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외국인코스프레 2015-05-03 4
2020년, 강남.
밤이 깊어지면서 수없이 많은 네온사인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그와는 대비되게, 거리에서 동떨어진 채 옅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원룸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테이블 같은, 반드시 쓰일 것 같은 물품들을 제외하고는 우선순위를 두지 않은 썰렁해 보이는 방. 마치 이사를 가기 전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듯한 그 모습 안에서,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무릎을 꿇으며 다소곳이 앉은 채, 작은 손으로 박수를 쳐 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소녀. 아담한 체구에 앳된 외모를 가진 소녀는, 머리카락이 흔하지 않은 핑크색임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엄마의~ 생일 축하 합니다~.”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소녀. 이내 자신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자신의 앞에 놓여 져 있던 폭죽을 터뜨린다. 폭죽의 장식이 어지러이 흩어진 상 위에는, 작은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노래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케이크 위의 촛불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알고 있었다, 이 촛불을 누군가가 불어 끌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말없이 촛대를 골라낸 소녀가, 케이크를 적당히 조각내고는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그 접시의 앞에는, 젊은 남녀가 찍힌 사진이 있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두 번은 까무러칠 표정과 함께, 연신 박수를 쳐대는 소녀. 이내 침묵이 흐르고, 다시금 소녀는 평소와 같은 냉정한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로 돌아와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자신이 골라 둔 초를 세 보았다. 그 때 이후로, 상당히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하는 생각과 함께 슬며시 눈을 감는 슬비. 아직까지도, 어릴 때 보던 부모님의 미소가 생생히 비치는 것 같았다.
차원종에 의해 부모님을 여읜 직후 도와줄 사람들도 없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클로저가 되어 유니온의 요원들을 위해 마련된 거주시설에서 살게 되어 생활에 불편한 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방의 한 쪽 구석에는, 달력이 놓여 있었다. 임무나 행사 등에 대해 표시가 되어 있는, 슬비의 꼼꼼한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는 달력이었다.
그녀의 눈은, 4월의 마지막 날인 4월 30일을 향하고 있었다. 그 칸에는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알고 있다, 그 날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그 때 혼자가 된 이후로, 슬비는 자신의 부모님들의 기일은 물론 생일 또한 빼먹지 않고 챙겨왔다. 그럼에도, 소녀는 자신의 생일을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축하할 사람이 없는 생일 같은 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2020년 4월 30일, 꽃샘추위가 거의 가신 어느 날.
평소와는 달리, 해가 쨍쨍한 정오 무렵에 거리를 거닐고 있는 슬비였다.
그 날은 유난히 임무가 쉬워서, 오전 중에 진즉에 일을 마치고는 다들 대기실을 떠난 상태였다.
세하는 급히 살 게 있다면서 나갔고, 유리는 정미정미야, 기다려! 라는 영문 모를 외침과 함께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제이는 일이 있는지 유정과 함께 조용히 밖으로 나갔고, 미스틸은 눈에 띄게 하품을 하고는 졸린다면서 돌아갔다.
본래 같으면 슬비 또한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아직 시간이 일렀고 날씨 또한 좋았기에 잠시 기분전환 겸 산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휴대폰을 슬쩍 꺼내고는, 기록된 날짜를 보았다. 4월 30일, 그것을 본 슬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의 생일을 어물쩡 넘기는 것은, 몇 번을 해도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살짝 울적해진 채 거리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엄마! 오늘 아니면 안 된다고요!!”
거리의 구석에 선 채, 휴대폰에 대고 애절한 외침을 내뱉고 있는 소년. 검은양 팀의 세하였다. 급한 일이 있다면서 나갈 때는 언제고, 왜 저러고 있나 싶어 살며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저번 것과는 다르다니까요?! 무려 한정판이라고요! 제발요, 엄마! 곧 월급 나오면 바로 갚을 테니 용돈 가불 좀…엄마, 엄마?!”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신호음을 들은 세하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곧바로 고개를 든 세하의 눈에, 그를 보고 있던 슬비의 눈이 못 박혔다.
