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페이퍼를 쓰자! 3

삼촌 2015-04-11 5









"…이상, 제이씨의 글이었어. 자! 그럼 다음은 슬비 차례구나. 슬비야, 종이를 이리 주렴"

"유정씨, 지금 내거 한 줄도 안 읽었거든?"

기세좋게 제이가 쓴 글의 첫 문장을 읽어가던 김유정은, 마우스 휠을 굴려 볼륨을 낮추는 것처럼 급격히 소리가 작아지더니 이윽고 누가보아도 티가 날 정도로 슬비의 차례로 넘기려고 했다.

제이로서는 자신의 글이 읽히는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티가 나게 자신의 글을 넘어가려하니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요, 누나. 아저씨의 글이 요즘 시대에 안 맞는다고 하더라도 읽어주세요. 그게 재미있는 거니까요."

"맞아요 언니! 전 제저씨가 뭐라고 썼을지 정말로 기대된다구요~"

세하와 유리가 지원사격에 나선다. 누구를 위한 지원사격인지 긴가민가하지만.

"으..응... 어쩔 수 없구나. 미리 말하지만 이건 내 의견이 아닌 제이씨의 글을 그대로 읽는 것 뿐이야? 정말이야?"

유정씨의 눈이 흔들리면서도 세하를 바라본다. 세하는 한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제이가 적었을 내용이 궁금해 잠자코 있기로 했다.

"…먼저 소년, 아니 세하라고 불러야겠지. 네가 아기일때 한번 봤었는데. 그 때보다 더 누님을 쏙 빼닮게 자라서 참 놀랬다. 좋은 쪽, 안 좋은 쪽 둘 다 말이야."

"...닮아서 미안하네요. 아저씨."

"쿨럭! 이렇게 곧바로 감상을 말하기 있나? 유정씨?"

제이는 MC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종이로 얼굴을 가린채 김유정은 내용을 읽기만 한다.

"그래서 네가 네 어머니처럼 기술명을 외칠 때도 나름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 하지만 말이야, 정말로 궁금한게 하나 있어서 이 기회를 빌어서 묻고 싶어지더군."

유리가 혼자서 눈치챘는지 갑자기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김유정은 흘깃 유리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런데서는 묘하게 감이 빠르다니까.

"그..큽.. 유성검...자체는 굉장히 좋은 센스의 네이밍...이라고..풉..생각하지만...벼..별빛에..잠겨라라는..푸풉!"

김유정은 필사적으로 종이로 얼굴을 가린채 웃음을 참는다. 유리는 테이블에 고개를 떨구곤 경련하고 있다.

장하게도 슬비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얼굴이 새빨개진채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비트가 하나, 비트가 둘...'하고 중얼거리고 있다. 아마 임계치에 도달했을테지.

순수한 미스틸만이 우웅?하고 의뭉스러운 얼굴로 '이게 왜 웃겨요?'하고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 당사자인 세하는 어떠한 상태냐면,

"……."

이미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 어둠에 휩싸여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다.

제이로서는 미안할 뿐이다. 일부러 개그요소를 넣긴 했지만, 롤링 페이퍼라기에 서로 돌려보면서 낄낄댈줄 알았지 이렇게 공개처형식으로 발표를 해버릴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종이는 유정씨에게 넘어가있었다고.'

간신히 웃음을 참은 김유정이 말을 이어간다.

"정말..요즘 소년같지 않은 감상적인...외침..푸크크큽...이라고..생각해. 나중에 벼............별이라도 같이 보...보...러가자고 소.....년.."

김유정은 '별'부분부터는 그야말로 허파를 쥐어짜듯이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세..읍...세하..부분은 되었..읍..으니까...다읍..으로 넘어가요..언니..."

머리 뒤에 떠오른 비트들이 미러볼처럼 번쩍번쩍거려, 쳐다보기도 힘든 상태의 슬비가 간신히  말을 건네었다.

"괘..괜찮지 세하야?"

"…그래."

이미 눈동자에서 광채가 사라진 세하가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나직히 대답한다. 그래도 그걸 용케 알아들은 김유정이 세하의 내용은 건너뛰려는 순간.

"우웅? 저는 궁금한데요? 세하 형, 말해주면 안돼요?"

