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별건 없고 세하가 멘붕하는 글

ZweiWing 2015-06-12 4

-본 글은 트위터에서 돌던 어느 해시태그를 소재로 삼아 쓴 글입니다. 세계관이라던가 원작과의 개연성이라던가 그런거 없습니다..
-어떤 해시태그를 사용했는 지는 제일 밑에 적어두었습니다.
-오타나 어법, 기타 오류를 발견,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미포 약 8천자 입니다.
-세하슬비 커플을 지지하지 않으신다면 살포시 뒤로 버튼을 눌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네가 날 불러내다니."

조용한 여름 강변, 산책로에 있는 벤치에서 소년은 오늘도 어김없이 게임기를 두들겼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늦게 왔으면 했다. 왜 벌써 왔을까. 소년은 소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더욱 게임기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창 집중하는 척,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이세하? 네가 부른 거 맞지?"

차라리 자신에게 실망해서 그녀가 이대로 돌아가버리면 어떨까. 그러나 바람대로 되지 못했다. 소녀는 화를 내며 세하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강제로 뽑아버렸다.

"이! 세! 하!"

한참 전부터 네가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알아차린 척 능청스럽게 짜증을 내 본다.

"아...너 언제 왔냐. 기다려 주면 어디 덧나?"
"네 앞에 5분은 서 있었어."
"그렇게 오래? 미안하게 됐다, 그래."

너란 녀석이 그렇지, 뭐. 다행스럽게도 그 화가 게임기 압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긴 임무 시간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에 따로 약속을 잡아 만난 것이니 게임기를 빼앗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왜 여기에 부른 거야?"

오후 아홉 시가 지난 시각. 오늘 하늘은 별 하나도 찾기 힘들 만큼 어두컴컴하고 암울했다. 운동 삼아 산책하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주민들이 발빠르게 지나갔다. 세하는 미리 챙겨 온 크로스백에 게임기와 이어폰을 넣고 슬비를 돌아보았다. 어디 갈 지는 말 안하고, 그저 할 말이 있다고만 하며 여기 나오라고 했지만 슬비의 옷차림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연한 핑크빛의 블라우스, 가슴에 달린 흰 리본. 소녀스럽게 팔랑거리는 치마.

어디 놀러가도 손색 없을 상태.

"그냥...너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슬비가 영문을 모른 채 세하를 쳐다봤다. 역시 다짜고짜 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해도...순응할 리가 없나.

"아무 거나 말 해봐."
"갑자기 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슬비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자, 세하는 급기야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들어 보였다. 남고생 특유의 꼬질꼬질한 접이식 지갑이 튀어나왔다.

"그...돈은 내가 낼 테니까 뭐든 말만 해."
"......"
"간단한 거라도 괜찮거든? 저녁은 먹었어? 디저트 카페라도 갈까? 영화 볼래? 쇼핑도 괜찮아. 옷이라던가, 네 머리끈이라던가, 정 할 일 없으면 나랑 오락실이라도......"
"농담이지?"

이 시간에 다짜고짜 사람을 부르더니, 뭐든 해 줄테니 말해보라고 한다. 슬비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 지 짐작도 안 되니까. 특별한 기념일도 아니고. 밤중에 덜컥 불러내서 이런 친절을 베풀 만큼 각별한 사이도 아니고.

"혹시 너, 크게 잘못한 일 있어?"
"아, 아니."
"그럼 왜?"

네가 이유 없이 내게 이런 선행을 베풀 리가 없잖아. 게다가 이건......

"...그냥 좀 받아들여 주면 안 될까."

아닌 밤중에 이 녀석이랑 데이트라도 하게 되는 걸까.

"......흠."

데이트라.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데다 자신은 아무 것도 준비한 게 없지만, 이 녀석이 왜 이러는 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들뜨는 기분인걸.

"그럼 네가 방금 말한 오락실이라도 갈까."

속는 셈 치고 맞춰 주자. 마냥 재미없기만 하진 않을 것 같다.

"그, 그러자!"

오락실에 같이 가 준다는 것 뿐인데 세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왜일까. 뭐가 그리 좋기에. 기쁜 일이 있는 걸까.

"따라와."




소년과 소녀는 그 근처에 있는 작은 오락실에 갔다. 게임기와 동전 노래방이 늘어져 있는, 평범한 동네 오락실. 가볍게 사격 게임부터 시작했다. 오락실에 온 적이 거의 없는 슬비의 게임 기록이 당연히 세하보다 못했지만, 같은 게임을 거듭할 수록 그녀의 컨트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걸 보며 세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전 속도도 빨라지고, 백발백중, 빠른 상황 판단.