여전히 게임 타령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아낌없이 경멸의 눈빛을 보내던 슬비였으나, 눈이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피한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세하 쪽이었다.
“…여기서 만나네. 집에 안 갔어?”
“…내가 할 소리야, 급한 일이 있다고 해놓고 여전히 실망시키질 않는구나.”
“…남이사.”
슬비의 비꼼을 적당히 쳐낸 세하가, 자신의 지갑을 꺼내더니 안의 잔고를 확인한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인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그날따라 유난히 생각이 들었다.
비록 생일을 챙길 수는 없겠지만, 기왕 일이 일찍 끝난 김에 팀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하고.
계획조차 없던 일이라 파티 준비 따윈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생일 얘기를 꺼내는 것은 서로에게 민망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런 얘길 먼저 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긴장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경직되었지만, 일단 말을 시작하니 그 다음은 쉬웠다.
“…이세하.”
“응?”
“그…모처럼 시간도 나고 하니까…다른 팀원들이랑 같이 어디라도 가지 않을래…?”
다시금 세하와 슬비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고, 작게 고개를 젓기 시작하는 세하였다.
“…미안, 꼭 살게 있어서 말이지.”
“…그래? 유감이네.”
방금 전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예상했던 말이기에, 곧바로 수긍하는 슬비. 언짢아진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슬쩍 고개를 돌린 그녀가 나지막이 말한다.
“알았어, 어머님께 안부나 전해 줘. 내일 보자.”
“어어, 알았어.”
작게 한숨을 쉬고는, 뒤도 ** 않고 다시금 거리를 거닐기 시작하는 슬비.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세하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그 뒤의 일은 그저 평범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마음에 드는 가게에 가서 평소엔 잘 먹지 않았던 것들을 먹어보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물품들을 둘러보고 하던 게 전부였다.
일단 세하에게 한 번 거절당하고 나니, 다른 팀원들에게 연락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은 평소와 같을 것이다,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고, 혼자서 밤을 보내겠지.
이번 생일 또한 혼자서 보낸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울적해졌지만 금세 괜찮아졌다. 애초에 예전과 같은 나날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어서, 낮은 한숨을 내쉬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익숙한 사운드를 들으며 문을 열었다.
분명 자신이 살던 집이었지만, 그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슬비야, 생일 축하해ㅡ!!”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몇 명의 하나 된 외침이 들려왔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니, 일이 있다며 급히 자리를 떠났던 팀의 멤버들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자니, 유리가 불쑥 튀어나오며 자연스럽게 슬비를 껴안는다.
“야호~우리 슬비 생일 축하해~!!”
“서, 서유리? 너 분명 일이 있다고…”
“그거 적당히 둘러댔던 거야! 아, 정미정미 만나러 간 건 사실이네!”
“…정말, 난 안 온다고 했는데….”
어느새 유리의 옆에 선 정미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런 정미를 돌아본 유리가, 타겟을 바꿔 이번엔 정미를 껴안으며 밝게 웃는다.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왔잖아? 우리 정미정미는 역시 귀엽다니까ㅡ!”
“수, 숨 막혀! 저리 떨어져!!”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뒤덮는 가슴에, 질식사의 위험을 느낀 정미가 유리를 밀어낸다. 그것을 보던 슬비는 이미 익숙한 광경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눈을 돌려, 텅텅 비어있던 자신의 원룸을 둘러보았다. 단조롭지만 눈에 띄게 장식이 되어 있었고, 방의 중앙에는 케이크를 비롯한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정말로?’
“어, 어떻게…?”
“예전에 세하가 얘기해줬었거든! 그렇잖아도 모두들 신경 쓰고 있어서, 이렇게 깜짝 파티를 열기로 한 거라고!”
“대성공인 것 같아요!”
유리의 설명과, 그에 덧붙이듯 소리치는 미스틸. 싱글벙글거리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두 명을 뒤로 한 슬비가, 곧바로 세하를 돌아보았다. 그에 세하가 멋쩍어해 하며, 지나가듯 말한다.
