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소녀 [신 서울 - 1.]
fithr 2024-01-01 1
- 안녕.
……누구?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새하얀 방.
그 구석에서 혼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죽이고 있던 소녀의 앞에 한 아이가 다가왔다.
소녀보다 작은 키와 덩치.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얼굴과 빠지지 않은 젖살이 귀엽다고 느껴지는 아이는 예쁜 금빛의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 나는…
……언니…
- ………야….
…가……니….
조금만 더 있으면 들릴 것 같은 목소리가… 중간에 끊긴 듯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가연 언니-
“앗…!”
자기를 부르는 루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 가연의 앞엔-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어…. 은하 씨, 루시?”
은하와 루시 두 사람이 벤치에 널브러져 있는 가연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너무 안 일어나시길래 은하 씨가 한번 깨워보라고 했어요.”
“야, 내가 언제 그랬어.”
“후후- 부끄러워하시기는 제일 먼저 연이 언니 챙기셨…”
“시끄러, 내가 아니라고 했지.”
눈을 매섭게 뜨고 루시에게 말하지 말라며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네, 네… 아, 언니 여기 물이요.”
“어, 어어… 고마워, 루시. 그리고 고맙습니다, 은하 씨.”
“……고마우면 일이나 잘 도와줘요.”
부끄러운지 몸을 살짝 돌려 표정을 숨긴 은하를 보며 옅게 웃으며 루시가 건네준 물을 마시려고 하자.
‘……윽!’
귀… 귀가…….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광장 곳곳에 심겨 있는 수많은 식물과 도심 속 차량들의 매연 냄새, 피부에 닿는 옷의 감각. 그 모든 감각이 섬에 있을 때와 비교해 더없이 선명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연이 언니, 왜 그러세요? 혹시 아직도 속이 안 좋으세요?”
“으, 응? 아, 아니야……. 그런데, 은하 씨.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응? 기억 안 나요. 여기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서 잠들었잖아요.”
은하의 말에 그게 정말이냐며 눈을 크게 띈 가연을 보고 은하는 기억이 없는 가연에게 당시 일의 설명과 마침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끼익-
“자, 도착. 일단 꼬맹이들은 저쪽이랑 합류하게 내리지 말고, 너희 세 사람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으으…… 지, 지면… 지면이다……. 욱- 우욱-!?”
“으아아!? 가, 가연 언니!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차량이 멈추자 미끄러지듯 차량에서 내려 땅에 붙은 가연은 이제는 한계라는 듯 속에 든 걸 게워내려고 했고, 그 모습에 루시는 기겁하며 가연을 대리고 인근 화장실로 직행했다.
“하하. 살다 살다 저렇게 멀미가 심한 애는 또 처음 보네. 내가 준 멀미약이랑 구토 봉지를 다 쓰고도 저럴 줄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은하가 반금련과 대화하던 도중.
“신 서울의… 강남 광장…”
세 사람 다음으로 차에서 내린 한 기남은 감회가 새로운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설마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감개무량해 보이네요, 아저씨.”
“그러네요, 한때 여기서 장사를 했었거든요.”
오랜 기억을 추억하며 지금은 영업하지 않지만, 예전엔 포장마차가 있었다며 그곳을 운영하던 대학생을 나중에 자기 회사에 채용하려고 했었다는 말에 은하는 아저씨 추억 타령 같다고 하자. 추억 타령이 맞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어어……”
“저 언니는 거의 반 시체가 돼서 돌아왔네요.”
“멀미를 꽤 심하게 하셨나 보네요.”
한참 추억 타령을 하는 동안 루시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온 가연은 벤치에 쓰러졌다.
“속은 좀 괜찮아요?”
“으으……”
대답 대신한 신음에 여전히 안 좋나 보내. 라며 은하는 루시에게 뭐라도 마실 것 좀 사 오라며 돈을 건네주곤 쓰러진 가연의 옆에서 부채질해주고 있는 은하를 보고 한 기남은 소문만으로 판단하는 건 믿을 게 못 된다고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은 움직이실 수 없을 것 같네요.”
“뭐, 어쩔 수 없죠. 이 상태로 일 나갔다간 또 쓰러질 것 같으니까요.”
“하하하. 확실히 그렇겠군요.”
지금도 인상이 창백한 채 신음하며 잠들어 있는 가연의 모습에 은하의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쳐주던 한 기남은 갑자기 얼굴의 웃음기를 빼더니-
“저… 은하 씨. 혹시 루시 양이랑 가연 양한테 말 좀 전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을요? 급한 거 아니면 직접 전해요.”
