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을 고하며
회계사 2015-07-20 4
"그래서 말이야. 폰 잃어버린 사이에 연락 안했다고 완전 삐졌지 뭐니? 정말, 나도 고의로 무시한게 아니었는데."
"에이, 그건 그 친구분이 완전 나빴네요."
"그치? 아, 떡볶이 다 먹었니? 좀 더 줄까?"
"헤헷, 정말 매일 언니한테 반한다니까요~"
플레인 게이트의 진입 구역의 구석에는, 그 음울하고도 우중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노점이 하나 있었다.
플레인 게이트 탐사 팀장 최보나가 '역시 애는 애야'라는 조소를 감수하면서까지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포장마차까지 통째로 들여온 소영이의 여우네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엔 최보나와 검은양만 찾던 가게는 그 매혹적인 향기로 차츰 사람을 끌어모았고, 이제는 플레인 게이트의 대표적인 마스코트를 노릴 정도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여우네의 주인인 소영이가 일반인이었던 관계로 여우네의 영업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졌으며, 소영이는 야간 개장 건의안이 매번 반송되는것을 눈물을 삼키며 받아왔다.
그래서 오늘도 가게를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어김없이 물품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아 참. 그런데 이제 문 닫을 시간 아니에요? 혹시 저 때문에 연장하는거에요, 언니?"
이제는 공항쪽으로 투입되었다고 알고있던 팀 검은양의 요원 서유리가 불쑥 찾아와버렸던 것이다.
완벽한 일반 여대생 소영이는 플레인 게이트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손님에 저도 모르게 떡볶이를 대접하며 잡담 하던게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떡볶이를 먹으며 재잘대는 유리의 말을 종합해보면, 갑자기 머리를 스친 예감이 자신을 플게로 보내길래 왔더니 엔진을 드디어 득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일반인인 소영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 투성이다.
그냥 유리가 기뻐하니 좋은 일이구나 싶을뿐.
"아...음. 맞아. 사실은 이제 영업 끝낼 시간이야. 미안해 유리야. 대신 다음에 오면 서비스로 많이 줄게?"
"어머, 정말요? 그럼 다음엔 클럭을 얻을 겸 또 와야겠네요♡"
애교의 교본같은 목소리로 유리가 대답했다.
정말 자각없이 매력을 흩뿌리고 다니는 애라니까.
소영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다.
"그럼 다음에 봐요. 아, 언니 그치만 바로 정리하지 마세요. 곧바로 다시 써야할거에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의아해진 소영이가 유리를 바라보았지만 유리는 이미 떠나가고 있다.
그래서 유리가 작게 '그렇게 티나게 서 있으면 눈치보여서 먹을 수가 없잖아'하고 투덜거리는것은 소영이가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위상력에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이었으니까.
"곧바로 다시 써야 하다니 무슨 소리일까."
유리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온다는 걸까?
"야, 뭘 멍하게 있는거야? 손님이 왔으면 먹을 걸 내놔야지."
"꺄아아악!"
바로 앞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소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행동이 뜻밖이었던지 손님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소영이에게서 멀어졌다.
"뭐, 뭐야! 시끄럽게 비명이나 지르고!"
"아, 그, 미안. 갑자기 사람이 눈앞에 생겨나버려서..."
"생겨나? 뭔 헛소리야? 난 당당히 가게까지 걸어왔는데."
"내가 원래 생각에 잠기면 주변을 잘 못보거든... 미안해. 그 ...나타..?"
"그래. 용케 이름을 기억하고 있군. 빨리 어묵이나 줘봐. 배고프니까."
소영이의 포장마차에 갑작스레 나타난 불청객의 남성은 바로 나타였다.
이전에 강남 포장마차에 피투성이로 눈앞에서 나타나 영문모를 소리만 하고 사라진, 아직은 앳되보이는 소년.
하지만 소영이는 묘한 친숙함이 느껴져, 혹시나 어릴때 면식있던 먼친척은 아닌지 상상까지 해볼 정도였다.
"뭐해? 빨리 어묵 달라니까. 난 지금 배가 무지하게 고프다고."
플레인 게이트에 출입하는 관계자라면 모두 여우네의 영업 시간을 숙지하고 있을터인데, 이 소년은 무슨 똥배짱인지 의자에 냉큼 앉아 요리를 재촉한다.
"어...음. 그게 말이야. 지금은 영업 시간이 끝났거든? 미안한데 내일 와줄래? 대신 서비스로 왕창 줄테니까 말이야."
보통은 오지도 않는 순찰 요원들이지만, 혹여나 걸리기라도 하면 자기를 밀어주는 최보나에게 폐가 갈수도 있기에 소영이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평소 다른 이들보단 뜸하게 오지만 한번 오면 걸신들린듯 먹는 나타의 모습은 소영이에게 단골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러므로 단골이라면 이정도로 서운해하진 않겠지. 그도 클로저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그러나 소영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일그러진다.
"...뭐? 영업 시간이 끝나?"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눈치챌만한 그 당혹감에 소영이도 얼떨결에 같이 당혹스러워진다.