막강한 성능의 독일 전차는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미스틸의 옆에서 제지해야 할 유리가 행동불능 상태이기 때문에 미스틸의 폭격은 세하에게 그대로 직격했다.

"저는 별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형이 유성처럼 쏜쌀같이 움직일때 정말 멋있어 보였는걸요! 그리고 차원종들에게 어 ** 망가냐고 외칠 때도 되게 늠름해보였어요!"

그만둬, 잘못된 띄어쓰기는 세하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고 소년.

제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본인 또한 인내심에 한계가 다다름을 느껴 간신히 참고 있는 상태였다.

마지막 희망인 슬비마저 테이블에 엎드린채 항복을 선언한 상태다. 그렇게 세하를 구원해 줄 수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일 때.

"…정말 알고 싶어?"

놀랍게도 세하 스스로 먼저 말을 꺼낸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하를 쳐다보았다. 진짜 말해주게?

"네! 되게 궁금해요!"

미스틸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대답해줄거야, 세하야?' 모두들 한마음이 되어 세하를 쳐다본다.

세하는, 깊게 숨을 들어마시더니,

"쿡....미안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말할 수 없어. 알파퀸이 봉인해둔 폭.염.룡.이 날뛰어버리거든."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단히 염세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초비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원-미스틸 제외-은 초긍정주의자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망가진 상태였었나…!'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동아리방을 보며 제이는 한없이 세하에게 미안해졌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나중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잘못을 빌어야겠군.

그렇게 생각면서도 제이는 차원전쟁 시절을 포함하여,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크게 웃어버렸다.







"자, 그럼 다음 부분부터 읽도록 할게."

그로부터 5분 정도가 지났을까. 가만히 앉아 쓰러진 검은양팀+김유정을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세하가 갑자기 창문을 열고 유성검을 시전하여 대로변으로 돌진하려던 것을 제이가 옥돌로 간신히 잡아 의자에 앉힌 후, 나머지를 무릎 꿇게 하여 간신히 세하를 제정신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미스틸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분위기를 따라 잘못을 인정했고, 깊은 어둠에 잠겼던 세하는 겨우겨우 비행청소년에서 다시 검은양의 요원 이세하로 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언제 어둠의(?) 세하가 돌아올지 몰라, 다들 제이가 쓴 세하부분은 건너뛰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는 안건에 동의했다.

"후, 다음은 리더로군. 글로 적으니 만큼 슬비라고 적고 싶지만 펜을 든 팔이 오글거리니 리더로 계속 가자구."

"글에도 '후'하고 쓰는건 정말 아니지 않아요 제저씨?"

유리의 태클은 일리가 있어서 제이는 침묵하기로 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제저씨로 부를건가, 저 소녀는?

"앞서 세하한테도 묻고 싶었던 것처럼 리더한테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아. 일단 검은양 요원복부터가 치마인데도 굳이 이동할 때 하늘을 날아야 되는 지랑…"

"파렴치하군요."

슬비가 제이를 향해 쏘아붙인다,

"내가 봤다는게 아니야. 난 같이 이동하니까 말이지.  박심현 요원이 걱정스러운듯 내게 말을 해주더라구. 인터넷에 관련 영상이 유포되었다고 말이야."

박심현 요원의 뉘앙스는 정확히 말해 '구상했던 사업을 선점당했다'라는 뜻을 품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당장 찾아서 법적 조치를 취해야겠네요."

슬비는 진심으로 불쾌한듯 말한다. 아니 그러니까 바지를 입으라니까?

"방해해서 죄송해요 언니. 계속 읽어주세요."

"그래, …작전을 수행 중일때 네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면 정말로 걱정이 많이 된다고. '내 눈 앞에 무릎을 꿇어'라던지. '내 앞에서 사라져버렷'이라던지 말이야. 그런데 최근 TV를 보다 깨달은 건데 말이야. 이것들 다 그 사랑과 차원전쟁 드라마에서 여주인공들이 말했던 대사 아니니?"

여기까지 읽고 김유정은 불안한 듯이 슬비를 쳐다보았다. 그에 따라 모두들 슬비를 바라본다. 특히 세하는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다.

검은양팀의 리더 이슬비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 시선에 대응하며 평온하게 대답한다.

