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그것은 용의 군단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입지를 잃은 용의 군단은 곧 버려질 것이고, 계속해서 용을 두고 다투는 뱀들이 늘어단다면 군단은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 그래, 이건 짐이 초래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짐이 이를 바로 잡아**다. 그 방법이… 이것 말고는 없단 말이다.”
용의 목소리는 다시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항상 힘을 과시하던 용의 모습은, 위엄에 가득 차있는 용의 자태는 다른 용들에게 감히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였던 것이다.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말하는 용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해보이면서도, 모순되게도 안정되어 보였다.
“짐의 힘을, 용의 힘을 온 차원에 보여**다. 선대 용이 보여준 그 활약보다 더한 업적을 이루어**다. 인간들의 가장 튼튼한 요새인 ‘서유럽’을 궤멸시킨 것보다도 더 큰 성과를 보여**다!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만이 짐의 위광을, 이 군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다! 용의 군단만으로도 인간을 정복한다면 다른 군단들도 쉽사리 우리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 짐의 막강한 힘을 보여야 다른 뱀들이 감히 반역을 꿈꾸지 못하고 군단의 질서가 유지될 것이란 말이다!”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용의 억양은 격해졌다. 속에 담아오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여러 감정이 폭발하며 터져 나온 것이리라.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용은 숨을 몰아쉬었다. 수문장은 그저 묵묵히 용의 말을 경청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용의 명령에 수문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언제나처럼 위엄 넘치는 용의 모습이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 동안 보여준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의 용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용은 수문장에게 물었다.
“그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가? 짐이 못마땅하고… 아니꼽게 여겨지던 적이 없느냔 말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겠군. 솔직하게 대답하라. 어떠한 말이 나와도 넘어갈 줄 터이니.”
“…! 용이시여…!”
수문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수문장이 어떻게 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대를 믿었듯이,”
용의 말에 수문장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용은 여전히 위엄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그동안 **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진정성이 아니었을까.
“그대도 나를 믿어주고, 있는 대로 말해주길 바라네.”
수문장에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다. 용의 재촉에 수문장의 굳게 닫힌 입이 열렸다.
“…선대 용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망했습니다. 이기던 전쟁을 망쳤다. 위대한 용을 죽였다. 대국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뱀이다. 감히 외람되게도 그런 생각을 품었습니다.”
수문장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감히 용을 비난하는 불경한 소리다.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문장은 용의 말을 믿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곧 그만두었습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든, 용은 용. 궁전이 주인으로 인정하고 선택한 용. 그렇다면… 저는 그저 따를 뿐. 저는 뱀으로서, 또 수문장으로서 묵묵히 용을 따를 뿐입니다.”
수문장의 말을 용 역시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수문장의 말이 끝나자, 지그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그 얼굴에 분노는 없었다.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이 살짝 웃고 있는 듯하였다. 눈을 뜨고 용이 말했다.
“…짐은 그 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 몸에 흘러넘치는 이전에 없던 강한 힘…. 만약 선대의 용을 치지 않았더라면 짐은 지금쯤 이 자리에 있기는커녕, 그 때 용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지금의 짐이 그렇듯, 선대의 용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했을 테니까.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그랬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것만 알아주었으면 하는군.”
수문장은 여전히 묵묵하게 듣기만 할 뿐. 수문장이 말이 없자 용은 말을 이었다.
“짐은 그대를 믿었고, 그대 역시 짐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그 충심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지금 확인했다. 그대와 같은 수문장이 있어, 이 군단이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용이시여.”
“…고맙다.”
용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인사.
짧지만, 진실 되고 강한 한마디.
수문장은 바닥에 엎드리며 용에게 절을 올렸다.
“용의 힘을 전 차원에 보여주시옵소서! 저는 이 목숨을 바쳐 수문장의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용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수문장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용은 다시 그 이전의 거만하고 오만한 평소의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문장 역시 굳건히 군단과 영지를 지키는 평소의 과묵한 모습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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