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SPYAIR 2015-05-30 2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 날이야말로 G타워 안에서 쩔꾼 노릇을 하는 김기태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강남 안에(거기도 강남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보추년을 헬리포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호갱이 있을까 하고 헥사부사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초짜인 듯한 제저씨를 강남광장(江南廣場))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 만, 둘째 번에 오 만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크레딧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만짜리 크레딧이 세 번, 혹은 다섯 번 딸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 만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그의 아내가 발컨으로 쿨룩거리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물약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의사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듯이 누워 가지고 일어나기는커녕 새로 모로도 못 눕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병이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열흘 전에 물약을 먹고 체한 때문이다.



그때도 김기태가 오래간만에 돈을 얻어서 앰플 한 개와 불꽃 마룡혼 한 마리를 사다 주었더니 김첨지의 말에 의하면, 오라질년이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남비에 대고 터뜨렸다. 마음은 급하고 불길은 닿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것을 그 오라질년이 숟가락은 고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두 뺨에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을 듯이 처박질하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가슴이 땅긴다, 배가 켕긴다, 자기는 무능하다고 눈을 홉뜨고 **을 하였다.


그때 김기태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이 호박아!"


앓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김기태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환자가 그러고도 먹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물약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병을 하게."



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설렁탕을 사 줄 수도 있다. 앓는 어미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딱딱이(세살먹이)에게 뇌수를 사줄 수도 있다. ---팔 만 크레딧을 손에 쥔 김기태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빗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아지다하카의 근섬유로 닦으며, 광장을 돌아 나올 때였다. 뒤에서 "쩔하는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자기를 불러 멈춘 사람이 수습 요원인 줄 김기태는 한번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학생은 다짜고짜로,


"큐브 쩔 한 판에 얼마요?"


라고 물었다. 아마도 큐브 쩔을 받아서 승급하려 함이로다.


오늘 가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컨은 고자고 템은 구리고 해서 어찌 할 줄 모르다가 마침 김기태를 보고 뛰어나왔음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레귤레이터를 채 수리하지 못해서 질질 끌고 김기태를 뒤쫓아 나왔으랴.


"큐브 쩔이요?"


하고, 김기태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상황에 템도 없이 그 어려운 곳을 엑윽거리고 가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고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아내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 앞집 마나님한테서 부르러 왔을 제 병인은 그 뼈만 남은 얼굴에 유월의 샘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푹한 눈에다 애걸하는 빛을 띄우며,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우우..."


하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며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래도 김기태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무능한 호박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환자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우으... 나가지 말라도 그래요, 그러면 일찍이 들어와요."

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큐브까지 가잔 말을 들은 순간에 경련적으로 떠는 손, 유달리 큼직한 눈, 울 듯한 아내의 얼굴이 김기태의 눈앞에 어른어른하였다.


"그래, 큐브 한 판에 얼마란 말이요?"


하고 학생은 초조한 듯이 쩔러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같이


"도플갱어가 2명씩 4번나오고 그 다음이 보스던가."


라고 중얼거린다.


"십 오만 크레딧만 줍시요."


이 말이 저도 모를 사이에 불쑥 김기태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그 엄청난 돈 액수에 놀래었다. 한꺼번에 이런 금액을 불러라도 본 지가 그 얼마만인가! 그러자, 그 돈 벌 용기가 병자에 대한 염려를 사르고 말았다.


설마 오늘 안으로 어떠랴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일 제이의 행운을 곱친 것보다도 오히려 갑절이 많은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 하였다. 건강이 제일이다.


"십 오 만 크레딧은 너무 과한데."



이런 말을 하며 학생은 고개를 기웃하였다.



"아니올시다. 난이도가 더러워서 저도 가끔 죽습니다. 또 이런 진날에는 좀더 주셔야지요."



하고 빙글빙글 웃는 요원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럼 달라는 대로 줄 터이니 빨리빨리 가요. 나 시간 없다고!"


관대한 어린 손님은 그런 말을 남기고 총총히 템을 챙기고 게임기도 챙겼다.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기태의 큐브 쩔은 이상하게 가뿐하였다. 공중제비를 돈다기보다 거의 나는 듯 하였다. 공콤을 어떻게 넣느냐기보다 그냥 공중에 사는 듯 했다.


