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러운 왕자님
Larken 2015-07-19 0
글을 읽으시기 전에, G타워 스토리가 약간 언급되어 있으니 스포일러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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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령은 이행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탁을 거부하는 특경대 대원, 채민우의 목소리에 벌처스 산하의 처리부대, [늑대개] 부대의 감시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홍시영은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녀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뭇 몇몇 남자들을 설레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런 미소였지만 채민우에게 있어 홍시영의 그 미소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웃으면서 채민우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금 언급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릎 꿇게 만든다. 그것이 홍시영이라는 여자가 사람들을 부리는 방식이었다.
“좋습니다. 난민들을 진압하는데 특경대를 투입하겠습니다. 이러면 됐습니까?”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채민우 쪽이었다. 자신의 부탁, 아니 명령을 이행하겠다는 채민우의 말에 홍시영의 미소는 더욱 농염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비극을, 신파극을 기대하는 악취미적인 미소였다.
아름다운 지옥을 만들기 위한 그녀의 계획은 찬찬히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난민들을 위해 참 열심이시네요. 채민우 씨. 그들은 결국 신서울을 배반한 사람들인데 말이죠.”
“신서울을 배반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시민입니다. 그런데, 그 시민들을 지켜야하는 저희 특경대가 시민들을 진압하는 일을 맡게 만들다니…!”
시영의 말에 채민우는 또 다시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건대 지금 그의 모습은 겨우 화를 내려는 것을 참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 일에 대해선 반드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채민우는 특경대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위해 자리를 떠났다. 홀연히 사라져가는 채민우의 등을 바라보면서 시영은 천천히 그에게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미소를 거두었다.
‘마음에 안 들어, 저 남자.’
시영은 속이 쓰려지는 자신의 배를 한 손으로 움켜쥐면서 생각했다. 하마터면 구토를 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15년 전, 자신이 어렸을 적에 겪은 그 끔찍한 일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벌처스같은 곳에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날, 자신은 벌처스 측에서 개발한 차원종 신경 독가스를 마셔 체내의 소화기 계통이 전부 망가져버려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때 자신은 학교 캐비닛 속에 갇혀 있었으니까.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때문에.
처음에 그녀는 절망했다. 독가스가 자신의 몸에 들어올 때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비단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당시 학교 안에 출몰한 차원종들이 신경 독가스에 중독되어 몸이 말라 비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본 시영은 생각했다.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 세상도 아름답게 망가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이 세상은 부조리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밖에 세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이런 시한부 인생을 살아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다짐했다. 이 세상이 불타는 것을 보고 싶다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운운해대는 지옥을 구현해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 방금 전, 채민우라는 남자였다.
그는 시영이 보기에도 옳고 정의로운 남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홍시영에게 있어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저렇게까지 타인을 생각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남자가 왜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 되었던 그 날에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이 꼴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 지옥 같은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시영은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비틀린 아름다움이 아닌, 진정한 의미로 아름다운 남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겨워.’
겨우 몸을 추스른 시영은 이제 완전히 모습을 감춘 채민우를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
[정말이지 시민의 안전밖에 모르는 남자로군요. 마음에 들어요.]
헤카톤케일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가기 전, 시영은 채민우에게 그렇게 말했다. 구로역에서도 그는 시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G타워에서도 여전했다.
“어이,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시영에게서 그 말을 듣고는 잔뜩 당황한 채민우를 뒤로한 채, 나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영에게 말했다. 그 역시 시영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꽤나 놀랍다는 눈치였다.
“당연히 거짓말이죠. 설마 제가 진심으로 그런 입에 발린 말을 할 것 같나요? 어차피 지금 같은 상황에 시민들은 소모품에 불과해요.”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채민우를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증오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왜 자신이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후에야 나타난 것일까.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책이 생각났다. 위험에 빠진 공주들은 항상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백마 탄 왕자들에게 도움을 받는 줄거리로 구성된 동화책이었다.
그 남자도 자신이 어렸을 적, 차원종 독가스에 중독되기 전에 자신을 구해주러 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시영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 **, **, **, **.’
그녀는 또 다시 배를 움켜쥐었다. 독가스에 중독되어 소화계가 엉망이 된 이후로는 항상 이 꼴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배가 아파지는 것이다.
‘정말 혐오스러워.’
시영은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상념들을 지워나갔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이제 자신은 죽으러 가야 하니까.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이 있었다.
채민우의 기억 소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영은 또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시영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온 겁니까?”
한 눈에 봐도 그가 자신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배가 쓰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분노로 인해 배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명명하더라. 시영은 생각했다.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저 앞으로도 열심히 특경대 대원으로 열심히 일해 달라는 말을 하려고 왔을 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어지간히 미움을 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영은 쓰게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이 그때의 저를 구하러 와주셨다면, 저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게 무슨…?”
시영의 말에 채민우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영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신의 품에 지니고 있던 기억 소거 장치를 꺼내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억 소거 장치가 작동하자 채민우는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시영은 힘없이 쓰러진 채민우의 모습을 보고도 그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악마같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저, 쓸쓸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의식이 몽롱해진다.
15년 전에 느꼈던 그 날의 감각과 매우 흡사했다. 이것이 죽는다는 것일까?
죽어가면서도 시영은 자신이 채민우를 먼저 생각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그를 먼저 떠올린 것일까.
다음에 시영이 떠올린 것은 그녀가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책이었다. 멋지고 잘생긴 왕자님에게 구해지는 공주가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시영은 자신도 저런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시영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그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게 내가 죽기 직전에 만났다는 거지만.’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 편으론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동화책에 나온 공주님들처럼 왕자에게 귀여움을 받고 그에게서 사랑이 담긴 속삭임을 듣고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비록 자업자득이긴 했지만 그녀는 왕자에게 미움을 받기만 했으니까.
‘안녕, 나의 혐오스러운 왕자님.’
시영은 조금씩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다음에 만날 땐, 나를 좋아해줄 수 있나요?’
링크에 있는 스포글을 보고 써 본 글입니다. 항상 고압적인 태도만을 취한 시영이 죽기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게 상당히 좋아서 쓴 글이데 꽤나 괜찮게 써진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