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oseR >- page 1 - 0 [도플갱어]

에베레베렙 2015-08-02 1

축축한 느낌. 그다지 좋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난 깨어났다.
감기는 눈을 겨우 깜빡거려 주위를 확인한다.
어둑어둑한 것이 마치 한밤중 같은. 그러나 달과 별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 풍경. 이름모를 보랏빛 보석들.
그리고 보랏빛깔 도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큰 땅.

데미플레인.

손목에 감겨 있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 철제 구속구로 보이는 차가운 느낌이 풀풀 날리는 물건을
힘껏 잡아당겨 보았지만 끊어지기는 커녕 흠집 하나 없는 것이 마치 이 세계의 금속이 아닌듯 보였다.

위상력을 발산시켜 구속구를 끊고 도망치려 했지만 이상하게 위상력이 나오질 않았다.
속에서 나오려 요동치는 힘을 무언가가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느낌.

계속 이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나의 앞에 두 아이들이 찾아왔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흰 백색이었고.
치렁치렁한 옷가지는 마치 현대풍 가수들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을 가진다.


" ....애쉬...더스트...? "

" 오랜만이야. 이세하 군. "

" 꺄핫! 잘 지냈어? "


그렇다. 이 아이들은 이름없는 군단. 우리가 차원종으로 부르는
 괴물들의 참모장이라는 최고위급 간부들이다.
현재 우리 검은양 팀이 한꺼번에 덤벼야 한명에게
생채기를 입힐 수 있을까 말까 한. 그 정도로 강한.


" ....뭐야...너희가 왜! "

" 계획이 변경되었어. "


계획이 변경되었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을 하던 나에게. 그 말이 날아들었다.


" 이세하 군. 넌 용이 되어주셔야겠어. "

" .....뭐? "

" 말 그대로야. 넌 용이 되어야 해. 이세하. "


분명. 용을 2개월 전에 쓰러뜨렸다. 그 때. 용을 잃은 영지는 새로운 용으로 나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운명을 거부하고 몸이 붕괴되어 죽는 엔딩을 선택하였었다.
 그때. 이 아이들은 나를 살려주었었다.
데미플레인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였었지.
근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인가.


" ...무..무슨 소리야! 내가 왜...! "

" 지금부터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르쳐 주지. "

" 네가 용을 쓰러뜨려서 용의 영지는 주인을 잃었어.
알지? "


그렇다. 용을 쓰러뜨린 나에게 밀어닥친 시련.
용의 영지는 용이 없어졌으니. 새로운 용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애쉬에게 용이 되거나. 몸이 붕괴되어 죽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받은 나는,

죽는 길을 택하였다. 

나의 동료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었다.
아니. 인류를 적으로 돌린다는 불안감을 
가지며 용이 되어 살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때. 그들은 나를 살려주었다.


" ....그래. 근데....지금 와서 무슨 소리냔 말이야! "

" 우리도 용의 영지를 제거하려 최선을 다했다구. 
근데 생각보다 만만하질 않더라? "

" ...아스타로트. 그놈이 그런 장난을 쳐 놓았을 줄은. "


장난? 장난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들이 어느새 표정을 굳혔다.
무거워진 공기가 주변을 휘감았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 ...아스타로트는. 용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영지는 마지막으로 있던 곳에서 힘을 잃고 폭발하도록 설정해 놓았어. "

간단히 말해. 네가 용이 되지 않는다면. 데미플레인은 힘을 잃고 강남 상공에서 폭발할 거야. "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데미플레인이 폭발하게 된다면. 강남은 확실히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였다.
데미플레인의 폭발로 인한 폭발 피해는 물론이고. 데미플레인의 잔해로 인한 2차 피해까지.
생각해 보면 실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피해가
 발생할 것이 분명하였다.
이제야 겨우 복구작업이 모두 끝났는데.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 ..... "

" 우리는 최대한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멍청한 영지는 지지리도 말을 안듣더군. "


그렇다면.


" 내가 용이 된다면. 그 피해를 막을 수 있어? "


그들은 고민하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빙긋 웃으며 나에게 말하였다.


" 물론이지. 강남은 안전할거다. "


선택의 여지는 없다.
차원종이 되는 것은 싫다. 
그러나.

추억이 깃든 장소가 사라지는 것은.


더 싫다.