"으..응. 나도 야간 영업을 하고 싶지만 이건 유니온에서 내려온 사항이라 어쩔 수 없어. 하긴 일반인인 내가 밤 늦게까지 여기에 있는게 이상하기는 할테니까."
"...칫. 그런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잘 있어라."
그 말을 끝으로 나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장마차에서 걸어나갔다.
생긴것과는 다르게 순순히 받아들이는구나. 소영이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런데
그
멀어지는 나타의 등이
묘하게 쓸쓸해보여서
"얘, 저기, 잠깐만!"
자기도 모르게 나타를 불러세웠다.
"...뭐야? 영업 끝났다며?"
"아, 저기. 그게 아니라. 잘 있어라라니. 평소엔 그냥 가버렸잖아? 인사를 하는게 무슨 마음에 변화라도 있었나 해서..."
소영이 스스로도 불러세운 이유를 찾지못해 얼렁뚱땅 말을 이어갔다. 할게 없어 말꼬투리를 잡아버리니 창피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아, 응. 미안 실수야. 잘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할수는 있었지만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게 더 정확한 소영이의 마음이었다.
"...흥, 진짜 예나 지금이나 참견하기 좋아하는건 예전하군."
그러나 정말 나타에게는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건지, 나타는 다시 소영이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야. 이제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내일부터 다른 곳으로 갈거야."
"뭐? 정말이야?! 어디로 가는데?"
"그건 알아서 뭐하게? 그리고 알아봤자 좋을거 없잖아?"
"그건...그렇지만."
GGV때보다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성격 나쁜건 여전하구나.
소영이는 시무룩하게 아래를 쳐다본다.
그게 나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건지, 나타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칫...이건 그 뭐냐, 기밀같은거라서 말해주지 못하는거야. 딱히 싫어서 안 말하는게 아니니까 나쁘게 생각 말라고."
"...응,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역시 성격 좀 고쳤구나! 소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뭐야, 기분나쁘게 왜 웃어?"
"후후, 몰라도 돼. 그것보다 그럼 당분간 여기로 못오겠네?"
"...그래. 아마 꽤 오랫동안 못올거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리 와 나타. 이 누나가 작별의 선물로 회심의 역작을 요리해줄테니까!"
"뭐? 너 영업 시간 끝났다며?"
그리고 누가 누나야?라는 나타의 반문은 무시하며 소영이는 흘긋 주변을 돌아본다.
뭐, 이제껏 나오지 않던 요원들이 오늘이라고 나올까. 아마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겠지. 만약에 온다고 해도...보나에게 서비스를 듬뿍해주면 어떻게든 퉁칠수 있을거야. 응.
계산을 마친 소영이는 상큼한 영업 표정으로 나타를 불렀다.
그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는지.
"...헷. 불법 영업이라 이거지. 좋아. 이 몸과 어울리는데."
나타는 다시 여우네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이럴수가. 어묵에 대해선 이제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낯이 익은 표정으로 놀라는 나타를 보며 소영이는 미소지었다.
요리하는 사람으로서는, 역시 자신의 요리에 감탄하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소영이가 굳이 아르바이트로 포장마차를 차린 이유에는, 자신의 요리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소영이에게 지금 나타의 모습은 꽤 많은 행복감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정말, 어묵을 싫어한다고 말한 애라고는 생각할수가 없다니까. 어때? 내 비장의 메뉴는?"
"우적우적...어째서...이런 메뉴를...후루룩...평소에는 안 내놓는거야? 쩝쩝"
어묵과 국물을 동시에 흡입하며 말까지 하는 신기를 보이며 나타가 질문했다.
"비장의 메뉴인만큼 손이 많이가거든. 그러니까 장사할때는 수지가 맞지 않아. 이렇게 마지막 손님이나 가게가 휑한 경우에나 만드는거지."
소영이가 대답하는 그새 나타는 소영이의 요리를 다 먹어치웠다.
그릇을 내려다보며 아쉬워하는 표정은 평소 먹자마자 나가버리는 나타라면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소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게 된다.
"...어이, 뭘 그렇게 쳐다봐?"
"응? 아,아니. 신기해서. 마치 어묵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같달까. 정말 맛있게 먹어주는구나, 너는."
"흥, 저번에도 말했듯이 난 깡통 죽으로만..."
거기까지 말하던 나타는 입을 다물었다. 소영이는 의문을 담은 시선을 나타에게 보내지만 나타는 소영이가 모르는 이유로 기분이 나빠진건지 화제를 돌린다.
"그것보다, 마지막에 어울리는 요리인걸? 앞으로 못 먹을거라고 생각하면 아쉬워질정도로 말이야."
"에이, 과장이 너무 심하시네. 가끔 휴가를 받아서 먹으러 와도 되잖아? 아니면 휴가 때 올 정도는 아니란 뜻?"
"...흥. 잘 알고 있구만."
"엑. 정말로? 나 조금 상처받는다?"
소영이의 농담에도 나타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잘 있으라구. 뭐 맛이 있으니 망할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벌써 가게? 이왕 이렇게 된거 좀 더 먹고가지 않을래?"
