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증명(상)
부르짖다지쳐죽을 2015-06-03 0
세하 생일 기념글입니다.
상하편으로 나누어집니다.
설정을 꼼꼼하게 체크하지 못해 어긋난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해서 봐주세요.
스크롤 압박이 좀 심합니다. 여유 있게 읽을 수 있을 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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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게 울려대는 자명종소리에 이불이 둘둘 말려있는 형상에서 손이 뻗어나와 더듬거려 자명종을 껐다. 그 형상은 일어나기 싫은 듯 한참을 뒤척이다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구르듯이 나와 일어났다.
“으...졸려... 몇시에 잤더라..”
까치집으로 산발을 한 검은 머리의 소년이 반쯤 감긴 눈으로 좀 전까지 알람이 울려대던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생각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지 시계를 내려놓고는 배를 벅벅 긁어대며 방문을 열었다.
존재의 증명
소름돋을 정도로 조용한 집안에 나는 엄마가 오늘도 들어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뭐, 늘상 있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알람시간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맞춰두었기 때문에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씻고나와 머리를 말리며 제일 먼저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은 오전 8시 10분. 좋아 아직 등교시간까지는 여유 있네. 날짜는....
“6월 3일...”
하필 가뜩이나 피곤한데 달갑지 않은 날까지 겹치다니 오늘은 운이 없을지도. 한숨을 한번 쉬고는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들은 것과 동시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이 시간에 올 연락은 친구한테서, 아니면 출동지시 둘 중 하나다. 마치 운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출동연락이었다. 꺼내든 교복을 다시 옷장 안에 넣고 대충 걸쳐둔 요원복을 집어 들었다. 옷장 속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교복을 보며 교복을 입은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도 잠시 서둘러 재해복구본부로 향했다.
본부에는 유정 누나가 동분서주하며 지휘하고 있었다.
“유정누나, 저 왔어요.”
“세하야. 어서와.”
“다들 아직 안 온 거예요? 아무도 없네?”
“먼저 출동했어. 소수의 차원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거라 분산하는게 좋겠더라고.”
“그럼 제 위치도 얼른 알려주세요. 빨리 끝내고 게임이나 하러가게요.”
유정누나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세하 네가 맡을 곳은 이곳 강남 일대야. 곳곳에 건물 잔해들이 많아 전투장소가 좀 협소할거야.”
“하지만 범위기가 적은 제게는 안성맞춤이죠. 금방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하고. 네 상황은 본부에서 모니터링 하고 있을테니까. 그리고 스킬 큐브는 체크했니?”
“대충은요. 저번에 업그레이드 했다고 하는 충격파 스킬 큐브는 업그레이드 한걸 전혀 못느끼겠지만요. 아, 유성검 스킬 큐브는 수명이 다됐나 데미지가 좀 줄어든 느낌이에요.”
“음, 그럼 정도연박사님께 들렀다 가는게 좋겠네.”
“뭐, 어차피 고 위험 차원종은 출현하지 않았다면서요? 그냥 다녀와서 할게요.”
유정누나가 더 말하기 전에 작전통제기 앞에 섰다. 익숙한 기계음이 행선지를 물었다.
“강남 일대-.”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자 눈을 감았다. 부유감이 느껴지고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약하게나마 실려 오는 탄내에 눈을 떴다. 건물 옥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무겁고 답답한 공기는 곧 차원종이 나타날 것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딴 생각도 잠시, 차원종이 나타날 때의 서늘한 감각이 요원복을 뚫고 살갗에 느껴졌다. 이윽고 차원문이 몇 개씩 열리며 차원종들이 나타났다.
“아, 답답해. 얼른 끝내고 겜방이나 가야지.”
사용할 스킬의 자세를 잡자 조금은 꺼림직한, 무언가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 한 느낌이 들며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위상력을 방출하기 위해 끌어 모으는 힘을 이용한 스킬인 ‘충격파’는 나노 머신들에 의해 차원종을 주변으로 끌고 오게끔 특성을 추가했다는데 아직 불완전한 것인지 생각만큼 모이지는 않았다. ‘위상력을 집중’해 건블레이드의 표면에 위상력을 두르며 리치를 늘렸다. 그리고 옆으로 슬쩍 회피해 차원종들을 한꺼번에 낚아챌 수 있는 ‘영거리 포격’으로 모았던 위상력을 탄에 실어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대로 쓰러져 불타버리는 차원종들도 있었지만 체격이 큰 차원종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칫, 쓸데없이 체격만 커서는.”
