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증명(하)
부르짖다지쳐죽을 2015-06-03 0
“제이씨. 이제 좀 괜찮은 거예요?”
“응, 그럭저럭 견딜만해. 유정씨가 걱정해주니 더 빨리 나을 거 같아.”
“우와, 아저씨. 일어나자마자 유정언니한테 작업하시는 거예요?”
“유,유리야..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우웅? 작업? 제가 아는 작업이란 단어랑 다른 거예요?”
금세 병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이 시간에 다들 왜...
“뭐야, 너희들. 이미 차 끊길 시간이라고? 안 들어가? 거기다 테인이까지? 넌 얼른 안자면 키 안 큰다?”
“괜찮아, 유정언니가 차 운전할 줄 안대. 그리고 이 병동 위상능력자 전용병동이라 입원해 있는 사람도 아저씨뿐이니 자고 가도 상관없을 걸?”
“서유리.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시끄러운 와중에 유정누나가 내게 왔다.
“..세하야. 오늘 있었던 일...”
“...알아요. 제가 무모했단 것도요. 죄송해요. 누나.”
“....제이씨가 따끔하게 혼냈을 테니 나도 더 이상 말 안할게. 네 말대로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은, 완벽한 도덕적 이상을 흉내 내는 것일지도 모르지. 누군가를 목숨을 바쳐서 지키는 것 따위 사실은 누구라도 하기 싫겠지. 우리는 성현군자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누군가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는 죽을거야. 그렇기에 사람은 자기가 강자가 아님을 알아도 흉내를 내며 맞설 수밖에 없어. 다른 누군가의 슬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은 없다 여겼는데.
“세하는 머리 좋으니까 누나말 알아들었지? 그러니까 다신 그렇게 무모한 일 하지 마.”
“....네.”
“유정씨, 방금 그 말 멋졌어, 진짜 반하겠는데?”
“무, 무슨 소릴하는 거예요?! 여하튼 우리 팀은 물불 안가리는 게 문제예요. 조금은 관리요원의 입장도 생각해주세요. 이러다 걱정병으로 죽는 거 아닌지 몰라.”
유정누나가 토라진 듯 말했다. 잠깐 찾아온 정적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슬비였다.
“민폐야. 이세하. 제이아저씨 말마따나 게임감성에 동화 되서 영웅놀이나 해대고. 그런다고..특경대원 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슬비야. 세하도 많이 혼났으니까.응?”
“....팀의 리더로서 말하는 거야. 눈앞에서 특경대원분들이 죽는 걸 본거에 대해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걸 다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자책하며 자멸하는 거 넌 그런 사람 아니잖아. 게임과 착각 하지마. 넌 게임 속 영웅이 아니야. 작전 중 일어난 모든 일에 네가 책임을 질 필요 없고, 그걸 위해 네 목숨을 걸어가며 복수할 필요 없어. 넌 이세하야. 유니온 최고의 요원이자 차원전쟁의 영웅, 알파퀸 서지수가 아니잖아.”
게임 속 영웅. 알파퀸 서지수. 그런건가. 내 행동의 아귀가 맞물려 간다.
“슬비가 말이 좀 심하긴 했지만, 슬비 말이 맞아. 난 복잡한 말은 잘 못하니까, 으음..그러니까, 에잇 몰라! 그냥 난 지수 아줌마의 아들 이세하보다 게임폐인 이세하가 더 좋아.”
“세하형. 전 아직 한국에 많이 서툴러요. 세하형한테 어떤 과거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세하형을 좀 더 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까처럼 세하형이 그런 선택을 해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전 더 이상 세하형을 알아갈 수 없잖아요. 그런 건..싫어요.”
테인이가 말을 마치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내가 한 행동에 의미를 깨달은 후여서 그런지 그저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모두. 정말 미안해. 앞으론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을게. 약속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유리였다.
“아직, 12시 안됐으니까, 슬비야.”
유리가 채근하자 슬비가 표정을 풀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마도 병실 밖에 두었던 무언가를 염동력으로 가져오는 듯했다.
“...오늘 작전이 끝나면 본부에서 해산하기 전에 할 계획이었는데, 주인공께서 자기 생일을 확실히 망쳤으니 원망 하지 마.”
슬비가 가져온 상자에 들은 케이크는 예년보다 좀 더운 더위에 이미 생크림이 많이 녹아내려 볼품없어 보였다.