"너 이거 엄청 잘하잖아?"
"오늘 처음 하는 건데."

하긴 매일같이 훈련하고, 차원종을 잡기 위해 직접 뛰어다니는 그녀가 이런 게임 쯤 금방 적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팀의 리더이니 상황 판단 능력은 존경스러울 만큼 뛰어나고.

"다른 게임도 할래?"

격투 게임, 보드 게임, 리듬 게임. 주로 세하가 방법을 가르쳐 주면 슬비가 금방 배우고 익히는 형식이었다. 반사 신경 만큼은 무서울 만큼 좋았다. 가르치는 보람이 정말 컸다. 이 녀석이 마음 먹고 게임을 하게 되면 자신의 실력 따위 금방 따라잡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되면 무섭겠지만, 꽤 즐겁기도 할 텐데. 앞으로 없을 일이기에 아쉽다.

"슬슬 나갈까."
"그러네. 늦었어."

열 시가 넘으면 청소년은 오락실 출입 금지다. 주인이 알아채고 쫓아내기 전에 조용히 나왔다.

"집에 안 가? 내일도 학교 가야하는 데."
"야, 이슬비. 이번엔 저기 가자."
"뭐? 잠깐만, 손은 놓고...!"

어디에선가 환한 빛이 퍼져나오고, 흥겨운 가락과 함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국립공원에는 작은 무대가 있었고, 여기선 수시로 인디 밴드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밤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여름의 열기를 날려버릴 듯한 기세로 소리를 질렀고, 기타리스트가 그에 부응하듯 괴성을 지르며 기타 줄이 끊어질 듯이 손을 놀렸다.

"무슨 밴드일까. 노래가 이상해."
"나도 몰라."

말로는 이상하다 했으면서, 슬비는 어느 새 공원의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끌고 다니려는 이세하의 속마음을 파악하려는 짓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때가 되면 보내주겠지. 불러낸 이유도 알아서 말해 주겠지.

"내가 불러내기 전에, 뭐하고 있었어?"

소녀의 옆에 같이 쭈그리며 앉았다. 슬비는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설거지. 저녁 먹은 그릇."
"보통 이 시간엔 뭘 해?"
"씻거나, 드라마를 보고 있었겠지. 집안일도 해야 하고."

자신은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었을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아마 게임이겠지.

"집안일?"
"혼자 사니까."

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그녀에겐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넌......"

밴드가 곡을 하나 끝냈는 지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졌다. 슬비도 다소곳하게 손뼉을 쳤다. 세하 마저 그녀를 따라 덩달아 박수를 쳐버렸다. 잠시 조용하더니 보컬이 다음 곡을 위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슬비 넌, 왜 차원종을 잡는 거지?"

노랫소리에 묻혀서 안 들렸던 걸까. 그녀에게서 잠시 대답이 없었다. 세하가 기다리다가 다시 물어보려고 하자, 슬비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잡고 싶으니까."
"......"
"그게 아마,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니까."

아니야. 세하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가혹한 이야기잖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라니. 그럼 넌 클로저를 그만 두면 사는 걸 포기하고 죽어 버릴 거야?"
"...클로저를 그만 둔 후의 나에 대해선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럼 지금 생각해 봐. 살아갈 이유를 더 만들어 보라고."

세하 이 녀석,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만들어 내라면 못 만들 것도 없지만, 슬비는 이 녀석과 같이 있는 지금 순간이 갑자기 찝찝해졌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든, 그걸 왜 네가 신경 쓰는 거지.

"여태 보다 만 드라마의 완결도 봐야하고, 좋아하는 배우의 행보도 지켜봐야 하고. 부모님 제사상도 내가 아니면 차릴 사람이 없고. 자, 더 만들어 봤어."
"......"
"이세하 너도 이런 이유는 있지 않아? 네 게임 계정이 아깝다거나, 못 깬 게임들이 많다거나, 기다리고 있는 시리즈 게임이라거나......"
"아니, 그게, 맞, 맞긴 한데, 그게."
"인정하기 싫어?"

설령 이세하 본인이 살아가는 이유를 슬비가 정확히 맞췄다고 해도, 수긍해서는 안 되었다. 오늘만큼은 그래서는 안 됐다. 슬비에게 하나라도 더, 살아가야 할 이유를 붙여주고 싶었다. 쉽지가 않다. 빌어먹을 일이다...

"딱, 내게는 그 정도가 좋다고 생각해."

슬비의 입술이 살며시 웃는다.