죽어간 동족들을 보며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챘는지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더 귀찮아졌다. 나노머신들이 다시 재기능을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귀찮은 상황이 되면 일일이 차원종을 쫓아 처리를 하는데 그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눈에 보이는 차원종에게 덤비려는 찰나 차원종의 머리에 탄이 명중했는지 그대로 불타 사라졌다.
“요원님! 이제부터 저희 특경대가 호위하겠습니다. 얼른 앞장서시지 말입니다!”
오, 좋았어. 오늘은 빨리 끝낼 수 있을지도-
“아니, 잠깐만요! 그거 아직 건들면 안돼요-!”
이미 늦어버렸다. 드론들이 떨어뜨리고 간 회복키트는 이미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사라져버렸다. 아직 체력도 위상력도 만땅인데..
“아...”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는 듯 그 특경대원은 선봉에 서 차원종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 어찌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이동한 다음 지역에 드론이 회복키트를 떨어드려 놓았길 간절히 바랄밖에.
눈에 보이는 한 마리를 불태우고 나자 주변이 휑했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더 이상 차원종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다 해치웠나?”
갑자기 무전음이 들리며 유정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하야! 지금 네가 있는 곳에서 고위험차원종 반응이 나타났어! 얼른 피해!
“예? 전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요?”
근처에 지원해주던 특경대 아저씨가 나를 향해 말했다.
“이세하 요원님. 일단 김유정 관리요원님의 말씀에 따라 이 위치를 이탈하-.”
그 특경대원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들린 파열음에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차마 말로 다하지 못 할 정도로 참혹하게 납작해져 버린, 좀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었던 그것은 마치 하얀 건물 벽에 붙은 검붉은 껌딱지 같았다. 모두가 얼어붙은 그 곳에 낮게 울리는 포효가 들렸다.
그제서야 난 느꼈다. 침체된 공기가 더욱 무겁다. 살갗에 느껴지는 서늘함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내가 수습요원으로서 처음으로 올린 성과였던 말렉이었다.
“말렉? 아냐.. 모습이 조금 다른데?”
그 차원종은 자신이 말렉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먹구름이 몰려오며 낙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낙뢰에 한명이 희생되었다.
“모두 잔해 틈으로 숨어요! 얼른!”
다급히 외치자 다들 제정신을 차린 듯 잔해들 틈으로 숨었고 나또한 마찬가지였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나는 다급한 대로 무전기를 꺼내 유정누나를 찾았다.
“유정누나! 저건 대체 뭐예요? 왜 말렉처럼 생긴 게 여기 나타난거죠? 말렉만 해도 b급 차원종이라 억제기가 다시 설치된 지금은 나타날 수 없다면서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상황파악은 나중에 하자. 모두를 불러 지원요청을 했으니 조금만 참아.
“...일단 해볼게요. 최대한 시간을 끌면 되는거죠?”
-미안해. 세하야.
“...어차피 제 일인 걸요. 그보다도 특경대 아저씨들부터 철수 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라면 죽진 않을테지만...”
아까 그 두 명의 특경대원이 생각나 말끝을 흐렸다.
-지금 퇴로를 찾아보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오늘따라 기다리라는 말이 왜 이리 듣기 거북할까. 목숨이 경각에 달해서? 아니면 내 생일 때마다 기다리라 해놓고는 들어오지 않았던 엄마가 생각나서?
그 때였다. 몸을 숨기고 있던 잔해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머리 위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들 피해요! 내가 막을테니까!”
건블레이드를 꼭 말아 쥐고 ‘발포’ 스킬의 자세를 잡았다. 순식간에 방출된 푸른 열에 말렉을 닮은 차원종은 뒤로 물러났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특경대 아저씨들이 좀 더 안전한 위치로 피하기 위해 이동을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차원종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에게서 방출된 열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위로 점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몰랐다. 발목 윗 부분으로 위상능력자인 나조차도 끔찍할 정도의 전류가 흘렀다.