"휴정을 요청합니다."

"아니, 여긴 법정이 아닌데..."

제이가 맥없이 반박하지만 슬비는 김유정에게 또박또박 말을 이어간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잠시만 시간을 주시기 바래요. 그리고 글을 읽기전에 당사자인 제가 먼저 내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김유정은 슬비의 기세에 압도되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건지,

"이의있소! 재판은 속행되어야 합니다!"

세하가 슬비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모두가 놀라 세하를 바라보자 세하는 능숙하게 두 손으로 테이블을 꽝, 치며 말을 이어간다.

"롤링 페이퍼는 무릇 MC 이외에는 내용을 확인해서는 안되는 것이 무진장 도전의 규칙! 지금 슬비 네가 하려는 행동은 명백하게 규율을 깨뜨리는 월권 행위이다!"

세하의 서슬퍼런 말은 규율주의자인 슬비의 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크읏…!"

슬비는 분한듯이 입술을 깨문다. 그런데...지금 이 소년 소녀는 뭐하고 있는 거지?

제이는 아까 먹었던 약들이 역류하여 입으로 나올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하의 말이 옳구나. 슬비야, 미안하지만 너의 요청은 기각하겠어."

세하와 슬비의 기류에 휩쓸린듯 재판장이 된것처럼 엄숙하게 김유정이 선언한다. 제이는 갈수록 태산이란 속담이 오늘만큼 맞아떨어진 날은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재밌어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겐 이제 말릴 힘도 없었다.

미스틸과 유리는 명백히 '재밌어서 구경하는 쪽' 같지만.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유정 언니가 읊조리는 내용이 과연 종이에 있는 것인지, 사실 확인을 하고 싶습니다. 언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믿음을 공고히 하는 차원에서요."

"이의 없습니다."

세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김유정은 방을 한번 훑어보곤, 절제된 동작으로 슬비에게 종이를 건넨다.

그리고,

슬비가 종이를 받자마자 종이는 순식간에 불에 타서 없어졌다.

"뭐, 뭐하는 지거리야!"

세하가 주먹을 꽉 쥐면서 일어선다.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당사자니까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팀의 불화를 초래하는 이런 종이따위, 존재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그렇죠, 제이 씨?"

슬비는 싸늘한 눈초리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쿠,쿨럭! 음. 그렇지. 옳은 행동이었어, 대장."

"아저씨! 부조리한 외압에 복종하고 말거에요?! 그러면 나는, 나는…!"

나는 어째서!라고 절규하며 세하가 땅에 엎어졌다.

그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어 제이가 어떻게 위로해줘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슬비가 말을 꺼넨다.

"이세하 요원. 너에겐 특별히 검은 양팀의 리더로써 산재처리를 적용해 반년치 월급에 달하는 금액을 일**로 납입하겠어."

깜짝놀란 김유정이 황급히 슬비를 말리지만 슬비의 말은 계속된다.

"그리고 앞으로 한달간은 작전 직전까지는 네가 게임을 하더라도 제지하지 않겠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

세하의 경련이 멈춘다. 그리고 슬비의 결정타.

"참고로 앞서 제시한 금액은 전액 현금 지급으로, 네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모를거야."

"자, 다음은 이슬비의 롤링 페이퍼죠?"

세하는 의연하게 일어서서 김유정에게 진행을 요청한다.

"우- 치사하게 세하만 돈을 받고, 그럴꺼면 내꺼부터 읽지, 나도 상처 잘 받을 수 있는데!"

"우웅, 제이 아저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남은 두명에게서 불평불만이 쏟아진다.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제이는 차라리 내 종이가 불에 타 없어진게 다행히지 않을까 저울질해봤다.

결과는, 역시 불에 탄 쪽이 이득이었다.

"저기 제저씨, 저랑 테인이한텐 뭐라고 했었어요? 네? 막 상처주고 그런거 아니었어요? 아, 저 상처받을거 같은데 슬비야 그 산재? 그거 나도 안될까?"

제이는 종이에 적었던 내용을 상기해보았다.

훈프 때의 안마 실력과 요리작전 때의 범상치 않았던 접대실력을 조합해,  소녀가장 서유리의 적성과 장래를 적절한 '아저씨 개그'를 조합하여 농담조로 적었었지.

