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자리가 만드는 결말

올딜 2015-07-24 6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폐허가 된 도시는 바람이 불때마다 굵은 먼지가 휘날린다. 무너진 건물 속에 있어야 할 인간들은 토마토가 찌그러진 것처럼 형체를 잃고 붉은 피만이 사방으로 퍼져 나와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게냐? 어서 따라오지 않고.”

 

이 삭막한 풍경을 바라보는 께서는 나를 꾸짖으셨다.

 

죄송합니다. 용이시여.”

 

시선을 거두고 나는 용을 올려다보자 용께서는 인간들이 지은 건물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뱀이여, 지금은 시간이 없다. 빠른 시일 내로 이 땅덩어리들을 전부 부수고 정복해야 된다. 목적을 잊지 말거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용이시여.”

 

거대한 위엄의 용께서 한 발짝 걸으실 때마다 천지는 요동쳤고, 주변은 더욱 붕괴되어간다. 건물에서 부서진 거대한 파편도 용의 앞에서는 그저 한줌의 모래에 불과하였다. 진격과 살육은 멈추지 않았으며 인간들의 단말마가 담긴 꼴사나운 비명은 군단의 우렁찬 함성에 묻혀 사라져갔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용의 발이 멈추고 동시에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신다.

 

그 어떤 것도 남기지 말라. 우리 군단에 위대한 광명을!”

 

그와 동시에 우리 뱀들은 용의 주위를 지키는 몇 명을 제외하고서는 뛰쳐나가 주변을 부수기 시작한다. 이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용이 원하시고 용께서 판단하신 일이기에 우리는 그저 따르면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뛰쳐나가 주위를 파괴하고 인간들은 죽여댔다.

 

사라져! 이 괴물들아, 돌아가! 네놈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겁에 질린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인간을 손가락에서 발사한 조그마한 빔만으로도 쓰러뜨렸다. 저항도 못하는 약자를 죽였다고 하여 죄책감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인간들을 죽여댔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대로 인간들은 죽여대자 주변은 완전히 고요함을 되찾는듯하였다.

 

하지만 옆쪽에 부서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벅차오르는 숨소리와 파편의 떨림이 느껴진다. 나에게는 지성이 있고 지능이 있기에 호기심 또한, 가지고 있다. 단순히 에너지를 방출하여 죽여버리면 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건물의 파편으로 다가가 잔해를 들어 올리는 순간 묵직한 무엇인가가 나의 가슴팍을 강타한다.

 

내가 내려다본 잔해 속에 숨어있던 것은 조그마한 인간 둘이었다. 하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건물의 뼈대를 이루고 있던 긴 봉을 내 가슴팍에 최선을 다해서 꽂아 넣으려고 하였다.

 

, 빨리 도망가! 어서!”

 

하지만 그 긴 봉은 내게 상처를 주기는커녕 피부조차 뚫지 못하고 생채기 하나를 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위험의 울림이 느껴진다. 이유를 알 수없이 몸이 흥분된다.

 

형아... 무서워, 어떻게 해.”

 

그 작은 녀석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막고 있는 녀석에게 달라붙었다.

 

바보야! 울지 말고 어서 도망치라고. 안 그러면...”

 

형이라는 녀석은 말을 멈추더니 작은놈을 그대로 들어 던져 버린다.

 

빨리 도망가! 안 그러면 넌 죽는다고!”

 

죽는다는 소리에 작은 녀석은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내 앞에 이 녀석은 자신의 키보다 조금 작은 그 봉으로 다시 한번 나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를 때려도 내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녀석의 눈은 살아있다. 나의 생각은 좀더 깊어지려고 한다. 이것은 용에 대한 배신이다. 아무런 생각도 나서는 안된다. 그저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인간들은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이 내버려도 두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선 먼저 달아나는 작은 녀석에게 위상력을 발사하였다. 폭발음이 들리자 내 앞의 녀석은 표정을 굳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동시에 앞의 녀석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다.

