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 : 2002 - (1)
티끌모아결정 2015-05-10 0
뭐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002년 차원전쟁을 배경으로 한 번 써보고 있습니다.
(1)
사정없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경부고속도로 한남 인터체인지는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지난 하루 동안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헌병대는 필사적으로 이 도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지방에서 서울로 급히 이동하는 군부대와 반대로 서울에서 탈출중인 주민들을 동시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로는 체증을 넘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유니온의 클로저 요원이 탑승한 군용 레토나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레토나를 몰고 있던 병사는 10분 전부터,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간부의, 그것도 영관급 간부의 매서운 눈초리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운전병의 역량으로 어떻게 해결될 상황이 아님은 분명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사안이 시급하여 원래라면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새벽부터 한반도에 상륙한 15호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인해 한반도 전역에서 항공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하였다. 산사태와 집중호우가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여 병력들의 이동에서 우회로로 기능해야할 국도들의 상당수가 차단된 것은 덤이다. 설상가상으로 07시부터 영동고속도로가 시간당 700밀리미터가 넘는 살인적인 집중호우로 인해 차단되면서 서울로 향하는 거의 모든 차량들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전직 폭주족 출신이었다던 1호차 운전병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서울 시내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주족이 아니라 F1레이서가 등판해도 레토나로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힘들었다. 다행히 서정래 중령은 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바쁘신 것 같네요.”
“지루하십니까? 미안합니다. 교통이 마비되서 시간이 지연될 것 같습니다.”
“지루하거나 한건 아니에요. 그래도 급한 상황이라고 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클로저께서 나서기 전에 끝났으면 좋았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알고 싶네요. 여기까지 오면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난건지는 아무도 말씀을 안해주셔서..”
“지금 이동수단을 수배했습니다만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원래라면 도착하신 후에 브리핑을 받으셔야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바로 설명해드리죠.”
8시간 전, 구로역에 차원문이 열렸다. 차원전쟁이 발발한 이후 차원문이 열리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장소가 문제였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전선이 열렸고 군은 구로와 영등포 지역의 시민들을 어떻게든 소***는 것과 동시에 차원문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차원종의 대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한국이 보유한 지상군의 대부분은 반쯤 차원종의 영지가 되어버린 북한 지역에서 차원종의 남하를 막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은 극히 제한되었다. 군이 보유하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클로저들은 거의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권에 즉각 투입 가능한 클로저는 거의 없었다. 투입 가능한 클로저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차원종이 충분히 많이 나오기 전에 차원문을 닫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1시간 30분 전, S급 차원종 하나가 차원문을 돌파하였다.
“....아군은 지금 극도의 혼란상태에 있으며 병력도 부족하지만 유효한 화기는 더욱 부족합니다.”
차원종을 재래식 병기로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스캐빈저 수준의 자그마한 차원종이 아닌 중형 차원종을 상대로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대를 보내는 것은 사실상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군은 수도권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병력들은 모조리 긁어모아서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그건 그냥 죽으라고 보내는 거잖아요!”
서정래 중령은 이름도 없이 그저 알파38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리는 유니온의 클로저 요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이다. 그가 일찍 결혼했다면 그 정도 나이의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몇 시간 전, 알파38 요원을 만났을 때, 서정래 중령은 고작 이런 꼬마조차도 전선에 나서야 되는 상황에 경악했다. 언제나 힘겨운 임무의 한복판에 있었을 소년은 아직 정의감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눈앞에 있는 클로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그 지역 주민들은 모두 죽었을겁니다.”
“저말고 다른 클로저는 없나요?”
“네”
사실 차원종들이 국가 수뇌부나 군 지휘부를 암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몇몇 클로저들이 서울-정확하게는 청와대나 국방부-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투입할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3시간 전, 육군참모총장이 차원종에게 암살당하면서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래서 요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군은 여유가 없었고 병력들이 도착하는 족족,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전장에 바로 투입하였다. 대부분의 부대들은 투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멸하거나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런 부대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부대 건제가 무너진 패잔병들을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몇몇 소부대들이 자체적으로 탈출하지 못한 시민들을 이끌고 후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보급도 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수방사는 그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다. 투입 가능한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등포역의 목전까지 도달한 차원종들을 저지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임무에 가까웠다. 알파38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손꼽히게 강력한 클로저다. 그라면 혹시라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령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능하십니까?”
“.....”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 그런 의미라고 서정래 중령은 해석했다.
그러한 생각이 서정래 중령의 머릿속을 오고 갈 때 즈음 레토나 옆에 오토바이가 한 대 도착했다. 수방사 헌병대 소속의 오토바이였다. 서정래 중령은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알파38 요원을 영등포역까지 보낼 생각이었다.
“슬슬 가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듣지 못했습니다마는...”
“그냥 제이...라고 불러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헌병이 레토나의 뒷문을 열자 침울한 표정의 제이 요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장이 낮아서 모든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레토나에서 일어나도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 소년의 키는 서정래 중령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미안합니다. 우리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그래도 부디 서울을 지켜주십시오. 요원님을 믿겠습니다.”
제이 요원은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목례를 한 뒤 차량에서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헌병대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