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이슬비편: 에필로그-
Maintain 2015-06-03 6
"아...한가하군..."
소파에 누워, 간만의 휴식을 만끽한다. 옆을 돌아보면 유리는 귀에 헤드셋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고, 막내는 크레파스로 뭔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 하는 행동은 다들 제각각이지만, 평온함이 물씬 풍기는 오후의 검은양 사무실이었다.
벌써 그날부터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크게 달라진 건 없어서, 간간히 복구지역에 나타나는 차원종들을 정리하거나, 아니면 플레인게이트를 탐사하며 보나가 기특한 일을 하면 사탕맛 알약을 하나씩 준다던가. 계속 비슷비슷한 하루였다.
오늘도 마찬가지. 다만 오늘은 플레인게이트가 안정되어 있는 편이라 그곳에 갈 필요는 없었고, 강남 쪽 복구지역에 또 나타난 차원종만 잡으러 가면 됐다. 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그렇게 자꾸 튀어나오는 건지, 이래서야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건강차 레시피를 실험해 볼 시간이 없잖아.
다행히 그 양은 소수에 불과해서, 굳이 팀을 둘로 나눌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셋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대장하고 동생도, 아마 곧 돌아올 거다. 돌아오면, 냉장고에 있는 건강차나 한 잔씩 따라 줘야겠다. 일단 그 동안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저, 아저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볕을 쬐며 눈을 감으려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뜨니, 유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응? 왜 그래. 그리고 아저씨 아니고 오빠라니까..."
"아, 주무시려 했던 거에요? 죄송해요. 방해해서."
"괜찮아... 깊게 잠든 건 아니니까.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뭐, 다른 건 아니고... 요즘 슬비 말이에요. 꽤 많이 변한 거 같지 않아요? 뭐랄까...잘 적응이 안 된다고나 할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래, 확실히 많이 변하기는 했지.
"...오히려 그게 좋은 거 아닌가? 대장도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잖아. 왜, 예전의 대장이 그리워지기라도 한 거야?"
"에이, 그건 아니죠. 지금 모습이 훨씬 더 나은걸요. 다만...신기해서 그래요. 슬비도 그렇고...그리고 아저씨도요."
"나? 난 왜."
"대체 어떻게 하신 거에요? 솔직히 그날 깜짝 놀랐어요. 애가 면담 받고 돌아오더니 그렇게 사람이 달라질 줄은 몰랐거든요. 뭐 알고 지내온 지도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슬비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 정말 처음 봤거든요. 대체 무슨 비법을 쓴 거에요?"
"비법...이라... 그래, 비법 있지. 어른의 관록이란 비법."
자세한 사정은, 일부러 말 안하기로 했다. 다시 그 얘기를 꺼내서, 애들 분위기 망치는 것만은 사양이다.
"에이, 뭐에요 그게. 뭐,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 어른의 관록이란 거, 저도 한 번 겪어본 적 있으니까. 어떻게든 잘 하셨겠죠."
"...그래. 아무튼, 이제 궁금증은 풀렸지? 이 오빠는 애들 올 때까지 잠깐 낮잠 좀 자마."
"안됐네요. 애들 지금 오고 있는데. 소리 안 들리세요?"
문 쪽을 가리키는 유리. 귀를 귀울이니, 두 사람이 시끌시끌 떠드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런, 이거 간만의 낮잠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군. 나는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건강차 두 컵을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믿기 힘들겠지만, 대장이 활기찬 목소리로 귀환을 알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동생이 진 다 빠진 듯한 헬쓱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여, 왔구만. 수고했어. 자, 마시라고."
나는 두 사람에게 건강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으...이거 저번에 아저씨네 집에서 마셨던 그거 맞죠?"
컵 안의 내용물을 보더니, 보기만 해도 떫다는 표정을 짓는 대장.
"맛은 써도, 그게 바로 건강의 맛이라고. 몸에 좋은 거니까, 쭉쭉 들이키라고."
"으...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쓴건 좀 그런데...아무튼 고마워요 아저씨. 잘 마실게요."
대장은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는,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한 입씩 홀짝일 때마다 잔뜩 표정을 찌푸리는 모습이, 그 나이 애들같아 귀엽게 느껴진다.
아, 참고로 깜빡 잊고 말 안했는데, 그 날 이후로 대장은 나를 '제이 씨' 대신 '아저씨'라 부르기 시작했다. 성격도 보시다시피 이렇게 나름 활기차게 변했고, 다른 애들하고도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한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 것도 아마 그런 이유겠지. 확실히 제이 씨라는 호칭은 사무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대장. 누차 말하지만, 난 오빠다. 아저씨 아니야."
불만은 이거다. 거 오빠 두 글자 부르는 게 그렇게도 힘든가? 아저씨는 세 글자, 오빠는 두 글자. 오빠 쪽이 훨씬 부르기도 쉽잖아? 왜 다들 날 그렇게 아저씨 아저씨 그렇게 부르는지 원...
"아저씨 맞잖아요? 나이가 몇인데, 그 연세에 오빠 소리 듣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대장, 날 그렇게 노인네 취급하고 있었구나... 상처받았어."
"뭐, 기분 내키면 가끔 오빠라고 불러는 드릴게요. 아무튼, 잘 마셨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건강차는 다 비웠다. 녀석, 쓴 것도 잘 마시네. 씀바귀가 많이 들어간 거라 좀 쓰긴 했을 텐데.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 줬고, 대장도 기분좋게 받아들였다.