"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 따위를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해."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은, 그들이 말하는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세하는 슬비의 말에 집중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일 차원종과의 싸움에서, 시민의 안전을 위해 내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테니까. 삶에 큰 아쉬움이 있다면 망설이게 되겠지."
"시민을 위해서 내 한 목숨 아깝지 않게 버릴 줄 알아야 클로저라고 할 수 있나? 아니잖아.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맡은 이런 역할 때문에 목숨을 버리라는 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세하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슬비는 맞서서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맞아'라고 수긍했다. 세하의 떨리는 눈을 보며 웃는다.

"누구도 네게 죽으라고 할 자격이 없어."
"넌......"
"난, 이제 잃을 게 없으니까. 내가 희생됨으로 인해 세상에 끼칠 영향은 별로 없는걸. 넌 달라. 네겐 가족이 있고, 친구들도 있고, 탄탄한 미래도 있어. 그러니 함부로 죽지 마."

힐끔, 그녀의 눈이 무대로 향한다. 밴드의 신나는 노래에 흡사 광분한 것 같은 시민들이 춤을 추고 호응했다. 슬비는 그들을 보며 참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너무 신경 쓰지 마. 너 마저 희생을 당연히 여기라고는 안 했으니까. 난, 기왕 죽을 거라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면서 죽겠어. 줄곧 사람들을 지키며 차원종을 섬멸하기 위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그리고...그런 죽음이면 기꺼이 받아 들일 테니까."

슬비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붙은 잔디가 없는 지 치맛자락을 확인하며 손으로 옷을 탈탈 털었다. 세하도 일어났다. 말없이.

"날 불러낸 이유는 언제쯤 설명할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 해 본다. 열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세하는 일단 이곳을 뜨기로 했다. 여긴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대체 뭘 하려고. 슬비는 그를 잠시 흘겨본 후 발걸음을 뗐다.

"근처에 인적 없는 곳을 알고 있어."
"그래?"
"너도 아는 곳이야. 이쪽으로."

슬비가 아무 의심하지 않고 하자는 대로 따라와 줘서 다행이었다. 아니, 불행이었다. 슬비가 자신을 말려줬으면 했다. 저 공연을 계속 보자고 조른다던가, 피곤하니 돌아가자고 하거나.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점점 그들은,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세하는 슬비가 말한 그 '인적 없는 곳'이 어디 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오랜만이다, 여기."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이제는 꽃이 다 지고 초록빛 나뭇잎만 무성한 벚꽃길. 차원종이 휩쓸어간 후 오염된 땅이 된 이곳은 함부로 사람이 오고 갈수 없게끔 통제되고 있었다. 여기라면 인적이 없는 게 당연하지.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보는 사람이 절대로 없겠지.

"그때가 언젠데...여긴 아직도 폐쇄되어 있네."
"그게, 그 후로도 가끔 차원종이 출현하는 모양이야."

그 정도의 위험이야 클로저인 그들에겐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합성 식물들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을 뿐이겠지. 일단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장소에 둘 뿐이었다. 폐쇄된 공원에는 가로등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슬비는 뒤에서 걸어오던 세하를 잠시 돌아보았다가, 앞으로 조금 뛰어갔다. 저 멀리에 신서울의 풍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름다운 야경이다.

"내년 봄엔 제대로 복구가 완료 됐으면 좋겠다. 놀러오기 좋겠지?"

바람소리가 귀를 메웠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심지어 허밍으로 어떤 노래도 부르고 있었다. 방금 인디 밴드가 공원에서 불렀던 노래의 가락이었다. 그새 귀에 익었던 걸까. 정신없고 시끄러웠던 음악이었지만 그녀가 대강의 가락만 흥얼대는 걸 듣고 있자니 마냥 요란한 음악은 아니었던 듯한 착각도 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어깨에 걸쳤던 크로스백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세하의 손에는 미리 준비해 온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래서 이세하, 대체 넌-"

철컥.

쇠끼리 부딪히며 나는 쇳소리였을까. 흡사 열쇠를 문고리에 넣고 돌리는 소음같았다. 아니, 평소 작전 수행 중에 수도 없이 들었던, 익숙한 소리. 슬비는 하던 말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차가워진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 모두 눈이 경직되어 버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색 구멍이었다. 어떤 도구를 쥔 그의 손, 흔들리는 팔, 깨물린 입술.

"너......"

진동하는 검은 총구에서 잠시 눈을 뗄 수 없었다. 슬비는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뒤로 조금 뗐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왜? 아니면, 살려달라고 해야 하나?

"날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했구나."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 세하가 고개를 저었다.

"널...죽여야 한다고 했어. 오늘 안에."
"......"
"그러지 않으면...신서울이 멸망할 거라고..."