“아… 저도 마음 같아선 직접 전해드리면 좋겠지만, 이것저것 좀 해결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한 기남의 말에 은하는 사채업자랑 관련돼있는 일이라고 바로 간파했고, 그걸 눈치 못챌 은하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한 기남은 솔직히 말했다.
“사실… 섬에 있던 분들은 예외 없이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더군요. 그런 걸 받고 나면 당장에 이 한 기남이 강남에 돌아온 게 사채업자들에게 알려질 텐데… 하는 수 없죠. 예휴… 그렇게 됐으니 한동안은 그쪽 관련 일을 정리하러 돌아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한동안 세 사람만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말에 은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제가 아는 사실 몇 가지를 알려드리죠.”
당분간 따로 움직여야 할 수도 있으니 전달해야 할 정보는 지금 다 전해주어야 한다.
“처음 쓰레기 섬에 들어갔을 때였어요. 죽어가는 노파 한명을 간호한 적이 있는데… 그 노파, 죽기 직전에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마치 희망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는 자기가 ‘교단’의 신도였다고 했어요. 하지만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려서 ‘도사’에게 숙청을 당하고, 섬에 보내진 거라고 하더군요.”
“교단… 도사… 수상쩍은 단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네요.”
“그 노파는 제게 교단을 파멸시켜달라며 예배시설 몇 군데를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들은 위차가 하나같이 차원종 출몰 등으로 봉쇄나 접근 제한 등이 있는 곳이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차원종을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일부로 시설을 지었다 합니다. 교단이 섬기는 신이, 차원종이였던 셈이죠.”
“차원종을 신으로 섬긴다고요? 미치셨나? 제정신이 아닌 패거리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요?”
지금 이곳에 다른 둘이 없기는 하지만 들었다면 두 사람도 은하와 별반 다름없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흠, 그러게 말입니다. 과거에 차원종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단체가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오래전에 와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그 종교단체의 후예이거나 분파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이 예배시설이라면 단서가 있을 겁니다.”
라는 말까지가 한 기남과 은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었고, 은하의 말을 들은 루시는 마물들을 신으로 섬긴다니…. 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가연은 말없이 그저 무의식적으로 자기 신체를 보호하려는 듯 팔을 부둥켜 잡았다.
“그럼…… 한 기남 씨는…”
“아, 지금 저기서 통화 중이에요.”
은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어딘가 굽신거리는 한 기남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곤란하면 내 이름 팔라고 했으니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은하 씨 이름이 상당히 신뢰가 높나 보네요.”
“뭐, 신뢰는 모르겠고. 악명은 좀 높아서요.”
태연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왠지 조금 위태로워 보이는 은하의 모습에 조용히 손을 잡는 가연을 보고 은하는 뭐하는 거냐고 물었고, 가연은 자기도 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로 황급히 손을 뗐다.
“아… 아하하… 죄, 죄송해요… 제가 왜 이랬을까요…?”
“……뭐, 나쁘진 않았어요.”
“예? 뭐라고 하셨어요?”
보통이라면 잘 들리지 않는 주변의 다양한 소리가 가연의 귓가를 쉴 새 없이 지나가는 탓에 대화하는 동안 한시라도 집중을 풀면 상대방이 뭐라 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은하에게 뭐라 말을 했냐 물어보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을 다물더니 급히 화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아, 맞다. 우리도 병원에 오라던데요. 섬의 독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확인해야 한다고.”
흠칫-.
그 말에 루시와 가연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응? 둘 다 표정이 왜 그래요?”
“음… 그게 제 몸은 분신이다 보니… 다른 평범한 분들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요….”
“저도… 꽤 오랫동안 인체 실험을 받았다 보니…… 결과가 별로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아…… 확실히 그렇긴 하겠네요. …일단 나중에 어떻게 하든가 하죠.”
은하는 두 사람의 신체에 특수성을 생각해 골치 아프게 됐다며, 일단 나중에 뭔가 수를 쓰든가 하자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 한 기남을 두고 머리도 비울 겸 잠시 각자 행동하기로 하자며 제안했다.
“좋아요. 새로운 곳에 와봤으니, 탐험을 해봐야죠!”
“누가 어린애 아니랄까 봐, 알았어요. 그럼 언니는 어쩔래요?”
“저는… 아라랑 애들이 있는 병원에 한번 가보려고요.”
섬의 아이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도 궁금하고, 병원에서 애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요? 나도 이따가 가보려고 했는데.”
“아, 저도요! 저도! 저도 같이 갈래요!”