 

나는 이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용에게 돌아갔다.

 

용께서는 낮에 쏟아냈던 힘을 보충하시며 쉬고 계셨기에 말씀을 여쭈었다.

 

용이시여, 어째서 저희 군단은 이곳에 온 것 입니까?”

 

용은 거대한 입을 벌리며 말하였다.

 

고작 그런 것을 묻는 것이냐? 너는 다른 뱀들보다 특히 강하였기에 내 부관으로 임명하였는데,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나 보구나.”

 

. 제가 미숙하여 아직 용님의 목적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너는 내 부관으로써 곧, 군단의 간부가 될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이번 한번만 봐주겠다. 이것은 정복활동이다.”

 

정복입니까?”

 

그래, 이곳의 인간들로부터 영토와 힘과 자원을 얻는다. 그것이 목적이다.”

 

“...알겠습니다. 용이시여.”

 

용에게서 확고한 대답을 들었음에도 가슴속 갑갑함이 해소되지 않은 채, 다음날이 밝았다.

 

다시 진격하라.”

 

용의 짧고 굵은 한마디에 우리 군단의 뱀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용의 공격과 발걸음 앞에 인간들은 정말 보잘 것 없이 쓰러져 갔으며 막을 방도는 없었다. 이것을 정복이라고 부르는가?

 

끊임없이 고뇌를 반복하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다시 용이 휴식을 취하고 주변의 뱀들은 남은 인간들을 죽이러 갔다.

 

나 또한 이 고뇌를 뒤로한 채 용의 명대로 인간들은 죽이러 갔다. 그리고 나는 운명에 끌린 것처럼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와 비슷하지만 어느 정도는 나와 다른 어떤 알 수 없는 감각이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느껴졌던 곳에는 한 인간이 서있었다. ‘그저 쓸데없는 착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여 평소대로 작게 위상력을 발사했다. 폭발음이 들리며 먼지가 크게 부풀어 올라온다. 그리고 다가온다. 느껴진다. 다른 무엇인가가.

 

네놈? 인간이 어째서!”

 

녀석은 먼지를 뚫고 순식간에 나의 앞으로 달려와 나의 가슴 언저리를 난타하였다. 분명 허무하게 죽어야할 인간이 살아서 나를 공격한다. 심지어는 타격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가슴이 쿵쾅대는 것은 고통 때문인 건가?

 

죽어라, 이 괴물아!”

 

누구보다 단단한 내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분명 나보다 약한 녀석이지만 목숨을 건 녀석의 초 근접전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차원으로 넘어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처음으로 나에게 피해를 입히는 인간을 만났다. 그러자 그 이 녀석에게 느껴졌던 기운이 이해가 됬다.

 

네 녀석... 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구나.”

 

피부가 금이 가면서 깨져갈 때쯤 드디어 정신이 든다. 이 인간은 다른 뱀들에게조차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약한 녀석일 뿐이라는 것을.

 

안타깝지만 인간이여, 내 변덕은 여기까지다.”

 

그저 날 향해 원망을 담은 주먹을 직선으로 내지를 때 가볍게 피한 뒤 머리통을 정확히 날려버렸다.

 

녀석은 완벽히 죽었고 나는 방심으로 인한 조금의 상처뿐이었다. 하지만 가슴은 진정되지 않고 고양감이 들었다. 왜 이런 것인가? 나는 이 녀석을 죽임으로써 이런 기분이 든건가?

 

그렇게 제자리에 서서 조용히 흥분감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온갖 잡념에 시달릴 때 머리통이 날아간 그 녀석의 주먹이 보였다. 피로 점철되었던 주먹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가자, 녀석의 주먹은 이미 뼈도 부서진 상태였다. 녀석은 그런 상태로, 죽으려고 내게 덤벼들었다.

 

그제야 나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크게 웃어보았다.