“예, 예전에 엄마가 말씀해 주셨거든. 그래서….”
“…….”
세하의 모습을 보며, 몇 시간 전에 거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슬비. 그 때의 일도 파티를 위한 밑밥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옮긴 그녀가 인원들을 확인한다.
세하를 비롯한 검은양 팀의 네 명과, 그들의 관리요원인 유정, 세하의 친구인 석봉, 그리고 낯익은 얼굴의, 단발머리의 여성.
‘알파퀸…?!’
슬비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으며 목례하는 여성. 그에 반사적으로 슬비가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에 출연하는 연예인을 실제로 본다 해도 이 정도로 긴장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긴장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밀어대었다. 유리와, 언제 왔는지 해맑게 웃고 있는 미스틸이었다. 반 강제적으로 슬비를 자리에 앉힌 두 클로저는, 임무 때에도 안 보여주던 신속한 움직임으로 옆에 앉았다. 이내 자신에게 시선이 쏠림을 인식한 슬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유리가 손뼉을 맞대며 소리친다.
“자, 하나 둘 셋!”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규칙적인 박수 소리와 함께 퍼져가는 목소리들. 그것을 듣던 슬비의 머릿속에선, 얼마 전에 엄마의 생일을 축하해주며 부르던 노래와 오버랩 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다. 자기 혼자서 쓸쓸히 생일을 축하하던 그때와 달리,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밝게 웃는 유리와 미스틸,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는 세하와 정미, 석봉.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알파퀸, 제이, 유정…다들 그 표정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았다. 어느 때보다도 밝은 모습으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슬비의, 생일 축하 합니다~.”
이내 요란하게 퍼져가는 박수소리 사이사이에,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폭죽소리가 장식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지고는, 가만히 슬비를 주시하는 사람들. 그들의 의도를 알아챈 슬비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앞에 있던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서 끈다.
“와아아아아ㅡ!!”
여러 목소리가 뒤섞인 환호성이, 아담하게만 느껴졌던 원룸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소란스러움. 평소에는 그리 선호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지금만큼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리더라는 직책이 눈에 밟혀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그녀를 옹호하듯, 누군가의 손이 분홍빛 단발을 쓰다듬었다.
알파퀸, 서지수였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슬비에게, 연륜에 맞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슬비를 살며시 안았다.
그 순간, 오랫동안 잊어오던 온기가 느껴졌다. 다시는 알지 못할 거라고 느꼈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따스함.
수도 없이 생각해왔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에, 팀의 리더를 맡고 있기에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선, 팀의 모범이 되기 위해선 항상 완벽해야 한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나날이었다.
“…흑, 흐으….”
어째서일까,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민망함을 깨달았지만, 마치 구멍이 뚫린 댐 마냥 제어가 되지 않았다.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누군가와 생일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은 조금도 몰랐었다.
잠시 후, 상황을 깨달은 슬비가 재빨리 서지수에게서 떨어지고는 거듭 사과한다. 한바탕 울고 나니 진정이 된 것 같지만, 그와 동시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소매를 들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거듭 문질렀다.
그런 그녀의 앞에, 두 남녀가 다가왔다. 유정과 제이였다. 말없이 미소를 짓는 두 명을 본 슬비가, 눈이 빨개진 채 묻는 질문한다.
“두 분이 일이 있다고 하셨던 것도, 저 때문이었나요?”
“…뭐, 그렇지. 오늘이 리더의 생일임을 안 유정 씨가, 일부러 힘을 써서 금일 일정을 되도록 빨리 마치게 했었지.”
“오늘 일이 빨리 끝난 건 그 때문이었나요.”
“그런 셈이지.”
제이의 설명에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유정. 그런 그녀를 돌아본 제이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의아함을 말로써 표현한다.
“그렇긴 한데…정말 대단한걸, 유정 씨. 설마 리더의 집의 암호까지 알아 올 줄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긴급 보안용 마스터키를 이용한 것뿐이라고요. 정말, 데이비드 지부장님이 아니었으면 시말서를 몇 장이나 썼을지….”
