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1)

Larken 2015-03-29 1


이 글을 읽기 전에, 이 글은 석봉이의 ts버전인 석순이가 나오는 글이므로 석순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은 살포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기를.

----------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구로역에서 임무를 받았을 때였다. 처음 그 아이를 만났을 때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어, 어서 오세요.”

아이의 이름은 한석순이라고, 그 나이대의 또래 여자 아이들, 그러니까 나와 같은 검은 양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슬비와 유리하고 비교하면 상당히 왜소한 체구를 가진 아이였다. 거기에 여자 아이 답지 않게 눈 밑에 기미가 짙게 낀 모습을 보노라면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을 가꾸는 것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석순이라는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상이었다.

그 때 구로역의 상황은 당장 그곳에 출몰할 수 있는 차원종들 때문에 애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 역시 평범한 민간인에 포함되는 그 아이를 안전한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절차였겠지만 구로역에는 고위급 차원종들의 소환을 방지하는 자이언트 실드도 존재해서 일개 차원종들은 나를 포함한 검은 양 멤버들이 가볍게 처리할 수 있거니와 당사자인 석순이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므로 계속 영업을 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에 강제로 그 아이를 쫓아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구로역에서 유정에게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이가 영업을 하고 있다는 편의점에 찾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편의점은 나와 같은 클로저나 특경대들을 지원하기위해 비상시에 대처할 수 있는 약품들도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지금의 나는 위상력도 거의 상실된 상태라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도 편의점에 방문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검은 양 멤버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내가 정작 가장 빈번하게 부상을 당해 허구한 날 약을 찾는 모습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석순이 역시 내가 검은 양 멤버들 중에서도 이 편의점을 자주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그 아이는 나한테만 약값을 조금 깎아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처음엔 그 아이의 호의를 거절하려했지만 그 아이는 내가 거절의 뜻을 보일 때마다 거의 강제로 건네주다시피 나에게 약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저, 저희들을 항상 힘들게 일하시는데…. 거절하지마시고 받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기어이 나한테 약을 건네주는 그 아이의 표정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나도 결국 더 이상 그 아이의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편의점을 나온 나는 나를 걱정하던 그 아이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내가 클로저가 되어 차원종들과 한창 전쟁을 벌였던 그 때를 떠올렸다.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때와 같은 광경이겠지.’

끝없이 몰려드는 차원종들의 물량 공세에 상황이 곤란해진 유니온은 부상을 당한 클로저들을 제대로 된 치료도 시키지 않은 채로 곧바로 전장에 재투입하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다. 게다가 차원종들과 달리 클로저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상을 당했음에도 곧바로 전장에 투입된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부상을 당한 클로저가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이렇게 목숨을 부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나는 몇 번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너만은 살아남으라고 외치던 그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도 차라리 그 곳에서 죽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유니온의 높으신 분들이 이런 내 고충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전투에 참가한 모든 클로저 요원들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터이니….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에 나는 두 번 다시 이 일에 관련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조용히 남은 생을 보내고 싶었지만 정말 짓궂게도, 그런 나에게 들려온 소식은 한 때 내가 정말 사랑했었던 여자의 아들이 클로저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나와 함께 차원 전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고,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여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유니온은, 아니 정확히는 데이비드 형은 나한테 그녀의 아들과 그와 함께 싸우게 될 다른 클로저 요원들을 보호 및 관리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부탁을 받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정말 이 세상은 나를 편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다고 느꼈다.

결국 나는 다시 클로저 활동을 시작했지만 내가 보호해야할 클로저들을 보면서 유니온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을 클로저로 내세울 생각을 할 줄이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유니온은 아직도 지금 상황이 차원 전쟁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나는 그 때 편의점에서 석순이라는 아이가 나한테 보여준 그 표정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보여준 그 표정은 어렸을 적의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그녀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정말 그때 그녀도 그 아이와 비슷한 표정이었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와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용감하고 강했다. 그 당시의 나는 그녀를 동경했다. 아니 사랑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해주지 못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녀의 동반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사랑했던 그녀에게 제대로 된 고백도 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내어주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데이비드 형의 부탁을 들어준 것도 미련이 남아서겠지.’