그러다 갑자기 컨이 이상해졌다. 자기 아내가 생각난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그러자 딱딱거리는 딱딱이의 딱딱거림이 들리는 듯 하였다. 딸꾹딸꾹하고 숨 모으는 소리도 나는 듯 싶었다.


"왜 그래요? 님 컨 병1신임? 제대로 좀"


하고, 쩔 받는 이의 초조한 부르짖음이 간신히 그의 귀에 들려왔다. 언뜻 깨달으니 그는 어느새 반피이지 않은가.


"아. 예, 예."


하고 김기태는 물약을 쓰고 또 다시 날아올랐다. 생각을 잊자 그는 다시 신이 나서 산들바람처럼 공중에 떠돌았다. 정식 요원 홀로그램을 처치하고 그 깜짝 놀랄 십 오 만 크레딧을 정말 제 손에 쥠에 말마따나 육 분이나 되는 클탐을 질퍽거리고 깬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번 허리를 굽히며,


"승급 축하요."


라고, 깎듯이 재우쳤다.


그러나 빈 파티를 털털거리며 돌아갈 일이 꿈 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십 오 만 크레딧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실히 느끼었다. G타워를 떠나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맞을 것! 이 비를 맞으며 빈 파티를 털털거리고 돌아를 간담. 이런 빌어먹을, 우로보로스를 붙을 비가 왜 남의 상판을 딱딱 때려!"


그는 몹시 홧증을 내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게걸거렸다. 그럴 즈음에 그의 머리엔 또 새로운 광명이 비쳤나니, 그것은 '이러구 갈 게 아니라 이 근처를 빙빙돌며 호갱 오기를 기다리면 또 쩔을 하게 될는지도 몰라.'란 생각이었다.


오늘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 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기를 해도 좋을 만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얼마만에 뉴비는 왔고 수십 명이나 되는 손이 G타워로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손님을 물색하던 김기태의 눈에 머리가 분홍색에 검은 옷을 입고 고양이 귀를 쓴 기생 퇴물인 듯, 난봉 여학생인 듯한 여편네의 모양이 띄었다. 그는 슬근슬근 그 여자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아씨, 쩔 아니 받으랍시오?"


그 여학생인지 뭔지가 한참은 매우 때깔을 빼며 입술을 꼭 다문 채로 김기태는 거들떠 **도 않았다. 김기태는 구경하는 거지나 무엇같이 연해연방 그의 기색을 살피며,


"아씨, 다른 쩔하는 사람보담 아주 싸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디 가시는가요?"


하고 추근추근하게도 그 여자의 들고 있는 나이프에 제 손을 대었다.


"왜 이래? 남 귀찮게. 내 앞에서 사라져버려!"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는 돌아선다. 김기태는 어랍시요 하면서 물러선다.


쩔 시간이 늘어나매 그의 몸은 이상하게 가벼워졌고, 그리고 또 쩔 시간이 줄어들어서 몸은 다시금 무거워졌는데, 이번에는 마음조차 초조해온다.


집의 광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어 이젠 요행을 바랄 여유도 없었다. 나무 등걸이나 무엇만 같고 제 것 같지도 않은 다리를 연해 꾸짖으며 갈팡질팡 위상력을 방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쩔꾼이 술에 취해가지고 이 진 땅에 어찌 가노 하고, 쩔 받는 사람이 걱정을 하리만큼 그의 위상력은 황급하였다.


흐리고 비오는 하늘은 어둠침침한 게 벌써 황혼에 가까운 듯하다. GGV 앞까지 다다라서야 그는 턱에 닿는 숨을 돌리고 걸음도 늦추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워올수록 그의 마음은 괴상하게 누그러졌다.


그런데 이 누그러짐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이 박두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불행이 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곧 불행을 향하고 달려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다고, 구해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마침 길가 포장마차에서 친구 데이비드가 나온다. 그의 각진 얼굴은 주홍이 오른 듯, 온 턱과 뺨을 시커멓게 구레나룻이 덮이고, 노르탱탱한 얼굴이 바짝 말라서 여기저기 고랑이 파이고, 마치 솔잎 송이를 거꾸로 붙여 놓은 듯한 김기태의 풍채와 비슷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김기태, 자네 쩔 하다 오는 모양일세 그려, 돈 많이 벌었을테니 한 잔 빨리게."



안경잡이는 말라깽이를 보는 말맡에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몸짓과 딴판으로 연하고 싹싹하였다. 김기태는 이 친구를 만난 게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자기를 살려준 은인이나 무엇같이 고맙기도 하였다.