가만히 얘기를 듣던 제이가, 특정 단어를 듣자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형이 도와준 거야? 이상한 걸 요구하지는 않았고?”
“그냥 나중에 식사 한 번 하기로 한 것뿐이에요.”
“…그런가.”
순간 예민해졌던 제이였지만, 유정의 말에 수긍했는지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화를 끊는다. 그런 두 명의 모습을 빤히 보던 슬비가, 예의 무표정으로 한 마디 꺼내었다.
“…두 분의 배려, 정말 감사해요. 그래서 결혼식은 몇 화 뒤에 하나요? 가능하면 생방송으로 봤으면 하네요.”
“무, 무슨 말이니, 그게!”
“큽, 쿨럭 쿨럭!!”
얼굴을 붉히며 연신 부정하는 유정과, 사래가 들린 듯 기침을 해대는 제이. 무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니 더욱 당황한 두 명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역시 인생이 드라마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슬비였다.
이내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헛기침을 한 유정이,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좀 얘기가 엇나갔지만…생일 축하해, 슬비야.”
“아…감사합니다, 지금 열어봐도 될까요?”
“그래. 한 번 열어 보렴.”
유정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상자의 포장을 뜯는 슬비. 이내 그녀의 손에 들려진 것은, 작은 수첩이었다. 슬비가 선물을 여는 것을 확인한 유정이, 설명하듯 덧붙인다.
“수첩을 준비해 봤어. 별 거 아니겠지만…특별 주문한 거란다.”
손으로 잡기 좋은 크기의, 검은양 그림이 그려져 있는 수첩이었다. 그것을 이모저모 보던 슬비가, 이내 밝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고마워요, 정말 귀엽네요.”
“맘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나도 준비해 오긴 했는데 말이지.”
유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슬쩍 끼어드는 제이.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받은 슬비가 슬쩍 안을 확인하니,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옅게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약인가요?”
“…흠흠, 비타민이나 영양제 같은 것들도 있고, 내가 직접 만든 건강식도 있어. 요새 너무 피곤해보여서 말이지.”
“그렇군요. 고마워요, 제이 씨.”
“그래…무리하지 말라고, 리더. 건강이 제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제 딴엔 상큼하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제이. 그런 그의 표정이 어쩐지 우스워서 쿡, 하고 웃는 슬비였다. 그것을 본 제이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자,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슬비의 앞에 섰다.
“…생일 축하해.”
“그래, 와 줘서 고마워.”
“…그렇게 고마워할 건 없어, 유리가 하도 가자고 성화해서 온 거니까.”
“에? 정미정미가 가도 되냐고 물…읍읍!”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던 유리가 무어라 말하려 하나, 사실 클로저가 아닐까 싶은 움직임으로 재빨리 입을 틀어막는 정미였다. 이내 급속도로 얼굴을 붉힌 채 슬비를 보는 정미의 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슬비가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가 워낙 위험한 일을 하니까…되도록 방해가 되지 않을 걸로 생각해 봤어. 물론 마음에 안 들면…”
“그렇지 않아, 우정미. 정말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그, 그래…조심하도록 해. 난 이만.”
워낙 익숙하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더듬거리며 말하는 정미였지만, 자신이 선물해 준 팔찌를 마음에 들어 하는 슬비를 보고는 곧바로 대화를 회피한다. 마치 딸을 보는 어머니마냥 흐뭇해하며 그런 정미를 보던 유리가, 슬비에게 커다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슬비야! 내 마음이야!!”
“그, 그래. 고마워.”
어딘지 오해를 살 만한 멘트라 생각되었지만, 유리의 성격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을 받는 슬비.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가방에 의아해하며 안에 들어있는 선물을 꺼내 보니, 그녀의 눈이 평소에 보기 힘들 만큼 커졌다.
“이건…?”
책가방이었다. 그런데 슬비가 지금까지 보던 것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는데, 지퍼식이 아니라 커다란 덮개를 이용해 가방의 틈을 막는 구조였다.
“선물을 찾고 있다가, 마침 슬비 너한테 어울리는 것 같아서 사 봤어!”