"…후, 이 오빠는 남에게 상처주는 일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그런 말을 썼을리가 없지."

제이는 식은 땀에 조금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고쳐 올린다. 유리까지 갔으면 정말 검은양에서 퇴출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우웅, 저는 또 짤리는 건가요…"

"자, 음식이 식겠어, 빨리빨리 진행하자고."

작은 목소리로 미스틸이 중얼거린거 같았지만 제이는 빨리 상황을 끝내고 싶어서 무시하고 롤링 페이퍼의 속행을 요청했다.  

"하아... 또 깨지게 생겼네. 정말 지부장님이랑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하나..."

"유정씨?"

"네?응?아? 아, 그렇네요. 잘 지적해줬어요 제이 씨. 자 다음은 슬비의 롤링 페이퍼구나?"

"네. 저는 누구 씨랑은 다르게 평범한 내용을 적었어요."

"쿨럭! …평범하지 않아서 미안하군."

앞으로 몇일은 가겠는걸. 제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럼 읽도록 하겠어요. 먼저 세하에 대해서구나."

그로부터 시작된 얘기는, 평소에 슬비가 세하한테 하던 설교와 한치도 다르지 않는 내용이었다.

게임하지마라, 작전에 진지하게 임해라. 차원종을 보자마자 유성검을 꽂지마라, 혼자 공중에서 놀지마라 등등, 하던 얘기들뿐이라 제이는 '그럼 그렇지'하면서도 드디어 평범한 롤링 페이퍼의 시간이 도래함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반겼다.

"…그래서, 예전에 말했던 너의 변명이 허구임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을 불러보겠어...라니, 슬비야?"

김유정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슬비를 쳐다본다.

그는 세하도 마찬가지여서 "증인이라니?"하고 질문한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슬비는 담담하게 폰을 꺼냈다.

"말 그대로야. 이세하. 너는 저번에 집에 일이 있어서 빨리 퇴근해야된다고 했지만, 그 때의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증명해주겠어."

그리고 슬비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모드로 했는지 뚜-뚜-하는 연결음이 방 안 가득 울려퍼진다.

"서, 설마 누님인가?"

"어, 엄마라고? 그만둬 이슬비!"

제이와 세하가 황급히 슬비를 말리러 일어선다. 그러나 슬비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마, 알파퀸은 아니니까."
 
"그, 그럼 누구?"

세하가 불안한듯 슬비를 쳐다본다. 슬비와 자신, 그 교집합에 들어갈만한 인물이 누군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을테지.

그에 대한 대답은 폰에서 나왔다.

[여여여여여여여보세요? 스스스스,슬 슬비야?]

"그래 석봉아. 나야."

어지간한 가수들도 혀를 내두를듯한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폰 속의 인물이 대답했다.

[어어어어, 어쩐 일,일이야? 응, 그,그게 꼭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해,해야된다는 뜻이 아니라…]

"응, 물어볼게 있어서 그래. 혹시 지금 바쁘니?"

[아아아아니야. 절대 안,안 바뻐. '여러분 한타 중에 죄송하지만 전 바뻐서 나갈게요!']

석봉이가 작은 소리로 소근거리는것을 듣고 세하가 눈을 크게 떴다.

"야, 너 지금 랭겜 중이야?! 오늘 야근이라며?!"

세하가 즉시 폰을 꺼내 석봉이의 전적을 검색해보았다.

...승급전 중이다.

'나랑 같이 승급하기로 해놓고….'

"세, 세하야? 너도 있어?"

"이 나쁜 자식, 야근이라 구라치고 혼자 승급전하기야?!"

"미, 미안해. 하지만 세하 너랑 듀오면 질 가능성이 높아서…"

"큭...!"

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게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실력과는 별개의 일이다. 냉정히 말해 자신의 게임 실력은 석봉이에 비하면 한참 밑이었다. 그렇기에 석봉이의 버스를 탈 계획이었는데 나에게 통수를 쳐? ...그런데 잠깐?

"근데 너 방금 탈주한거야? 왜?"

[어? 그, 그게...]

"석봉이한테 말 걸지마 이세하. 지금 석봉이는 내 소중한 증인이니까 건들지 말아줬음 좋겠어."