“미안해, 세하야. 다시 살까했는데 제이아저씨가 실려 가고 너도 다쳤다길래 뒷정리 끝내는 대로 바로 병원으로 오느라 살 여유가 없었어.”
많이들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밀어진 그 케이크는 여기저기 찢기고 다쳐 붕대를 감은 나와 닮아 있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꼴사나운 내겐 정말 잘 어울리는 걸.
“....케이크는 이 꼴이어도 할 건 할 수 있지. 촛불 켜자.”
제이 아저씨 말에 모두 동의한 것처럼 움직여 병실의 불이 꺼지고 촛불만이 밝게 빛났다. 그 따스한 느낌에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해. 노래 부르자. 생일 파티의 백미잖아.”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세하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해, 세하야.”
“생일 축하해. 이세하.”
“축하해. 동생.”
“생일 축하해요! 세하형!”
“세하야, 생일 축하해.”
여태껏 이정도의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라는 질문이 파고들었지만 빨리 잊어버렸다. 없었으면 뭐 어때. 앞으로 아등바등 살아서 받아 가면 되는 거지. 촛불을 끄자 병실의 불이 켜졌다.
“볼품없어도, 맛은 있겠지?”
케이크를 제일 기대하던 유리에게 케이크를 잘라 건냈다. 유정누나, 슬비, 테인이한테 주고 아저씨에게도 한 조각 건네려던 찰나,
“아. 아저씨, 환자인데 이런 거 먹어도 되요?”
“나 수술한 거 아니다. 위장은 멀쩡해.”
라고 말하는 아저씨의 눈빛에서 케이크를 향한 열망을 알 수 있었기에 한 조각 크게 잘랐다.
“...아저씨께는 오늘 신세졌으니까. 많이 드릴게요.”
아저씨가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 고마운 걸, 동생이 형님을 이리 생각해 줄줄은 몰랐어!”
케이크를 건네는데 아저씨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세하야. 아까의 연장선인데, 네가 클로저가 된 건 선택의 자유가 없었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클로저는 너를 증명해내는 수단이 될 수 있어. 그렇다면, 네가 이세하라는 걸 증명하게끔 기회를 준 부모님께는 감사해야겠지?”
아저씨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조용해져 버린 병실을 뒤로하고 병동을 걸었다. 이 병동에 아무도 없는지 조용했다. 조금 걸어간 끝에 야외정원이 있었다. 유리문을 밀어 내려선 그곳에는 밤하늘의 별을 내쫓고 자신들이 별이라는 것 마냥 자리를 잡은 도심의 야경이 펼쳐졌다. 작전은 하나뿐이었는데, 몸과 마음은 배로 무거웠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깊숙한 것까지 꺼내보여서 그런 건가.
어렸을 적엔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엄마가 주지 않는 관심을 그들이 주었으니까. 하지만 주변은 나로부터 엄마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내게 엄마를 강요했다. 그들은 내가 알파퀸처럼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당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알파퀸을 내게서 찾을 때마다 난 알파퀸이 아니게 되는 방법을 찾으며 도망쳤고 결국 난 그렇게 고립되었다. 그때 든 생각은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이럴 거면 왜 낳았냐고, 나를 돌아봐 줄 것도 아니면서. 엄마의 그늘에 날 방치 해둘거면서. 그렇게 이유를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답을 얻었다. 엄마가 나를 낳은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내가 존재하는 데에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를 증명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까부터 아파왔던 머리가 조금씩 괜찮아지는 듯했다. 그 증거로 차원종의 출현을 연상시키는 이 서늘한 밤공기조차 기분이 좋다.
어쩌면 엄마가 날 검은양 프로젝트에 참가시킨 것도 알파퀸의 아들이 아니라 이세하를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자신의 그늘에 가려지지 말라고. 나에게서 이유를 찾지 말라고.
불현 듯 아까 아저씨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전화하면 받으실까. 손에 땀이 조금 배어들었다. 익숙한 번호지만 한자리 한자리 또박또박 누르는 건 어색한 느낌이다. 신호음이 오늘따라 더 긴 듯한 건 착각인가.
핸드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해야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말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의 추진력을 받은 것처럼 입이 열리고 목구멍을 통해 그것을 토해내었다.
"엄마,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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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으로 올리려던 글이었는데 이렇게 길어질줄은 몰랐습니다.
한글에서 복붙이라 글자가 이상한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러가기전 다시 한번 세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아, 오그라든 손발은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