“으아아아악!”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득해질 뻔한 정신을 겨우 다잡고 특경대 아저씨들을 찾았지만 좀 전까지 내 후방을 맡아주며 지원사격을 하던 사람들은 그 곳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 괴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그저 눈앞의, 저 괴물을 없애버려야 해.
앞 뒤 가릴 것 없이 그 괴물에게 ‘질주’ 스킬로 파고들어 추가타로 괴물 놈의 뒤를 잡았다. 바닥에 닿기 전 ‘하늘베기’ 스킬로 공중으로 도약하며 푸른 불꽃을 휘두른 후 탄창을 모두 비우게 되는 ‘결전기 : 폭령검’ 스킬을 발동했다. 맞았다는 느낌이 제대로 들었다. 그정도의 위력이면 좀 너덜해 졌겠지? 하지만 우쭐해진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괴물놈은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낙뢰를 불렀다. 낙뢰를 피하며 챙겨왔던 보급품 상자를 열어 안에 있을 내용물을 뒤졌다. 하지만 원했던 내용물은 없었다. 회복키트를 낭비하는 바람에 벌어진 사단이었다. 정말 오늘 운 없네. 결국 ‘결전기 : 유성검’의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이건 파괴력이 꽤 되니까 저것도 못버티겠지. 하지만 위상력이 반응하지 않았다. 꺼림직한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설마, 스킬큐브 고장? 수명이 정말 다 되었던 거였어?
-세하야! 무모해! 얼른 후퇴해! 관리요원으로써 명령이야!
상황을 다 보고 있던 유정누나가 무전으로 연락을 해왔다. 안 돼. 그럴 수 없어. 저 괴물을 꼭 죽여야 해. 아저씨들을 죽인 저 놈을. 클로저인 나를 위해서도.
“아뇨, 저 더 싸울 수 있어요. 지원도 아직이니 이대로 저걸 냅뒀다간 피해가 커지잖아요.”
-그렇다고 네가 불리한 상황에서 목숨걸면서 싸울 필요 없어! 세하야, 얼른 후퇴-.
“클로저란거 이럴 때를 위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하는 게 클로저의 임무잖아요?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따돌리고 때려도 그들을 보호하는 거. 그러기 위해 차원종을 죽이는거. 그러다가 차원종한테 죽는거. 모두 클로저의 역할이잖아요? 엄마도 그렇게 살아왔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고, 절 낳은 것도 이러라고 그런 거겠죠. 힘이 있는 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거, 훌륭하고 완벽한 도덕적 이상이잖아요?”
-세하야!
갑작스런 괴물의 후려치는 공격에 피한다고 했는데도 옆구리를 스쳐버렸다. 덕분에 무전기를 놓쳐버렸고 날 나무라던 유정누나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 클로저의 임무. 차원종과 싸우는 것.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 간단하잖아, 아등바등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할 필요 없어, 외롭다고 외칠 필요도 없고. 싸우다 죽는 것. 그래..그거면 된 거야. 자세를 다시 고쳐잡았다. 그리고 남은 모든 위상력을 짜내 스킬을 시전했다.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모든 것을 쏟아내어 내려친 그 곳에는 아직도 괴물이 건재했다. 괴물은 바로 카운터로 묵직한 양손을 휘둘렀고, 스킬의 여파로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파. 이젠 더 이상 일어설 기운도 없어. 위상력마저 다 쏟아 내버렸으니 다음 공격이면 분명 난 죽을 거다. 여기까지인가. 생일날에 제사상을 받다니. 웃어야하나. 언제나 생일날이면 운이 없었던 거 같아. 생일날만 되면 엄마는 반드시 일이 생겨서 같이 있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차피 나 따윈 엄마에게 중요하지 않았던거겠지. 일이 더 중요할테니. 어쩌다 생겨버린 골칫덩어리 여서 날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 상황에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죽으면. 엄마는 과연 슬퍼해 줄까? 그제서야 날 돌아봐줄까?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괴물의 묵직한 발이 들려진 것을 보았다. 피해야 하는데,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죽기 직전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냥 유정누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눈을 감자 갑작스레 지켜주지 못했던 특경대원 아저씨들이 생각났다.
“정말 최악이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