무슨 말일까. 세하가 쥔 총은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저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갈 것이다. 저 위치에서 총을 쏘면 자신은 아마 머리를 뚫리고 즉사하겠지.

"만일 내가 죽이지 않으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널 죽이러 온다고 했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군지도 대강 알 것 같았다.

아.

"이럴 생각으로 나를 불러냈구나."

그녀의 미간을 노리는 총기의 끝을, 세하는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초점이 흐려졌다. 어떤 말을 해도 변명이 될 뿐이다.

슬비를 오늘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 죽이라는 명령. 죽이지 않으면 신서울이 쑥대밭이 될 거라고. 자신은 그녀를 정말 죽일 생각으로 불러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었지만 이게 끝이라는 생각은 하기 싫었다.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퍼부어 줬더라도...이제 죽을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겠어.

"아, 이슬비......"

자신을 바라보는 슬비의 눈이 떨렸다. 맑은 눈동자가 끊임없는 생각 속을 떠돌고 있었다. 아,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욕해줬으면. 죽고 싶지 않다며, 웃기지 말라며 총을 들고 있는 이 손을 후려쳐줬으면.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되잖아.

"빨리...도망가."
"......"
"내가 이렇게...망설이는 사이에...도망 쳐."
"그럼, 신서울이 사라지는 건....."
"시끄럽고 얼른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려! 꺼지라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도시를 구한다. 효율로 보면 정말 훌륭한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왜 하필이면 그녀인가. 하필이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가. 다 필요 없어. 누구에게도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권리는 없잖아. 믿고 싶지 않아. 믿지 않아.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모르겠지만 네가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싫어.

"제발, 부탁이니까...도망쳐. 내가 널 쏘지 못할 정도로 멀리, 보이지 않게. 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목을 치고 올라오는 울먹임을 간신히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총을 든 손이 무엇을 노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방아쇠 위에 걸쳤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아무 대답이 없었으면 했다. 혹은 그녀가 자신에게 폭언이라도 쏟았으면 했다. 미워하고 살고 싶다고 빌었으면 했다. 자신이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줬으면 했다. 그러나 슬비는 그러지 않았다. 도망칠 그녀가 아니었다. 오늘처럼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야속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신서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괜찮으니까."
"......"
"여기...있을 게."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듯, 그녀는 두 팔을 펼치며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도망치면 다른 사람들이 전부 위험하다며. 다른 방법이 없다면, 알았어. 자."
"야......"
"걱정 말고, 쏴."
"안 돼, 난......"
"내려 갔잖아. 똑바로 들어."

고압적인 그녀의 말투에 저도 모르게 총을 쥔 손을 다시 똑바로 들었다. 시큰거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총 끝이 그녀의 인중을 노렸다. 세하는, 잠겨버린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하고 싶은 말 있어?"

총 끝을 가만히 보던 슬비가 눈을 깜빡인다.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글쎄, 이럴 줄 알았으면 유언을 평상시에 미리 생각해 둘 걸.'

"음...조금, 아쉽긴 해. 네 어머니처럼 되고 싶었는데."
"우리 엄마?"
"응. 알파퀸처럼. 전설적인 클로저, 훌륭한 위상능력자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꿈이었거든."

거기까지 말하고는, 슬비는 아, 하고 짧은 감탄을 터뜨렸다. 무언가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리내어 조금 웃더니, 밝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어."
"뭔데?"
"안 한다니까."
"궁금하니까 말 해. 마지막이잖아."

바보같이. 이 총알이 정말 나가버리면, 넌 영영 잠들어버리게 된다고. 안 하는 게 좋을 말이 어디 있어. 뭐든 다 하고 가.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 가.

"정말 말해도 돼?"

무엇이든 좋았다. 어떤 말을 들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들을 사람이 저 하나 뿐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라고. 세하는 그리 생각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 네가 좋아."
"......"
"널 좋아해, 이세하."

역시 숨기는 게 좋았을까. 그녀가 쑥스럽다는 듯 웃다가 불현듯 화를 냈다.

"그, 내가 널 엄청 구박하긴 했지만. 난 리더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가 말을 안 들어도 엄청 안 들었다고."

꿋꿋하게 있으려고 했는데, 역시 이런 말은 총을 마주하고 뱉기 힘들어서, 슬비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한 번 말하기 시작하니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어 졌다는 듯, 풍성하게 늘어진 나무들을 보며 쌓았던 말들을 속사포로 쏟아내 버렸다.