나타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정말 오랫동안 올 수 없는거 같단 생각이 들어 소영이는 좀 더 서비스해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요원이 등장하지 않았으니 오늘도 순찰은 없을 것이다. 간혹 야밤에도 정도연씨나 김가면씨가 돌아다니긴 하지만 그들이라면 눈감아줄테니 문제없다.
막차버스도 아직은 괜찮으니 이왕 요리해준김에 확실하게 대접할 심산이었지만
"됐어. 한번 먹었으니까. 그것보다 댁이야말로 평소보다 늦은건데 상관없는거야?"
나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소영이를 걱정해준다.
물론 그 말투는 딸내미를 나무라는 고지식한 아버지같이 쏘아붙이는 느낌이었지만, 소영이는 이제 나타가 원래 그런 애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타의 본심을 깨닫는것에는 무리 없었다.
"응. 막차가 아직 있으니 상관없어. 그보다 정말 괜찮아? 물론 거기에도 맛난 음식은 있겠지만..."
"됐다니까. 거참 본인 요리에 어지간히도 자신있구만. 잘 있으라구."
"어, 그래. 잘가 나타! 나중에라도 꼭 보자."
나타는 손을 휘휘 휘저으며 멀어져갔다.
금방 어둠속에 휩쌓이는 나타를 바라보던 소영이는 묘한 공허함이 발 아래에서부터 밀려오는것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GGV에서 처음 봤을때부터 마치 나를 아는것처럼 얘기하는 이상한 애였다. 차원종과 마주치고 기억을 잃기 직전에 대화라도 했었던 걸까?
소영이는 회상해본다. 피투성이인채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음에도, 상처의 치료보다는 나의 대답을 갈구하던, 그 상대방을 압도하던 눈빛을.
"그 뒤로도 갑자기 찾아와서 강해진다느니 자유로워질거라느니, 영화같은 대사를 읊었었지? 생각해보니 꽤 부끄러운 말같단 말이야."
"...너, 설마. 그거 내 얘기는 아니겠지?"
"꺄아아아악!!"
"아오! **! 또 그러기냐!"
"아, 미. 미안. 하지만 밤이라서 무섭단 말이야!"
소영이의 비명소리에 질색하며 화를 내는 남자는 물론 나타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소영이가 생각에 잠기지 않아도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나타는 평소처럼 걸어온 것이 아니라. 위상력까지 사용하며 질풍같이 여우네에 도착한것이었으니까.
물론 소영이는 이 사실을 모르고, 나타는 그런걸 전혀 신경쓰지 않으니 달라진 것은 없을테지만.
"그..그래서, 무슨 일이야? 뭐 놔두고 간거라도?"
소영이의 당연한 질문에 나타는 입을 다물었다.
"....."
나타가 입을 다물자 소영이도 할 말이 없어 자연스레 여우네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나타의 눈빛만은 올곧게 소영이를 보고 있어, 소영이는 괜시리 손으로 머리카락를 꼬거나 후드를 정리해본다.
"잘 들어. 한번만 말해줄테니까."
"으, 응?"
그렇기에 나타의 말은 기습적이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난 자유를 기필코 손에 넣고 말거야.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남의 명령따위 듣지도 않을 정도로 말이야!"
언뜻 들으면 야밤에 이불을 뻥뻥차버릴 내용이지만, 나타의 절규하는 듯한 기색에 소영이는 그런 생각은 털끝만치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거라고. 알았어? 거슬리는 녀석따윈 모두 찢어버릴거라고!"
"으...응. 그래. 반드시 네가 원하는 거. 얻기를 바랄게."
소영이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 쥐어짜냈다. 지금의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소영이의 말은 들은체만체 나타는 돌아섰다.
"흥...그래, 알았으면 됐어."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간다는 말을 남기고, 나타는 다시금 여우네를 나선다.
그 숨막힐듯한 공기가 조금씩 옅어지자 소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나저나 저 아이는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걸까? 혹시 내가 뭔 잘못이라도 했나?
아까와는 달리 천천히 걷는듯한 나타의 뒷모습을 보며 소영이는 고민했다.
GGV때도 그렇고, 나타는 영문모를 소리를 하며 작별하는게 취미인가?
그러고보니 이전에는 마지막에 뭐라고 했더라. 자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던가?
"아!"
거기까지 생각한 소영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나타!"
자조적으로 웃던 나타의 표정이 기억난다.
"저기 말이야-! 나는 단골 손님의 얼굴을 꼭 기억하거든?"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영이를 바라보던 그 얼굴이
"그러니까 나중에 아~주 오랜만에 와서 자리에 앉아도 기억해줄테니까 걱정하지마-!"
소영이 자신의 마음이 아릴 정도로 슬픈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어묵, 좋아하잖아-!"
그 말과 동시에 나타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 위상력이라도 써서 달리기라도 했나보다.
"정말..대답이나 손짓이라도 하고 가면 어디 덧나나?"
그래도 소영이는 마음 한구석이 홀가분해진것을 느낀다.
사라지기 직전에 옆모습이 잠시나마 보였던 나타는, 왜인지 웃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