“그, 그래? 고마워. 그런데 비싸지 않았어? 이런 건…”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그보다 한 번 메 봐, 슬비야!”
“아, 알았어.”
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리둥절해 하며 가방을 메는 슬비. 몸에 딱 맞는 듯한 구조에,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어머, 잘 어울리네.”
“나쁘지 않군.”
“정말 귀여워요, 누나!”
제이를 비롯한 주로 어른들이, 그런 슬비의 모습을 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 자리에 있던 몇 명은 무언가 복잡 미묘한 심정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재빨리 가방을 벗는 슬비. 그리고 그 광경을 뒤에서 보고 있던 정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저건 하지 말자고 했는데….’
다들 깔끔하고 아담한 가방을 칭찬했지만, 정미와 세하, 그리고 석봉만은 그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유리가 별 생각 없이 선물한 그 가방이,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란도셀’이라는 것은 그 세 명만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세 명중에서 석봉만은, 란도셀이 딱 어울리는 슬비의 아담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유리의 선물 차례가 넘어가고, 다음으로 온 것은 미스틸이었다. 귀엽게 눈웃음을 짓고 있던 소년이 내민 것은, 작은 인형이었다.
“아이들의 대통령, 뽀로로에요! 미스틸도 정말 좋아하는 펭귄이에요!! 혹시 누나는 인형을 싫어하나요?”
“아니, 정말 기뻐. 고마워, 미스틸.”
미스틸의 말에, 인형을 살짝 안으며 빙글 웃어 보이는 슬비였다. 그 모습을 본 미스틸이, 활짝 웃으며 덧붙인다.
“다행이다! 역시 슬비 누나도 일단은 여자애니까, 인형을 준비해 봤어요!”
‘일단은…?’
악의는 없는 것 같은 순도 100%의 미소와 함께, 일침을 날리는 미스틸. 분명 진심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모르니까 더 무서운 거라는 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는 슬비였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네! 누나가 좋아해주시면 미스틸도 기뻐요!!”
그렇게 여자 여럿 상처 입힐 것 같은 미소와 함께 미스틸이 물러가고, 나무인형 같은 경직된 움직임으로 슬비의 앞에 서는 한 소년이 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세하의 친구, 한석봉이었다.
양 손으로 선물이라 생각되는 상자를 꼭 쥔 채, 시선을 피하면서 꾹 닫혀 있던 입을 열기 시작하는 그였다.
“새, 새…생일 축하해, 슬비야.”
“그래, 석봉아. 와 줘서 고마워.”
정갈한 눈웃음과 함께 감사를 표하는 슬비. 그런 슬비의 얼굴을 본 석봉이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만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슬비가, 얼굴에 불안한 빛을 띠었다.
“석봉아, 너 혹시 몸이 안 좋니?”
“아, 아…아니, 괜찮은데…?”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얼굴이 너무 붉어서. 열이 있는 건 아냐? 게다가 손도 떨고 있는 것 같고…”
그렇게 말하며, 슬쩍 몸을 일으키는 슬비. 석봉의 열을 잴 생각으로 이마를 향해 손을 뻗는 그녀였으나, 기겁하며 물러서는 석봉에 의해 그 시도는 곧바로 무산되었다.
“괘, 괘, 괘, 괘, 괜찮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슬비야!!”
“그, 그렇구나. 알았어.”
말을 더듬으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니, 곧바로 수긍하는 슬비였다. 역시 석봉의 상태가 이상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 그녀였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이 이상 언급하진 않기로 하였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정미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몇 없었다.
이내 침을 꿀꺽 삼킨 석봉이, 여전히 경직된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다시금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새, 생일 축하해, 슬비야. 이, 이거 별 거 아니지만…받아줬으면 해….”
“고마워, 석봉아. 지금 열어봐도 될까?”
“으, 응….”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석봉. 그에 곧바로 선물의 포장을 뜯은 슬비가,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연다.
이내 그녀의 눈이,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서, 석봉아…이거 설마, ‘사랑과 차원전쟁’에서 광고했던 그 스카프 아냐…?”