본의 아니게 세 사람 모두 애들이 있는 병원 방문을 목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러면 각자 움직이자는 말을 한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도, 가보고 싶은걸요.”
“그냥 다 같이 갈까요?”
어차피 가는 곳이 같다면 따로 다닐 이유는 없으니 다 같이 가는 걸로 하자며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과 코를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냄새 속에서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한 채 두 사람을 따라 희망과 아라. 그리고 섬의 아이들이 있는 병원에 도착하였다.
‘하…… 하아…. 으… 약품에… 이건 피 냄새…? 의료기기에 차량, 사람들 소리까지……’
무엇하나 너무나도 예민해진 가연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하였다.
‘으…… 아, 안 되겠다. 잠깐 저기 공원에서 쉬었다가…’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혼자서 조금이라도 쉬고 싶어 병원 문이 아닌 병원 앞 공원으로 향하자.
“어? 연이 언니!”
“……어. 아라야.”
뒤틀릴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가연에게 반갑게 다가오는 아라의 모습에 가연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기 품으로 달려온 아라를 받아냈다.
“어, 루시랑 수금원 언니도 있네. 다들 다시 봐서 기뻐!”
“네, 저도 다시 만나서 기뻐요! 이런 멋진 거리에서 재회하다니, 참 기분이 좋네요!”
아라와의 재회에 기뻐하는 루시와 달리 은하와 가연은 품 안의 아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라야.”
“응? 왜 언니?”
“이렇게 병원 밖으로 나와 있어도 괜찮아? 어디… 아프거나 그러진 않고?”
“병원? 이 하얀 건물을 병원이라고 하는 거야? 응, 일단은 그 하얀 건물에서 지내고 있어. 간호사라고 불리는 어른들이 가끔 이렇게 건물 바깥으로 데려가 줘. 바람을 쐬라고.”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군, 그 간호사들 말. 잘 들어. 치료 잘 받고, 그래야 얼른 나을 거야.”
“응, 좋은 어른이 될 거야. 수금원 언니랑 연이 언니처럼 좋은 어른이 될래!”
해맑게 웃으며 두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아라의 말에 은하와 가연은 순간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둘 다 각기 다른 사정으로 결코 좋은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자기들같이 라는 말에 두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며 표정을 숨겼다. 아라는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한 듯 해맑은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언니들이랑 루시. 그리고 심부름꾼 언니랑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우린 아직도 그 섬에 있었을 거야.”
“정말 고마워, 모두가 우릴 구해줘서. 섬에서 구해줘서.”
자기들을 구해준 은인인 이들에게 하는 감사의 표현.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루시 말이 맞아. 누구라도 알았다면 당연히 했을 일인 걸 그러니 감사해할 필요는 없어.”
그 표현에 루시와 가연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며 답하였고-
“……됐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은하는 어느새 조금 떨어진 채 대답 대신 황급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 은하 씨! 정말 은하 씨도 참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루시는 어느새 병원에서 멀찍이 떨어진 은하의 뒤를 쫓아갔고, 가연 또한 아라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하자.
“아, 언니. 잠깐에 병원에 같이 들어갈 수 있어?”
“응? 어… 아마… 될… 걸? 그런데 그건 왜?”
“애들 중에 언니를 보고 싶어 하는 애들이 있어서. 언니가 왔다는 걸 알면 좋아할 거야.”
순간 아라의 말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걸 끝내고 난 뒤에 꼭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애들한테는 언니도 많이 보고 싶다고 다음에 꼭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 부탁하였다.
“그럼 아라야, 의사 선생님이랑 간호사분들 말씀 잘 듣고 치료 잘 받아야 해.”
“응! 어른들 말 잘 듣고, 치료도 잘 받아서 꼭 건강해질 거야. 건강해져서 희망 오빠랑 애들이랑 같이 놀러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을 거야. 물론 연이 언니도 같이!”
자신을 부르는 아라의 해맑은 표정에 가슴 깊이 따스함을 느끼며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아라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은하 언니랑 루시도 같이 가야지. 그리고 다른 두 분도 같이 가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아! 그렇겠다, 그럼 빨리 건강해져서 모두랑 같이 놀러 갈 거야!”
“그래, 그러기 위해선 지금은 우선 뭘 해야 할까?”
“어른들 말 잘 듣고, 열심히 치료받는다!”
“맞았어. 우리 아라 다음에 볼 때는 더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보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고, 해어지기 전에 나눈 대화를 간호사분이 들었는지 가연을 가리키며 친언니나 혹은 엄마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아이들이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그리고 그 아이들이 원래 누려했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한해동안 다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