 

고작 우리가 온 지 나흘 만에 위상력을 사용하다니... 그렇군, 이런걸 보고 성장이라고 하는군.

 

네놈의 이름을 들어보진 못했지만... 축하한다. 너의 그 무식하고 멍청한 용기는 세상을 구했다.”

 

죽은 녀석의 몸에다 혼잣말을 내뱉은 뒤, 나는 망설임 없이 용에게 돌아갔다. 내가 할 일은 명확히 정해졌다. 나의 의지로 행하는 이 첫 행동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용이시여, 이제 이 대륙은 완전히 초토화 되었습니다. 언제쯤이면 다시 일어나실 겁니까?”

 

앞으로 5시간... 그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니 어서 뱀들을 모아라.”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용의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일순간, 내 모든 힘을 다하여 뛰어올라 용의 가슴을, 핵을 꿰뚫었다.

 

... 네 녀석... 지금 무슨 짓을...”

 

썩은 물을 걸러내리는 거다. 헤카톤케일.”

 

그게...무슨...”

 

네 녀석이 하는 것은 정복이 아닌 학살이다. 긍지 높은 용에게 그런 것은 허용돼서는 안된다.”

 

뱀주제에... 뱀주제에... 감히 이 용을! 네놈 따위가 뭐라도 될 줄 아느냐?”

 

그렇지, 되고말고. 너를 죽이고 이대로 내가 용이 될 것이다.”

 

헤카톤케일의 죽음이 시작되자 위상력이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뱀들도 모여들어 나와 헤카톤케일을 바라 보았다.

 

반항도 하지 못하며 도망가는 약자를 죽이는 것은 정복이 아니다. 눈을 맞추며 싸우고 승리를 쟁취 하였을 때 그것을 비로소 정복이라고 한다!”

 

멍청한 자식, 이름없는 군단이... 널 가만히 둘것같으냐?”

 

반대다. 이 나태에 찌든 왕이여, 내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 이다.”

 

... 미쳤군.”

 

널 죽인 나는 곧 영지의 선택을 받게 될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뱀들이 받았던 굴욕을 그녀석들에게 갚아줄 것이다.”

 

주변은 뱀들은 웅성거렸다. 저들은 아무런 생각도 못하였을까?

 

그 영광스러운 용의 자리를 나태함으로 더럽힌 죄를 네 녀석과 이름 없는 군단 놈들에게 뱀들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울 것이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존재다. 힘의 차이가 있을 뿐, 저항 못하는 쓰레기를 죽이는데 아무런 성취감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헤카톤케일의 몸은 완전히 기능을 정지했다.

 

뱀들이여, 내가 진정한 정복을 알려주마. 승리를 알려주마. 영광을 알려주마. 싸워라! 무의미한 학살과 시시한 전쟁놀이는 끝이다.”

 

선언한 뒤, 나는 플레인게이트로의 문을 열었다.

 

진정한 승리의 쾌감을 원하는자, 정복의 쾌락을 원하는 자, 빛나는 명예가 필요한 자, 이 나태하고 무능했던 왕의 시체를 밟고 들어와라.”

 

나는 그대로 뼈대만 남은 채 증발해 가는 헤카톤케일의 머리를 밟으며 플레인 게이트로 들어갔다. 용의 영지로 돌아가자 나의 몸은 빛을 뿜어대며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이 성장을 시작하였다. 영지가 선택한 왕은 나였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 몸안으로 들어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빛이 끝났을때는 이미, 뱀들은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잘 왔다. 나의 뱀들이여. 짐의 이름은 아스타로트. 지금부터 패도(覇道)를 걸어나갈 왕이다.”

 

주위는 고요하고 엄숙하다. 그들도 나와 함께 뜻이 통하였다.

 

이 용이 너희 뱀들에게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여댔던 그 인간들!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강해진 그 인간들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정복을 쟁취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다. 인간들이여...


2024-10-24 22:37:0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