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단편) 용의 전당 61층
미얄의추천사 2015-06-11 0
"...후우..."
땀이 비오듯 턱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들은 위상력이 담긴 모래입자들을 적시며 사라졌다.
양 손에 들고 있는 칼은 먼지에 뒤덮히고, 갈라지고 이가 빠졌지만 분명히 그 원래 모습은 매우 예리하고 날카로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발 밑에 있는 차원종들이 모래먼지로 흩날려 그의 몸 속으로 흡수됐다.
얄궂은 일이었다. 이미 위상력을 전부 잃었다고 생각한 그가 비록 모래로 만들어진 차원종이지만 그들을 쓰러뜨리며 얻는 모래 위상력 입자로 위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
S급 차원종 아스타로트. 제 3 위상력의 차원종이자 데미플레인의 용의 군단의 군주이자 헤카톤 케일을 배신하고 군단장의 자리에 오른 자. 이미 A급 클로저의 능력과 기술을 아득히 능가하고 과거 '알파 퀸' 으로 불리었던 서지수에 버금가는 천재 클로저인 그가 아스타로트의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미 벌처스가 아스타로트의 데미플레인을 신서울에 강림시키기 위한 작업의 밑준비에 들어갔다는 사실. 데미플레인이 신서울에 강림하는 날이 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신서울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인류 전체의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신서울 지부장은 물론이고 그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데이비드 리. 그 자까지 연루돼 있다는 사실.
데이비드 리가 모든 것이 완벽했던 김기태를 S급 요원의 자리에 올리지 않은 이유는 단지 인성이 부족해서라는 믿기 힘든 그 한마디 였다.
김기태는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입에 물고 있는 막대사탕이 처참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막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위상력 상실증, 이 저주스러운 병만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히 벌처스와 데이비드의 계략를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위상력은 많지 않았다.
"절망할 시간이 없어. 난... A급 클로저 김기태. 반드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내야해..."
신서울 일대를 지키는 것이 사명인 그가 절망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맡을 뻔했던 아이들 '검은양'.
비록 김기태가 그들과 접촉하여 검은양이 더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데이비드는 일부러 유능한 클로저인 김기태보다 이미 몸이 성치 않고 아이들을 지킬 여력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J를 붙여놨지만. 이것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계책이자 벌처스의 구멍이었다.
다만 김기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했다. A급 클로저의 직위도, 자신을 믿고 따르는 B급 클로저 세린도. 그리고 인류의 희망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검은양은 훌륭하게 성장했고 벌처스의 계획을 부수고 있었다. 검은양 팀이 임무를 떠난 동안 독방에 갇힌 김기태에게 데이비드가 찾아왔다.
"이 빌어먹을 쓰레기 자식."
데이비드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데이비드의 눈동자에서는 김기태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렸다.
"네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이유가 뭐지? 네놈은 그렇게 클로저의 권익이 중요한게 아니었나?! 벌처스와 나의 계략이 성공했으면 벌처스의 입지는 물론 유니온과 클로저의 입지도 크게 올라갔을거야!!! 근데 왜!!!"
데이비드가 책상을 내리쳤다.
"...클로저의 권익. 물론 중요하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클로저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차원종들과 싸우고 있고 죽어가지만 시민들에겐 좋지 못한 소리만 듣고 유니온은 클로저들을 한낱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지 않나."
"그래, 바로 그런데 왜 네놈이 다 완성된 계획에 초를 친거냔 말이다!!"
김기태는 피식 웃었다.
"4년 전 시간의 광장 사건..."
데이비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때 아주 작은 차원문이 열린 것만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지?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4년 전 칼바크 턱스가 일으킨 시간의 광장 사건.
그 때 김기태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 당시 이미 최연소 A급 요원의 자리에 오른 그가 그 장소에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민간인들이 차원종들에 의해 희생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심지어 같은 클로저의 손에 의해 희생되는 모습도.
4년 전의 김기태는 보이드 타입 차원종들에게 포위당한 민간인들을 지키고 있었다.