" ....마지막으로...통화 한 번만..하게 해 줘. "

" 마음대로. "


그 말이 끝나자. 날 얽매던 구속구가 
철컹 하고 풀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다. 
익숙한 노랫소리에 깜짝 놀라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를 잠시 쳐다보다 
발신자 표시를 보았다.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나는 전화를 받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 .....이슬비? "

[ 여보세요? 이세하? ]


이 목소리. 밝고 경쾌한. 그러나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명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 여보세요? 야. 이세하! ]

" 듣고 있어. "

[ 어디야? 오늘 약속 있는거 몰라? ]

" 약속? "

[ 역시. 게임만 하지 말고 들어라.좀 ]


언제같았으면 듣기 싫은 꾸중의 목소리.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듣고 싶은 걸까.
계속 듣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를.


" 아냐. 안 잊었어. 너희 집에서 모인다고 했지. "

[ 그래. 아스타로트 처치 기념으로....물론 두달이나
 지나긴 했지만.. ]


아스타로트를 쓰러뜨리고도 복구작업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우리를 위해 슬비는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다.
그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


" 근데...미안. 나 오늘 못가겠어. "

[ 뭐? 왜? 또 게임방가는거야,너? ]


아아. 뭐만 했다 하면 모두 게임이구나.
내가 솔직히 게임을 많이 하긴 했나 봐.
이럴줄 알았으면 적당히 좀 할걸.


" ....그런거 아니야. 집안에 좀 일이 생겼어. "

[ 그래?...근데...너 울어?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째서일까. 답은 간단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동료들과의 추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용이 되어 그들과 적대시하고 싶지 않았다.


" ...무슨 소리야. 내가 울긴. "

[ ...그래? 그럼 너 못온다고? ]

" ...응. 미안. 다음번엔 꼭 갈게. "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어.
이 말이 계속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말하지 못했다.
미련하게.


[ 그래. 그럼 내일 보자. ]

" ...응. 미안. "

[ 괜찮아. 잘 쉬고. ]

" ......응. "


뚝.
무신경한 기계음이 내 귀를 긁고 지나갔다.그
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더이상 들리지를 않았다.
이것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걸까.

그건 더더욱 싫다.


" 역시 안되겠어. 난 용이 되지 않겠어. "

" ...진심인가? 네가 용이 되지 않는다면. 데미플레인은 폭발하고 말아. "

" ....괜찮아. 다시 또 고생하면 돼. "


여태껏 그래왔으니까. 


그러나.


" 미안하군. 그럴 수는 없겠어. "

" ...뭐? "

" 미안하지만 네겐 선택지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


그 후. 뒤에 누군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 황급히
 뒤를 쳐다보았을 때는 늦었다.
나의 도플갱어 하나가 나를 건블레이드로 쳐서 
저쪽 구석으로 날려보냈기 때문이다.
날아가 벽에 처박힌 내 온 몸에는 파란 불꽃이 붙었다.
저놈. 칠 때 발포한 것이 틀림없었다.
옷은 여기저기 암석 파편에 긁혀 찢어지고. 
하얀 와이셔츠에는 핏물이 스며들었다. 
입에서는 한줄기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도플갱어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에게 다가와 내 몸을 발로 차 다시 한번 날렸다.
날아가 또다시 처박힌 나는 그 옆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쿵 하고 굴러떨어진 나는 충격에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드라군 타입. 그것도 블래스터급의 차원종이
 마치 인해전술을 쓰는 중공군처럼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거의 수백마리는 될듯 싶었다.


" ....이...이건... "

" 어때? 이 아이들 전부의 위상력이 네 위상력의
 잠재력과 맞먹는다니. 신기하지? "

" 자. 이제 좀 알겠나? 인간. "


설마. 아냐.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할리가 없다.


" 그냥 몸만 차원종으로 바꾸면 좀 이상하잖아?
네 위상력은 빼낸 뒤 이 아이들의 위상력을 
네 몸에 집어넣을 거야! "

" 그렇게 하면 넌 진짜 차원종이 되는 거다. 
제 3의 힘같은 것이 아닌. 넌 완벽한 차원종이 될 거야. "

" ...무..무슨..그런 게...성공할리... "

" 물론. 실패 확률도 있지. 그러니 죽기 싫으면 
버티라구~? "

" 그리고 네 위상력은 도플갱어에 넣어서 네 대타로 쓸 거니까. 완벽히 써먹어주마. "


말도 안되는 소리 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도플갱어가 내 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통에 제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 ㅇ...큭.... "

" 이제 마음대로 해라. 죽이지만 말고. "

" 죽이면 위상력을 뽑을 수가 없으니까~ "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진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몸뚱이 하나만이 날아왔다.
날아온 몸뚱아리는 엉망진창이었다.
어떻게든 힘을 내 보려 몸부림쳐도 
손목에 감긴 구속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커헉.... "


입에서는 검은 핏덩이가 툭 튀어나오고.
온 몸은 찢어지고 상처 투성이에다
머리에서 흐르는 검붉은 액체는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 그러니까 얌전히 용이 되었으면 좋았었잖아. 하여간. 일을 너무 크게 벌인다니까. 넌. "


금세 새까맣던 몸은 씻기듯 사라지고. 
새까만 그가 있던 자리에는 내가 서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꼭 닮은.


