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 - 01
내가시체라고무시하냐 2015-05-04 2
전쟁이 있었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전쟁이.
서력 이전부터 인류는 계속해서 전쟁을 벌여왔지만, 이 전쟁은 달랐다.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의 동족과 사투를 벌여왔고, 그 희생을 발판삼아 지금까지 도래해왔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발전했을지언정, 진화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이 전쟁은 인류 진화의 **점이 되었다.
서력 2002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와의 조우. 인간이라면 그 존재를 괴물이라고 부를 수 밖 없었다. 인류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전 세계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난 그들의 존재는 급속도로 세계의 변화를 불러왔다. 그들의 존재가 인류에게 득이 될 것인지, 해가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여유는 없었다.
그 존재들에 대한 배척은 인류에게 있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름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인류에 있어 가장 큰 리스크였고, 그 리스크는 거대한 업화를 불러 일으켰다.
차원종이라 불리워진 이형의 존재들과의 사투, 차원전쟁이라 명명된 이 전쟁은 인류에 있어 최초였고,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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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돌아가기로 한거냐?”
어둑한 분위기를 가까스로 밝혀주는 얄팍한 조명사이로 매캐한 담배연기가 떠다닌다. 성인들을 위한 바(Bar)이니 만큼 꽤나 밸런스틱하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좀 심한감이 적지 않아 들었기에 난 잠시 카운터를 벗어나 환기시설을 틀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녀석은 내가 잔에 채워준 진저에일을 어느새 비워 놨다.
녀석은 내 질문에 말없이 잔을 들고 흔들어 보였고, 난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녀석의 잔에 진저에일을 채워 넣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군. 너나, 나나 이젠 유니온과 얽힐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어째서 다시 돌아가기로 한거야?”
그는 잔에 채워진 진저에일을 한번 흔들어 보였다. 저 녀석도 벌써 저런 성인을 위한 음료가 어울리는 나이가 된 것인가. 세월의 흐름이란 참으로 아이러니 하군.
“별 이유 없어. 굳이 이유를 대라면, 그래. 돈이 다 떨어졌거든.”
“하?”
“유니온에서 지급한 연금 말이야. 너무 흥청망청 써댔더니 30줄에 들어서자마자 알거지가 된 거지.”
녀석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진저에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말하기 싫다는 변명인가? 뭐, 원래부터 속마음을 쉽게 내비치는 녀석이 아니었지만 난 그저 표면적으로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어차피 추궁하지 않아도, 자기 입으로 떠들게 뻔 한게 녀석의 스타일이었으니까.
“뭐,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하지만 어쩔 생각이야? 너도 이미 위상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됐잖아. 사무직이라면 모를까, 그런 몸뚱이로 현장투입이라니?”
내 질문에 녀석은 잔을 내려놓고는 기지개를 쭉 펴보였다. 그 작달만한 녀석은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어있었고, 앳된 얼굴은 어느새 연륜이 흘러넘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위상력 각성으로 바래진 머리카락과 저 선글라스 사이로 숨겨진 날카로운 눈매 정도일까.
녀석은 파스냄새가 풀풀나는 몸뚱이를 한참이나 풀더니 주먹을 줬다 폈다 해보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예전만한 기량은 아니더라도 어차피 내 스타일은 근접 전투 스타일이었으니까. 적어도 총알받이정도는 되어줄 수 있을 꺼야.”
“총알받이? 제이, 그게 무슨?”
“아이들이 현장요원으로 선별 됐다나 봐.”
녀석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난 닦던 잔을 멈추고는 제이를 바라보았다.
클로저명 J. 차원전쟁의 실전투입 요원의 몇 안돼는 생존자이자 세계를 지킨 영웅 중 한명.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퇴물이었다.
마치 나 처럼.
제이는 잔을 들어 빙글 돌려보였다. 짙은 갈색의 액체가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녀석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데이비드 형에게 연락이 왔어. 아무래도 유니온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다나봐. 언론에선 쉬쉬하고 있지만, 다시 차원게이트가 열릴 조짐이 이곳저곳에서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 녀석들을 고작 차원문 너머로 쫓아낸 게 전부인데, 윗*** 놈들은 위상력 억제기만 믿고 벌써부터 평화가 도래했다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결과지.”
“그렇군. 그래서 관찰 감시중인 위상 적합자들을 강제소집하기로 한건가.”
제이는 입가에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는 진저에일을 한번에 들이켰다. 예전부터 유니온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녀석이었지만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불신은 더욱 확고해진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나조차도 녀석의 불신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니까.
진저에일을 한번에 해치운 녀석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만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짜증나는 녀석들이야. 나와 같은 전철을 우리 다음세대에게도 겪게 만들다니, 진짜 제정신이 아니라고.”
“동감이다.”
희생이란 잔재위에 남은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면, 우리 같은 퇴물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왔던 것일까.
결국 제이는 이런 결과를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사람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그 추악함을 겪었던 그에게 남겨진 희망은 오로지 미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가 무참히 꺾이려는 지금, 녀석은 그 미래를 지키기 위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뚱이를 이끌고 다시 업화의 불길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이는 한참동안이나 천장을 응시한 채 자세를 고정하고 있었다.
역시나 나이가 먹어도 녀석은 여전했다. 제이는 절망하는 것이 빠르다. 하지만 그만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것도 빠르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한때 전우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사이였으니까.
난 닦던 잔을 내려놓고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후, 대장이 지금 상황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지는 걸.”
내 말에 제이의 몸이 흠칫하는 것이 알 수 있었다. 녀석은 그 방만한 자세 그대로 눈만을 내리깔아 선글라스 너머로 날 바라보았고 난 그 시선을 받아내며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제이는 결국 피식 웃어버리더니 자세를 바로잡고는 말했다.
“아마 대장도 그렇지만 누님도 가만있지는 않았겠지. 상층부 녀석들을 죄다 박살내러 갔을지도 몰라.”
“그리고 우리는 그 두 사람을 말리느라 피가 마르겠고 말야.”
어느새 나와 제이는 대장과 지수의 추억거리를 서로 꺼내들며 낄낄 웃어보였다.
언제나 똑같은 대화.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추억.
우리의 과거는 언제나 어둡고 추악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퇴물에게도 적어도 그 두 사람의 기억은 그 악몽 같은 기억 속에서 빛나는 더 없이 소중한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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