“마, 맞아! 슬비 네가 그 프로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어떨까하고…”
스카프를 슬쩍 펼치고는, 이래저래 확인하는 슬비. 이내 자신이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 스카프와 같음을 인식한 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석봉을 올려다본다.
“괘, 괜찮겠어? 이거 꽤 비쌀 건데….”
“괘, 괜찮아! 선물인데 뭘! 아하하하…!”
슬비의 말에, 상상 이상의 지출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신작 게임이 생각나는 석봉이었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보며 밝게 웃는 슬비의 얼굴이 백 배, 천 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렇게 석봉의 차례가 끝나자, 한 여성이 슬비의 앞에 섰다. 자신의 앞에 알파퀸, 서지수가 섰음을 안 슬비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지만, 미소와 함께 그런 슬비를 다시금 앉히는 지수.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그녀가 내민 것은, 작은 상자였다.
“지갑을 준비해봤단다. 혼자 살고 있으니, 분명 돈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테니까. 부디 도움이 되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고는 명품은 아니라는 말과 함께 눈웃음을 짓는 지수. 그런 그녀와 대비되게, 눈에 띄게 긴장한 채로 말을 더듬는 슬비였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평생 간직할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눈까지 떨고 있는 슬비였다. 평소 검은양 팀의 리더로써 언제나 냉정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던 그녀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든 모습. 그런 슬비의 심정을 모르는 지수는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경직된 발걸음과 함께, 자리에 있던 인원 중 마지막이었던 세하가 그녀의 앞에 섰다. 이내 세하의 머리를 쓰다듬은 지수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고, 서로를 가만히 마주보고 있는 두 명이었다. 세하는 어딘가 퉁명스런 표정이었고, 슬비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서로 매일 보던 얼굴이었지만, 그 속은 많은 생각들이 뒤엉켜있음을 서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머쓱해하며 세하가 내민 것은, 세하 본인은 물론 슬비에게도 익숙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게임기?”
“…최신판 PS7 VITA야. 3D 영상까지 지원해 주는 한정판…”
그 뒤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수직 낙하한 서지수의 주먹이, 세하의 정수리를 직격으로 내려찍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살벌한 소리에 쇼크웨이브가 퍼져나가는 줄 알았다. 그에 슬비는 물론 주변의 모두가 경직되었고, 새된 비명과 함께 자신의 머리가 쪼개진 건 아닌가 아연실색하며 머리를 어루만지는 세하였다.
“아, 들? 제대로 줘야지?”
“노, 농담이었는데….”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하는 지수에게, 그렇게 해명하는 세하. 찔끔 나온 눈물을 억지로 밀어 넣은 그가, 보란 듯이 솟아나온 혹을 살살 쓰다듬는다. 키가 1센티는 커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게임기를 다시금 손에 쥔 그가 다른 손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고마워.”
세하의 머리가 걱정되었지만, 지수가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 일을 접어둔 슬비가 조용히 상자를 열었다. 이내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간단한 수식이 되어 있는 끈과 작은 브로치였다.
“이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머리끈은…꽤나 낡아 보여서. 그리고 그것만으론 허전한 것 같아서, 브로치도 준비해 봤어. 받기 싫으면 상관없지만…”
“아냐,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그렇게 말하며, 빙긋 하고 웃어 보인다. 그것을 본 세하가 뺨을 긁적이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서지수는, 세하가 자리를 뜨자마자 슬비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아, 알파퀸…?‘
“정말 볼수록 귀엽네. 우리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아줌마 딸이 될래? 입이 하나 더 늘어도 문제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슬비의 뺨에 얼굴을 부비는 지수였다. 그것을 본 제이와 세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서지수 본인이 모르게끔. 내 엄마가 이렇게 순할 리가 없어! 하는 말을 얼굴에 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하였지만, 어째선지 슬비가 자신을 보자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세하를 빤히 주시하던 슬비가, 이내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지수의 제안에 대답하였다.
“아뇨…마음만 받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러니? 아쉽네.”