" 그놈의 추억이 뭐라고. "

" 넌 모를거 아냐. "


도플갱어는 비틀비틀 일어나는
 나의 멱살을 붙들고 반대쪽 벽으로 패대기쳤고.
처박히는 순간 뿌득하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격렬한 통증이 몸을 휘감았다.
아마도 뼈 어딘가가 부서졌으리라.


" 크헉... "

" 그래. 몰라. 알 가치도 없는 감정이거든. 그딴거.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도플갱어는
 내 목을 움켜쥔 후 나를 들어올렸다.
엄청난 손아귀 힘에 숨을 쉴수 없었다.
산소가 부족해지자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고.
점차점차 의식이 흐려져 갔다.


" ㅋ...큭...ㅎ..  "

" 인간들은. 왜 그렇게 추억에 연연하는지 모르겠어. 
미련하게스리. "

" ....그래서 니가 차원종으로 태어난 거야.멍청아. "


내 목을 죄어오던 손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느꼈다.
더욱 빠른 속도로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매어 놓고.
구속구로 묶인 손에 힘을 넣는다.
온 몸의 힘을 손목으로 전달시키고. 
의식을 더이상 억지로 매어 놓을 수 없을 때.
최대한 힘을 주어서.

콰득.

투둑하고 살점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금속음.
뚝.뚝. 무언가 내 손목에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 ...으아아아아! "


최대한의 힘을 내어 발로 녀석을 찼다.
그 반동으로 나도 휘청 넘어가고 말았다.
손을 짚는 느낌이 들지를 않았다.
손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픈 것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느낌과 함께 
팔이 축축해졌다. 그러나 차갑지는 않았다.
따뜻한 느낌.
몽롱한 기분이 몸을 휘감았다.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머리로는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뚱아리는. 움직이지를 못했다.
놈은? 어디지.
그때. 그 아이들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 화려하게도 해 놨군. 이세하. "

" 놀랐어! 손을 뜯어서 구속에서 탈출할 줄이야~ "

" 하지만. 그게 끝이다. 게임오버로군. "


그래. 발악은 그저 발악일 뿐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못했다.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감긴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에 의식을 붙잡고
 있었던 끈이 끊기기 시작하였다.
그 찰나의 순간. 모든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살아왔던 기억. 재밌는 기억에서 슬픈 기억들까지.
스쳐왔던 사람들. 친구들부터. 부모님까지.
모든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가며 나를 자극하였다.

볼에 무언가가 흐르는 기분과 함께.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를 회상하며.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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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하는? "


윤기나는 긴 흑발을 가진 소녀는 같이 걸어가던 
핑크빛 머리 소녀에게 물었다.


" 아. 걔 못온대. "

" 세하 동생.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


뒤에서 튀어나온 흰 백발의 청년은 걱정하는 어투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뭐. 걔가 무슨 일 생겨 봤자죠. 
또 뭐 게임이나 하러 간 게 아닐까요. "


그 게임중독자는 언제나 그랬다.
게임에 푹 빠져서는 자신의 말도 제대로 듣지를 않고.
임무만 끝나면 여지없이 휴대용 게임기를 
들고 열심히 두드려댔다.


" 그래도 세하는 약속같은 건 잘 지키는 편이잖아? "

" 게임 약속이 없을 때 한정이야. "


내일 만나면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다-라고 생각한 
그녀에게 이상한 느낌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 ...위상력? '


" ...? 왜그래 슬비야? "

" ..ㅇ...아무것도 아냐. 잠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


이상한 느낌. 한순간 위상력이 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위상력은 많이 느껴보았던 힘이었다.
폭발하듯 터지면서도 부드럽게 나아가는 이 힘은.


" 이상한 느낌이라니? "

" 방금...뭐.....세하 위상력의 느낌이 난 것 같은데... "

" 엥? 그래? 난 전혀 못느꼈는데. "

" 내가 잘못 느꼈나 봐. "


요새 피곤했나 보다.
별 이상한 느낌도 다 느끼고.

그렇게 생각하며. 흰 백발의 사내와 긴 흑발의 소녀.
그리고 핑크빛 머리의 소녀는 이야기꽃을 피우며 
도심 저 편으로 사라져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2024-10-24 22:37:3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