그로부터 벌써 몇 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녀를, 정확히는 세하의 어머니. 서지수를 잊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건으로 나를 조롱한다고 해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사랑했던 연인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진심으로 내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던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서 내가 그 편의점에 자주 들르는 건가.’

사실 최근 들어서 나는 그렇게 큰 부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그 아이가 일을 하고 있는 편의점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 아이는 항상 걱정이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약을 건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나를 걱정해주는 그 표정에는 조금의 거짓도, 가식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이 편의점을 계속 방문하는 것이 정말 순수하게 내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 아이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나중에 좋은 신붓감이 되겠군. 어때? 나랑 결혼할까?”

우연히 그 아이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주다가 나는 그 아이에게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그 아이는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 이거 꽤 재밌네.

“겨, 겨, 결혼이라뇨. 저, 저랑 아저씨랑 나이차가 얼마인데…. 아, 그, 그렇다고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아, 아니에요…!”

땀을 뻘뻘 흘리며 농담으로 던진 내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그 아이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얼굴을 잔뜩 붉힌 그 아이의 모습은 확실히 귀여웠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을 터이니 당장은 이 아이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나이차가 좀 있긴 하지. 알았어, 포기하지.”

“으으… 난생 처음 받은 청혼이… 아저씨한테 받은 거라니….”

“에헤이, 거 너무하네.”

물론 정말로 섭섭하지는 않았다. 나도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한 제의였으니 말이다. 일단 이야기의 주제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고 보니 석순이 너는 예전부터 슬비 앞에서만 유독 긴장하는 모습이더구나.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거냐?”

내 질문에 이 아이의 얼굴은 방금 전 내 농담을 들었었던 것처럼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로군.

“그, 그, 그게… 슬비는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하고, 차, 착실하고, 늠름하고… 에, 또,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슬비를 동경하고 있다는 뜻이구나?”

“네, 그거에요.”

내가 요점을 짚어주자 그 아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슬비는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매사에 침착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매사에 진지한 성격 때문에 세하와 몇 번이고 마찰을 빚는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말이다.

“슬비에 비하면 저는 매사에 소심하고 예쁘지도 않고….”

“응? 다른 건 몰라도 예쁘지 않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겠는데.”

그 말은 진심이었다. 석순이는 눈 밑에 기미가 잔뜩 끼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 말을 듣고도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여전히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다.

“세, 세하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석순이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이 아이에게 자신감을 좀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도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이 아이가 그런 꼴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이지. 자신감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니?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단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편의점을 나섰다. 내 등 뒤로 석순이가 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그 아이의 말을 그냥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이런 문제는 누군가가 격려를 해주는 것보단 그 아이 스스로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자신을 믿어야지만 의미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왜 그렇게까지 그 아이한테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도 처음에는 나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그 아이, 석순이가 나를 걱정해주는 표정, 그리고 내가 무사히 돌아오자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보고서는 나는 대충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한테는 차원 전쟁 다시 내가 보았던 절망스러운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그 모습을,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을 질러대던 그 때의 광경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자기 누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우리들을 지켜주던 그녀의 모습이.

‘…그렇군, 누님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내가 어떤 꼴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 아이들은 무사히 돌려보내겠다. 절망하는 건 나 혼자로서도 족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항상 자신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다른 동료들의 안전만을 중시하던 그녀의 행동을 그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이제껏 석순이 관련 팬픽은 거의 세하랑 엮이는 글만 보이길래 제저씨랑 엮이는 글을 한 번 써보았습니다. 제저씨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저씨가 구로역에서 석봉이한테 실제로 결혼하자는 말을 하기도 했죠.

아, 물론 그렇다고 제가 세하랑 석봉이 조합을 안 좋아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2024-10-24 22:25:0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