"싸우다 정이 든다는 게 이런 건가봐. 맞아, 이거 꼭 사과하고 싶었어. 언젠가부터 너한테 잔소리하는 게 즐거웠거든. 네가 내 명령 때문에 기분 나빠하고 맞대꾸하고 화내는 것도 좋았어. 우습지, 그냥. 넌 정말 화가 나고 답답했을 텐데. 미안해. 그동안 힘들게 해서."

왜 눈물이 흐르는 지 몰랐다. 억지로 괜찮은 척 웃으며 손등으로 훔쳐냈다.

"미안해, 이세하. 미안해, 정말, 미안. 역시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한텐...이제 와서 이러면...안 되는 데......"

들었던 총을 결국 내려 놓았다. 말도 안 돼.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을. 왜? 난 이제 널 죽일 사람인데 왜 그런 말을 해? 좋아한다는 말을 왜 이제서야. 조금만, 하루라도 더 빨리 했으면 좋았잖아. 이제 네게 내가 줄 수 있는 거라곤, 영원한 안식 뿐이라고. 나를 향한 네 고백을 내가...받아 들이려면...나는......

"난...이슬비, 나는......"

나도 네가 좋아. 지금 이 순간이 미치도록 슬프고 아프고, 너를 잡고 싶고, 당장이라도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나도 좋아한다고. 쭉 좋아해왔다고. 늘 너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나 참기만 했는데.

"대답...하지마."

들어 버리면 이 죽음에 미련 남아버릴 까봐.
이 마음을 전해버리면 너를 평생 그리게 될까봐.

세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 안이라며. 자, 빨리. 끝내. 난 할 말 다 해서 후련해졌거든?"

총을 다시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하는 하염없이 흐려진 시선으로 그녀를 보기만 하다가 주저앉아 버렸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너를 죽이지 않고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영영 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으면......

"......"

그녀가 뭐라 외친 듯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목놓아 울었다. 미쳐버릴 것 같다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가지 말아. 차라리 나를 싫어한다고 하지 그랬어. 네가 대체 뭔데 이토록 힘들게 하냐고. 내 인생에 너란 녀석은 왜 나타나서, 왜, 왜, 왜!

"이런 것까지 내가 해줘야 하니?"

정신없이 울다가 퍼뜩 다가온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코 앞에 있었다. 따뜻한 손이 맞닿았을까.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그녀가 가져갔다. 자신의 손에 쥐어 있던 물건이 뭐였더라. 어째서인지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빈 손을 들어보았다. 없었다. 총이. 총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아, 안 돼...!"
"잘 있어, 세하야."

어느 새 빼앗긴 총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멍하니 있던 세하가 황급히 일어났지만, 슬비는 그가 뻗는 손을 ** 못했다. 꽉 감긴 눈꺼풀이 떨렸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이마 옆, 검고 아득한 구멍에서, 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지나가고, 총성이 울려퍼지고, 핏줄기가 터졌다. 그 손에 들린 총을 황급히 빼앗았지만 이미 사건은 터진 뒤였다. 힘없이 품에 안긴 머리에서 따뜻한 액체가 흘러 가슴을 적셨다.

"일어나, 슬비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작은 어깨다. 감은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 그녀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불러도 없을 대답을 기다렸다. 껴안은 육체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지금은 따뜻하지만 곧 식어버릴 온기를 만졌다. 머리에 붙였던 입술을 떼고, 천천히 눈을 감을 채로 얼굴을 더듬었다. 벌려진 입술을 찾아 천천히 혀를 집어 넣었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이 입술을 괴롭혀도, 네 허리를 끌어안아도, 품에 파고 들어도, 너는 일어나지 않아......

은은한 분홍빛이던 블라우스에 묻은 붉은 자국이 눈에 아프도록 선명했다. 여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이제서야 널 안아본다, 이슬비.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며 그 품에 울분을 쏟았다. 식지 않을까 싶어 끌어안고 팔을 부비다가, 그마저도 너무 서러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부르기만 하고, 울고, 널 그리워 하겠지. 이슬비. 이렇게 가버린 너를, 붙잡지 못했던 나를 끊임없이 원망하겠지.

밤 공기가 찼다. 내던져진 권총의 몸체만 세상 모르고 달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처음 말씀드렸던, 소재로 사용했다는 트위터 해시태그는, '#최애커플_왼쪽에게_총이_있고_5분_내로_오른쪽을_죽여야_지구의_멸망을_막을_수_있다면' 아마 이거였던거 같네요. 스토리를 위해 5분을 그날 자정으로 바꾸고 지구 대신 신서울 멸망으로 바꿨습니다.

클저 공홈에는 글 처음 올려보네요. 감사합니다. ...슬비 상향을 기원합니다.
2024-10-24 22:28: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