위상력을 발휘해서 그 즉시 모든 차원종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지리적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범위가 넓고 강력한 기술을 사용했다간 민간인들이 말려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건물 역시 지반이 많이 약해졌다는 점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평소라면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하급 차원종이지만 그 순간 만큼은 매우 힘든 적들이었다.
-여기는 A급 클로저 김기태. 지금 당장 시간의 광장 B동 3층에 지원인력 투입 바란다.-
[알겠다. 지금 지원 클로저드... 아앗!]
무전으로 교신하던 팀원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시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좋은 미소의 형, 데이비드 리였다.
[김기태. 내 말 들리나.]
-데이비드 형! 지금 여기 시간의 광장 B동이야! 근데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아. 큰 기술을 사용했다간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데이비드 리라면 분명히 그에게 어떤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담한 한 마디였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들을 버리고 당장 A동 지하 1층으로 이동해라.]
-뭐?-
김기태는 그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잘못 들은 것일거라 생각하며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무전을 체크했다.
-이거 참... 무전이 이상하네. 데이비드 형 다시 한 번 말해줘. 뭐라고?-
[반복한다. 민간인보다 A동 지하 1층 국회의원의 구조에 주력해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곳에는 수십명의 민간인들이 있다고!!!! 내가 이들을 버리면 도대체 누ㄱ...-
분노하는 그의 말을 칼같이 자르고 데이비드 리가 다시 한 번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A급 클로저 김기태. 지금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는건가. 지금 지하에 계신 의원님은 클로저 권익 향상안에 대해 찬성하시는 귀중한 찬성파이시며 집권당의 높은 분이다. 모든건 클로저의 권익을 위해서야.]
-그게 뭐가 권익이야!!!-
김기태가 분노하며 고함을 지르자 건물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거칠게 발해지는 위상력에 차원종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명령에 불복하면 나는 지금 벌처스 처리부대를 투입해서 너를 명령 불복종 죄로 잡아넣을 수도 있어. 지금 나에게 민간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김기태 요원. 내가 신호만 내리면 지금 즉시 벌처스 처리부대가 투입된다.]
그 말에 김기태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거친 위상력들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김기태는 이빨을 뿌득 갈았다.
-...A급 요원 김기태. 호위 임무를 시작한다...-
[잘 생각했군. 모든건 클로저의 권익을 위해서다.]
김기태가 사이킥 점프로 뛰어오르기 위해 자세를 잡을 때 한 남자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눈매는 조금 날카로웠지만 선량한 눈동자의 갈색 남자였다.
-제발... 제발 가지 말아주세요... 저에겐 오늘 생일인 소중한 딸이 절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절망이 가득찬 그의 눈동자에 김기태의 마음이 흔들리려 하자 어디선가 날아온 위상력이 담긴 칼날이 남성과 민간인들이 서있던 곳의 바로 위쪽 천장을 꿰뚫었다.
-안 돼!!!!-
김기태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처참하게 무너진 잔해와 그 밑에 깔린 민간인들의 비명이었다.
"이래놓고 클로저의 권익? 웃기지도 않는군."
그 순간 데이비드의 주먹이 김기태의 뺨을 강타했다.
"퉤."
김기태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쓰레기가... 네놈은 곧 인류에 대한 반역 행위로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내가 특별히 신경 써주도록 하지."
데이비드가 그를 내려보고는 독방을 빠져나갔다. 김기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곧,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검은양 팀원들이 자신의 소망을 이뤄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위상력을 짜내 손을 구속하던 수갑을 가볍게 끊어내었다.
"나에겐 아직, 버릴 것이 남아있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그의 희망은 실현될 수 없을 것이었다.
김기태는 아스타로트에게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더 큰 대의를 위해. 그는 평생 누구에게도 스스로 숙여본 적 없던 머리를 숙였다.
일부러 이상한 지시를 내려서 군단의 전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검은양 팀과 조우한 그는 놀랍도록 성장한 검은양의 실력에 감탄하며 생각했다.