정중히 사양하는 슬비를 본 지수가, 못내 아쉬워하며 슬비를 놔 주었다. 그것을 본 제이가, 옆에 있던 세하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며 이를 보이며 미소 짓는다.
“여어~ 좋겠어, 동생.”
“뭐가요?”
“음…아무 것도 아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세하의 반응에, 흠칫한 제이가 자신의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화제를 돌린다. 어째선지 한숨을 쉬는 제이를 보며 의아해하는 세하였지만, 그 의문은 오래 남지 않았다.
그렇게 제안을 거절당한 지수가 슬비에게서 돌아선 순간, 창문이 요란스럽게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폭풍이 한바탕 불어 닥쳤다. 그에 유정을 비롯한 민간인들은 재빨리 몸을 웅크렸고, 클로저들은 그런 그들을 지키는 형세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뿐, 그 이상의 공세는 이어지지 않았다. 가장 앞으로 나와 있던 세하의 눈에, 공중에 떠 있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상자와,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듯한 검은 공이었다.
공은 느린 움직임으로 바닥에 착지했고, 그 위에 있던 상자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이내 공은 사라지고, 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몇몇은 이 사태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던 공은, 분명 예전에 본 적 있던 것이었으니까.
슬쩍 앞으로 나선 세하가 몸을 기울이고는, 상자에 붙어 있던 편지를 떼어냈다. 편지의 겉을 본 세하가 역시나, 라는 표정과 함께 슬비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슬비 또한, 세하와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의 겉표지에는, 애쉬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으니까.
작은 한숨과 함께 편지를 개봉한 슬비가, 천천히 내용을 읽어 갔다.
친애하는 이슬비양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이슬비양.
나도 오늘만큼은 순수하게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차원종의 재앙이 옆에 떡 버티고 있어서 말이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렇게나마 선물을 전하게 됐어.
다시금 생일 축하하고, 선물이 마음에 들길 바라지.
다음에 또 볼 때까지, 지금까지처럼 그 순수함은 잘 간직해두고 있도록 해.
다시 만날 때를 기대하도록 하지.
“…….”
눈이 가늘어진 슬비가, 애쉬가 놓고 간 상자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되도록 빨리 무엇인지를 아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말없이 상자의 포장을 뜯는 그녀였다.
“…이, 이건….”
경악에 찬 목소리와 함께, 상자 안에 있던 내용물을 들어 올리는 슬비. 그것을 본 여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남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미스틸은 빼고.
애쉬가 보냈다는, 슬비의 손에 들어온 선물. 그것은 소위 미성숙한 여성들이 많이 사용한다는…스포츠 브레지어였다.
“이, 이…!”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몰려와, 슬비의 이성의 벽을 강타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것을 주시하던 슬비가, 이내 주위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브레지어를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그렇게 보이기 위해 웃어 보이는 슬비였고, 그런 슬비의 심정을 이해한 여자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웅, 저게 뭐기에 그러죠?”
“…지금은 몰라도 돼, 동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미스틸이었지만, 제이는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이내 재빨리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것저것 얘기를 꺼내는 슬비였고, 금세 방금 전의 해프닝은 잊혀 지게 되었다.
남들 몰래 슬쩍 상자를 열어서는 브레지어의 치수를 확인한 정미가 안도하며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
나중에 다시금 그 선물을 열어본 슬비가 어째서 자신에게 딱 맞는 사이즈냐고 경악하지만, 그것은 더욱 뒤의 이야기였다.
-
그렇게 소란스럽던 선물 증정이 끝나고, 이내 슬비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식사와 함께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워댔다.
파티가 무르익어갔고, 하나 둘 돌아가는 사람들 또한 생겼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떠났고,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슬비는 밖에 나와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슬비의 얼굴을 기분 좋게 어루만지고는 지나갔다. 이내 말없이 미소를 지은 슬비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져 시선을 돌리지만, 이내 세하가 왔음을 깨닫고는 다시금 몸에 힘을 뺀다.
“…알파퀸께서는?”
“먼저 갔어. 나도 곧 간다고 했고.”