슬비가 세하의 말을 끊고 석봉이에게 말을 건다.

"세하의 말을 들어보니 중요한 상황이었던 같은데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 석봉아."

[소,소소소소 소중한..?!]

"석봉아?"

소년 한석봉, 바야흐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는 중이었다. 대충 사정을 아는 제이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다들 의아한 기색이지만.

[그, 그래서 무슨 일이야 슬비야? 중요한 일이야? 어, 어딘지만 말해 당장 다,달려갈게!]

청춘이구나 소년. 제이는 한창 흥분해 있을 석봉이를 상상하며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림을 느낀다.

"하…."

한 소년은 배신당한 우정에 상처받는 중이었지만.

"좋은 자세야, 석봉아. 하지만 굳이 이곳으로 올 필요는 없어. 너의 목소리로도 충분히 해결될 일이야."

[응 그 그래?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슬비는 자신만만한 눈초리로 세하를 바라본다. 세하는 짧은 시간에 당하는 여러가지 고된 일로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슬비한테는 지금 자신의 거짓말을 들킨 사기꾼처럼 보일 뿐이었다.

"며칠 전에 이세하가 집안일로 조기퇴근을 요청하고 승인받은 일이 있었어. 하지만 그 다음날 우연히 세하와 너가 했던 대화를 듣고 집안일은 거짓말임을 깨달을수 있었지."

[으, 응. 그래서?]

"솔직히 말해줘 석봉아. 그 때 이세하는 너랑 같이 게임하려고 일찍 집에 들어간거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세하를 바라보면서 슬비가 질문한다.

세하는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폰을 쳐다보았다.

석봉아, 부디 남자들의 의리를 보여줘서 내게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알려줘..!

[…….]

석봉이는 여기서 고민하는 눈치다. 제이는 괜시리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사랑과 우정사이, 소년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석봉아?"

슬비가 의아한듯이 재촉한다.

"제저씨, 제가 동생들한테 들었는데, 지금 롤롤이란 게임이 엄청 유행이라서 남자들은 다들 그 게임을 하고 있데요. 그 중 단체로 싸우는걸 한타라고 들었던거 같던데, 그 때는 여자친구가 전화해도 안 받는다나?"

유리가 제이에게 귓속말로 소근거린다. 드디어 이 둔감소녀도 석봉이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깨달은 것일까?

"그런데 아까 석봉이가 한 말로 봐선 그 한타중이란 때에 전화를 받은거 같은데, 이건 아무래도 석봉이가 세하를 그렇게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겠죠?"

"…어떻게 머릴 굴려야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거지?"

"그치만 석봉이가 슬비를 여자친구처럼 생각했다면 전화를 안 받을테니까요. 남자들은 의리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데, 슬비의 전화를 보고 세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니해서 받은게 아닐까요?"

제이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귓속말을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인 유리의….가 아니라, 티 없이 깨끗한 유리의 눈망울을 바라보곤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후, 그렇군. 일리가 있는 말이야."

"역시 그렇죠?!"

"우웅, 무슨 얘기에요 누나?"

"히힛, 우리 테인이한테는 아직 이른 얘기지롱~"

"우웅! 치사해요! 저도 다 알 거든요?!"

아무래도 소년을 응원하는건 자신 뿐인거 같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김유정을 바라보았다.

유정씨라면 혹시 모르지. 이젠 정말 엘리트 관리요원의 면모를 보여달라고.

세하와 슬비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김유정은 제이의 시선을 눈치채곤 제이를 마주본다.

'어떡하죠 제이씨? 슬비가 진짜 산재신청하면 또 본사까지 가서 관련 부서들 다 만나고 깨지고 해야 하는데…. 어휴 하필 산재라니…. 제이 씨 나중에 맥주라도 같이 해줘요….'

거기까지 읽어내고 제이는 자신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음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눈빛을 보면 도저히 차원전쟁의 영웅과 동일인물임을 아무도 믿지 못할테지.

'정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제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약을 찾을 때 드디어 석봉이가 입을 떼었다.

[스,슬비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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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은 글쟁이의 원동력입니당.

..아니, 강요가 아니라, 그, 그렇다구요..그냥..
2024-10-24 22:25:3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