검은양 팀은 어느 샌가 훈련생 시절의 얼빠지고 나약한 모습이 아닌 클로저와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믿음직한 정식요원으로 성장해있었다.
'이 정도면... 믿고 맡길 수 있겠어.'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검은양은 인류와 김기태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다시 한 번 아스타로트를 찾아간 그는 아스타로트의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네 이놈... 감히 짐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그런 주제에 감히 힘을 더 달라니 뻔뻔하구나! 그 죄값은 네놈의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아스타로트의 분노에 온 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아스타로트가 김기태에게 공격하는 그 순간이라면. 지금 아스타로트의 힘을 일부나마 받았기에 김기태의 몸 안에 있는 제 3 위상력의 힘으로 아스타로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그의 등 뒤에 시선이 느껴졌다. 검은양 팀원들이었다.
'하필 이 순간에...!'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인류의 배신자로서 남아있어야 된다. 김기태가 아스타로트를 공격이라도 하는 순간, 김기태가 쌓아온 모든 것이 뒤틀릴 수도 있다. 마지막에 엇갈린 퍼즐 한 조각.
"...믿어볼 수 밖에."
김기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남긴 마지막 퍼즐을 검은양 팀들이 맞춰줄 것이라 믿으며 그는 아스타로트의 공격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떨어진 곳은 기묘한 공간이었다.
김기태가 눈을 뜨자 바닥에 쌓인 모래에서 차원종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지휘했던 차원종들의 몸에서는 묘한 위상력이 뿜어지고 있었다.
김기태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아스타로트 놈이 자신의 분신과 차원종들, 그리고 자신이 잡아온 클로저를 넣고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용의 전당."
김기태는 등에 있던 두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지금까지 김기태가 봐왔던 수많은 부조리들, 차원종에게 죽어나간 동료들과 민간인들의 한을 담아서 내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 용의 전당에서 마음껏 분풀이를 해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차원종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김기태는 쉬지않고 싸웠다.
김기태가 쓰러뜨린 모래 차원종의 위상력은 그의 몸으로 흡수되고 조금씩 그는 전**의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도한 용의 전당 60층에서 그는 아스타로트의 분신과 마주했다.
용의 전당의 최상층, 아스타로트의 의식이 남아있는 아스타로트의 분신.
"버러지 같은 인간놈이 여기까지 올라온건 칭찬해주겠다. 하지만 인간이 강해져봤자 인간. 네놈의 목숨은 여기서 끝일지니 짐은 새로운 도전자를 기다려야겠구나."
"그 입 다물어라 아스타로트. A급 요원 앞이시다. 받아라-"
-산들바람 베기!!!-
김기태의 목소리가 용의 전당에 울려퍼졌다.
용의 전당 60층. 아스타로트의 모래입자까지 흡수한 그의 표정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닥에는 부러진 아스타로트의 검과 찢겨나간 옷자락이 남아있었다.
김기태가 아스타로트의 옷자락을 망토처럼 몸에 두르고 60층의 아스타로트가 앉아있던 옥좌에 앉았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용의 전당의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용의 전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당의 지배자시여. 전당을 이동시키겠습니까?-
"그래."
-전당을 이동시킵니다. 목적지를 말씀해주십시오.-
김기태는 빙긋 웃었다.
"목적지는. 신서울."
-신서울로 이동합니다.-
용의 전당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기태는 용의 전당의 옥좌를 통해서 바깥 차원을 보고 있었다. G타워의 차원문은 닫혔다. 아스타로트는 쓰러졌고 벌처스와 데이비드의 계략는 무산됐다.
비록 데이비드는 이번에도 솜씨좋게 빠져나갔지만 언제라도 다시 그 잘난 클로저의 권익을 위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니 검은양은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 김기태는 그들이 강해지기 위한 공간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김기태는 용의 전당에 숨겨진 비밀의 방.
61층에서 신서울을 수호할 것이다.
신서울이 위험에 빠진다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스스로 배신의 오명을 짊어진 숨겨진 인류의 영웅 김기태는 다시 한 번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