“…그래.”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는 슬비에게, 세하의 질문이 이어졌다.
“…파티는 마음에 들었어?”
“…덕분에.”
“그래…그거 다행이네.”
세하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슬비. 그에 안도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간 그가 슬비의 옆에 선다. 남녀는 서로를 시선에 두지 않고,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을 깨고, 다시금 슬비의 입이 열렸다.
“…이세하, 오늘 고마웠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연히 본 자료에 네 생일이 있던 것뿐이니까. 나만 알고 있던 것도 아니고.”
여전히 시선은 하늘을 향한 채, 지나가듯 말하는 세하. 그에 미소를 지은 슬비가 다시금 침묵한다. 이내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작은 상자를 꺼낸다. 그 상자와, 상자의 내용물을 본 세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세하가 선물했던, 브로치와 머리끈이었다. 말없이 자신의 머리끈을 푼 슬비가, 세하가 줬던 머리끈과 브로치를 착용한다. 이내 세하를 돌아보고는, 함초롬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상하진 않아?”
“…괜찮아.”
긍정적인 대답에, 미소를 짓고는 다시금 말이 없어지는 슬비. 그렇게 있자니, 이번엔 세하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여하튼 생일 축하해. 그리고…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래….”
세하의 말에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슬비. 가만히 세하를 주시하던 그녀가, 문득 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말하면…게임은 좀 줄이지 그러니?”
“…왜 또 그 얘길 꺼내고 그래.”
그렇잖아도 서로에게 민감한 소재를 꺼내자, 눈에 띄지 않게 표정을 찌푸리는 세하. 그의 어조가 변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검은양 전통의 리더의 설교가 이어졌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네 취미 생활을 존중해. 하지만 임무를 하는 도중에도 게임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
“별 문제는 없잖아? 임무도 잘 하고 있고.”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뒤엔 너무 늦어. 우리가 언제까지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잖아? 한순간의 실수가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됐어, 이 얘긴 그만해.”
자신을 지적하는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몇 없었고, 이는 세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평소에 하던 것처럼 두 귀를 닫아 버리는 그였다. 생일에까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언짢게 느껴졌기에 그렇게 대화를 끊으려 한 세하였지만, 슬비는 아직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난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걱정할 필요 없어, 알아서 할 테니까.”
“…….”
그렇잖아도 특유의 무표정 때문에 인상을 쓰는 듯이 보이는 슬비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이내 그녀가 한 손가락을 슬쩍 움직이자, 세하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빠져나온다.
방금 전 슬비한테 보여 줬던, 최신형 게임기였다.
“어, 야! 무슨 짓이야?!”
“이걸 부숴버려야 조금은 생각이 바뀌겠어?”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 엄마한테 사정까지 해가면서 겨우 구한 거라고….”
그런 세하의 말에, 더욱 눈이 매서워지는 슬비. 그녀의 손짓에 의해, 공중에 떠 있던 게임기가 세하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춘다. 그에 노심초사하던 세하가, 손을 최대한 뻗으며 소리친다.
“야, 장난은 그만…!”
그 뒤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밤바람으로 인해 식어 있던 세하의 뺨에, 이질적인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다시금 거리를 두는 슬비.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뺨을 어루만지며, 어안이 벙벙해진 세하가 넋 나간 듯 서 있었다.
왜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추었냐는, 당연하고도 직설적인 말이 입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허수아비마냥 뻣뻣해진 세하를, 슬비는 차마 마주** 못하고 있었다.
분명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마냥 붉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고마웠어. 그리고…다음에 봐, 이세하.”
그 말을 끝으로, 세하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날리는 슬비. 웜홀을 사용함으로써, 그 작고 여린 몸은 단번에 세하의 시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집 앞에는 세하 혼자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동안 그 시선은 슬비의 원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러 감정이 버무려진 채,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세하. 멍하니 서 있는 그와 대비되게, 그의 심장은 귀에 들릴 정도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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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슬비의 생일은 한참 지났지만, 늦게나마 이 글을 올립니다.
슬비 유저분들,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많은데 힘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