"야, 이슬비! 딴청부리지 말고 빨리 내 게임기나 돌려줘! 끝판왕 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생이, 그 쓴 건강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소리쳤다. 저런. 또 게임기를 뺏긴 모양이지?
"아오, 아저씨! 이슬비 쟤 좀 어떻게 해 봐요! 아까부터 계속 잔소리만 해 대서 버틸 수가 없다고요! 성질 뻗쳐서 진짜."
"하하, 상상 가네. 동생, 그래서 그렇게 헬쓱했던 거구나?"
"말도 말아요! 오늘 같은 날은 차원종도 얼마 없어서 대충 넘어가도 되잖아요? 근데 임무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피곤해 죽는 줄 알았어요. 우리 엄마 잔소리도, 그 정돈 아니었다고요. 아무튼 이슬비! 빨리 내놔 내 게임기! 임무도 다 끝났잖아!"
동생의 거의 절규에 가까운 발악에, 대장은 그 특유의 차가운 눈빛으로 동생을 보며 말했다.
"이세하 너,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임무 중에는 게임 절대 금지라고."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창 사람 집중하는데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뺏어가는 게 어딨냐? 아무튼, 빨리 내놔! 이번에야말로 그 흉악한 끝판왕 자식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야! 내가 그거 깨느라고 학교에서도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러게 누가 임무 중에 게임하래? 안 돼. 거기다 이미 늦었어. 유정 언니한테 말해서, 한 달간 절대로 주지 말라고 했거든. ...잠깐, 학교에서도 그걸 했단 말이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안 되겠네. 유정 언니한테 한 달 더 늘려 달라고 해야겠네."
"...!"
"너무하다는 표정이네? 그래봐야 소용없어. 내가 그걸 비트로 쓰지 않은 거나 다행으로 생각해. 알겠어? 그 자리에서 무릎꿇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맹세하면 한번 생각이야 해 보겠지만."
마치 사형선고와 같은 대장의 단언에, 동생은 더 이상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린 건지 그 자리에서 땅에 손을 짚은 채 좌절하고 말았다. ...음, 뭐랄까. 임무에 충실한 모습이 역시 대장은 대장답긴 하지만, 뭔가 여왕님 같은 박력이 같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응, 그럴 거야. 아무튼, 그래도 동생이 저렇게 좌절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니, 나중에 내가 유정 씨한테 말해서 다시 돌려줘야겠다.
"저, 누나, 누나! 이거 좀 봐요!"
막내가 대장에게 뭔가를 보여준다. 뭘 그리고 있나 했더니... 녀석, 크레파스로 대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와는 다른, 활짝 웃는 그런 모습을.
"있죠, 저는 누나가 그렇게 계속 웃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그거 드릴게요."
"응...고마워, 테인아..."
그 정성에 감동이라도 한 모양인지, 대장은 그 그림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구만.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정 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내게 말했다.
"어 유정 씨.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일은 좀 끝난 건가?"
"유감스럽지만 아직이요. 차원종들과의 전쟁이 끝나니, 이젠 또 서류와의 전쟁이네요. 피부도 많이 상할 텐데..."
"피곤해서 견딜 수 없게 되면 말하라고. 내가 특제 각성제를 만들어 줄 테니까."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전에 송은이 경정님도 그 직접 만드신 녹즙으로 한방에 병원으로 보내셨잖아요?"
"그건 은이가 그걸 한방에 들이켜서 그런 거고...나고 그럴 줄은 몰랐다고."
"뭐 그건 그렇긴 하죠. ...아무튼."
유정 씨는 한편에 모여서 떠들썩하게 얘기하고 있는 아이들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슬비가 저렇게 변해서."
"대장도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여서 살 순 없으니까... 적어도 누군가가 또 그렇게 되는 건 사양이야."
"관리요원으로서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그래도 다행이에요. 다 제이 씨 덕분이네요."
"나? 난 한 거 없어. 난 그냥 등만 살짝 한 번 밀어줬을 뿐이지. 그 과거에서 벗어나는 건, 대장의 몫이라고. 대장은 그리고 그걸 훌륭히 해냈지.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제이 씨가 없었으면 이런 일도 아예 없었을걸요? 그날 제이 씨에게 부탁드리길 잘 했네요."
"뭐...솔직히 귀찮긴 했어.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고. 그래도...앞으로도 난 보호자 역할을 계속하게 될 거 같아. 대장 뿐 아니라, 우리 검은양 애들 모두의...보호자 말이야."
"...그래요, 부탁할게요. 저도 도와 드릴 테니까."
어딘가의 어떤 남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과거에 얽매여서 살아왔다. 그 남자에게 남았던 건, 결국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그 남자는 자신과 비슷한, 과거의 일에 얽매여 살아온 아이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친구들도.
지금도 그 일이 좋은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짐했다. 적어도, 그 아이들이 자기처럼 되게 하지는 않겠다고. 설마, 자기가 어떻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글쓸 시간이 영 나지 않아서 좀 걸렸네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습니다. 그리고 요즘 메르스도 한창 유행이라 사람들도 신경이 많이 예민해진 거 같고요. 다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이걸로 이슬비편이 전부 다 끝이 났네요. 원래는 이 다음에는 단편을 몇개 쓸가 싶엇는데...보니까 콘테스트가 있더군요. 아무래도 거기 참전하게 될 거 같습니다. 이미 글도 몇개 쓰고 있고요. 다른 실력자분들도 많아서 사실 자신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일단 참전을 한 번 해볼까 하니, 응원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