"여, 자네는 벌써 한 잔 한 모양이군. 기분 좋아보이는데?"


하고 김기태는 얼굴을 펴고 씨익 웃었다.


"하하. 재미없다고 술 안마실 나인가. 그런데 자네, 몸이 다 젖었구만. 물에 빠진 생쥐꼴이야. 이리 와서 말리게나."


포장마차는 훈훈하고 뜨뜻하였다. 김이 오르는 국물에 들어가 있는 어묵하며, 순대, 떡볶이, 우동, 닭똥집, 빈대떡, 그 외 안주거리...


이 너저분하게 널어놓은 음식에 김기태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대로 할 양이면 거기 있는 모든 먹음 먹이를 모조리 깡그리 집어삼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되, 배고픈 이는 우선 분량 많은 빈대떡 두 개를 쪼이기로 하고 추어탕을 한 그릇 청하였다. 주린 창자는 음식맛을 보더니 더욱더욱 비어지며 자꾸자꾸 들이라들이라 하였다. 순식간에 추어탕을 그냥 물같이 들이켜서 다 마셨다.


어느새 소주 두 잔이 더 왔다. 데이비드와 같이 마시자 원원이 비었던 속이라 찌르르 하고 창자에 퍼지며 얼굴이 화끈하였다. 곱빼기 한 잔을 더 마셨다.


김기태의 눈은 벌써 개개 풀리기 시작하였다. 석쇠에 얹힌 떡 두개를 숭덩숭덩 썰어서 볼을 볼록거리며 또 곱빼기 두 잔을 부어라 하였다.


데이비드는 의아한 듯이 김기태를 보며,


"아니, 자네. 또 마실 건가? 벌써 네 잔이나 마셨는데. 돈이 사 만 크레딧이야."


"아따, 이놈아. 사 만 크레딧이 그렇게 끔찍하냐? 내가 오늘 크레딧을 막 벌었어. 참 오늘 운수가 좋았느니."


"그래, 얼마를 벌었단 말인가?"


"삼백 만을 벌었어, 삼백 만을! 이런 염1병할... 술을 왜 안 부어... 괜찮다, 괜찮아! 막 먹어도 상관이 없어! 오늘 돈을 산들바람같이, 아니, 산더미같이 벌었는데."


"어허, 자네 취했군. 그만 마시게."


"이놈아, 이걸 먹고 내가 취하겠어? 어서 더 먹어."


하며 데이비드의 귀를 잡아치며 취한 이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술을 붓는 스물 하나 됨짓한 여대생에게로 달려들며


"이년, 오라질년, 왜 술을 붓질 않아."


라고 야단을 쳤다. 여대생 희희 웃고 데이비드를 보며 문의하는 듯이 눈짓을 하였다. 주정꾼이 이 눈치를 알아보고 화를 버럭내며


"에미를 붙을 이 오라질 년들 같으니, 이년 내가 돈이 없을 줄 알고?"


하자마자 허리춤을 훔척훔척하더니 십 만짜리 말렉 황금동상을 꺼내어 여대생 앞에 집어던졌다. 그 사품에 몇 푼 은화가 잘그랑 하며 떨어진다.


"여보게 돈 떨어졌네, 왜 돈을 막 끼얹나."


이런 말을 하며 일변 돈을 줍는다. 김기태는 취한 중에도 돈의 거처를 살피는 듯이 눈을 크게 떠서 땅을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제 하는 짓이 너무 더럽다는 듯이 고개를 소스라치자 더욱 성을 내며,


"봐라 봐!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돈이 없나, 다리 뼉다구를 꺾어 놓을 놈들 같으니."


하고 데이비드가 주워주는 돈을 받아,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


하면서 팔매질을 친다. 벽에 맞아 떨어진 은화는 다시 양푼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맞는다는 듯이 쨍하고 울었다.


곱빼기 두 잔은 또 부어질 겨를도 없이 말려가고 말았다. 김기태는 입술과 수염에 붙은 술을 빨아들이고 나서 매우 만족한 듯이 그 솔잎 송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또 부어, 또 부어."


라고 외쳤다.


또 한 잔 먹고 나서 김기태는 데이비드의 어깨를 치며 문득 껄껄 웃는다. 그 웃음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술집에 있는 이의 눈이 모두 김기태에게로 몰리었다. 웃는 이는 더욱 웃으며,


"여보게 데이비드, 내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오늘 호갱을 태우고 큐브에까지 가지 않았겠나."

"그래서?"

"갔다가 그냥 돌아오기가 안됐데 그려. 그래 G타워에서 어름어름하며 손님 하나를 쩔할 궁리를 하지 않았나. 거기 마침 여학생이신지 핑챙이신지, 요새야 어디 아가씨와 챙년을 구별할 수가 있던가. 비를 맞고 서 있겠지.


슬근슬근 다가가서 쩔을 받으시랍시요 하고 나이프를 받으랴니까 내 손을 탁 뿌리치고 홱 돌아서더니만 "내 앞에서 사라져버려!" 그 소리야 말로 꾀꼬리 소리지, 하하!"


김기태는 교묘하게도 정말 꾀꼬리같은 소리를 냈다. 모든 사람은 일시에 웃었다.


"빌어먹을 핑챙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내 앞에서 사라져버려!" 어이구 소리가 체신도 없지, 허허."


웃음소리들은 높아졌다. 그런 그 웃음소리들이 사라지기 전에 김기태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데이비드는 어이없이 주정뱅이를 바라보며,


"아니, 금방 웃고 지1랄을 하더니, 갑자기 왜 울고있나?"


김기태는 코를 연신 들이마시며


"우리 마누라가 죽었다네."


"뭐? 마누라가 죽다니, 언제?"


"예끼, 이놈아. 언제는 언제야, 오늘이지."


"에라, 미1친놈아. 거짓말 하지마라."


"거짓말은 왜... 참말로 죽었어... 참말로. 마누라 시체를 집에 뻐들쳐놓고 내가 술이나 퍼먹고, 내가 죽일 놈이다, 죽일 놈이야."


하고 김기태는 엉엉 소리내며 운다.


데이비드는 흥이 조금 깨지는 얼굴로,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참을 말하나 거짓을 말하나. 그럼 집으로 들어가게."


하고 우는 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데이비드의 끄는 팔을 뿌리치고는 김기태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씨익 웃는다.


"죽기는 누가 죽어."


하고 득의양양.


"죽기는 왜 죽어. 떼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무능한년이 밥을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하고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웃는다.


"자네 정말 미1친 건가. 안사람이 아프다는 건 나도 들었었는데."


하고 데이비드도 어떤 불안을 느끼는 듯 김기태에게 또 돌아가라고 권했다.


"안 죽었어. 안 죽었다니까 그러네."


김기태는 홧증을 내며 확신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십 만 크레딧 어치를 채워서 곱빼기를 한 잔씩 더 먹고 나왔다. 궂은 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김기태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집이라 해도 물론 셋집이요, 또 집 전체를 세든 게 아니라 안과 뚝 떨어진 행랑방 한 간을 빌어든 것인데 물을 길어대고 한 달에 십 만 크레딧씩 내는 터이다.


만일 김기태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랙(Lag)--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딱딱거리는 그윽한 소리, 세살배기의 딱딱거리는 소리가 날 뿐이다.


혹은 김기태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무능한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오지도 않아. 이 무능한 년."


이라고 고함을 친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 버리려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인 까닭이다.


하여간 김기태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 떨어진 판자 밑에서 나온 먼지내, 빨지 않은 기저귀에서 나는 똥내와 오줌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내, 병인의 땀 섞은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김기태의 코를 찔렀다.


방안에 들어서며 설렁탕을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주정꾼은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 무능한년, 주야장천(晝夜長川)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딱딱 소리가 가르릉 소리로 변하였다. 딱딱이가 딱딱거리던 이빨을 멈추고 운다. 운대도 온 얼굴을 찡그려 붙어서 운다는 표정을 할 뿐이다. 딱딱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남편은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베레모를 쓴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껴들어 흔들며


"얌마!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무능한 년!"


"……"


"으응, 이거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평소처럼 우우 거려보란 말이다."


"……"


"으응? 또 대답이 없어? 정말 죽었나보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1깔! 이 눈1깔! 왜 나를 바루 못하고 천정만 바라보느냐, 응?"


하는 말 끝엔 목이 메였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김기태는 미1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위상력이 잘 나오더니만... 오늘따라 운수가 좋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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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갤에 싼거 한번 갖고와봤다.

2024-10-24 22:27:5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